75화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며 사탕과 초콜릿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정우진은 차 문을 열어 사이드포켓에 넣었다.
“군것질하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카메라맨의 질문에 민망해서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 괜찮다고 하는데 자꾸 가지고 가면서 먹으라고 줘서……. 김밥인지 도시락인지 그런 것도 싸 주겠다는 걸 겨우 말렸어요.”
웃으면서 말하는데 문득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입을 벌린 채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서 움찔하는데 정우진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선배님, 혹시 김밥 싫어하세요?”
“어?”
“…….”
“아니……. 안 싫어하는데…….”
말꼬리를 흐리다가 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김밥 가져왔어?”
“네…….”
작은 대답에 나는 숨을 한 번 삼킨 다음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안 싫어해. 나 김밥 좋아해. 김밥 좋지. 소풍 같고 좋네.”
뒤늦게 수습하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카메라맨이 또 웃고 있었다. 그 뒤로 다른 스태프가 와서 나는 마이크를 차고, 정우진은 그 와중에도 계속 떨어진 걸 줍고 있었다.
“저희 이제 차 타고 가면 되죠?”
얼추 준비가 끝난 것 같아 묻자 카메라맨이 대답했다.
“네, 준비 다 되셨으면 출발하시면 됩니다.”
나는 다시 카메라를 보면서 인사한 후 차에 탔다. 정우진이 돌아서 운전석으로 오는 사이 차 안에 고정되어 있는 카메라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정면에도 있고 옆에도 있고 뒤에도 있고……. 몇 개가 있는 거야?
“선배님, 안전벨트요.”
차에 탄 정우진이 나를 보며 짧게 말했다. 그걸 보며 나는 놀란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직접 움직이지 않고 말로 해 주다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안전벨트를 하고 주머니에 넣어 놨던 군것질거리들을 차 안 여기저기를 열어서 넣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아침 드셨어요?”
“아니, 너는?”
“저도 안 먹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을 봤다. 우리끼리 가는 것이기는 했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스태프가 탄 차가 뒤를 몰래 따라온다고 했었다. 지금 당장 보이지는 않는데…….
“뭐 두고 왔어요?”
“어? 아니.”
내가 계속 뒤를 보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카메라도 있고 하니까 티를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똑바로 앞을 보려다가 우연히 정우진의 얼굴을 봤다. 안 그래도 흰 얼굴이 오늘따라 더 맨들맨들하고 하얗게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이게 하얀 게 아니라 혹시 창백한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만히 보니 눈가도 좀 붉었다. 아니, 하얗고 맨들맨들한 게 아니라 진짜 창백한 거 맞네.
“너 혹시 잠 별로 못 잤어?”
내가 계속 쳐다봐서 그런지 덩달아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너 얼굴이 좀……. 못 잔 것 같길래.”
말을 하다 보니까 좀 전에 정우진이 김밥을 가지고 왔다고 한 게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정우진을 보며 또 물었다.
“아까 네가 가지고 왔다던 김밥, 그거 설마 네가 싼 거야?”
“네.”
“사 온 게 아니라? 직접 김밥을 말았다고?”
“네? 네, 왜요?”
정우진은 내가 왜 놀라는 건지 영문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보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아니, 무슨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난 네가 아까 김밥 가져왔다고 해서 사 온 건 줄 알았어.”
“그냥 가면 심심하기도 하고, 뭐 먹으면서 가면 좋잖아요. 그리고 소풍 비슷한 것도 맞고…….”
그 말에 나는 다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풍 비슷한 건, 뭐가 소풍 비슷한 거야? 촬영하고 있잖아.”
“최대한 카메라 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소풍 맞죠, 뭐.”
반사적으로 나는 힐끗 카메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그렇게 말하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일단 출발하기 전에 송철 피디에게 받았던 주소가 찍힌 문자를 확인했다. 그걸 내가 불러 주자 정우진이 내비게이션에 입력을 하고, 이제 출발할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갈게요. 뭐 잊은 거 없으시죠?”
“없어.”
내 말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계속 메고 있던 백팩을 벗느라 안전벨트를 풀며 꿈지럭거리다가 아, 하고 물었다.
“김밥은 어디 있어?”
“뒷좌석 가방에요. 근데 선배님은 짐이 그게 다예요?”
백팩을 벗어 뒷좌석에 던져 놓고 정우진이 말한 네모난 가방을 집어 왔다. 생각보다 묵직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지퍼를 열면서 말했다.
“어, 그냥 별거 안 챙겼어. 너도 가지고 온 건 이게 다…….”
가방을 열자 보인 건 도시락처럼 보이는 네모난 통과 보온병이 전부였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걸 보다가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너 짐 안 가지고 왔어? 도시락만 챙겨 온 거야?”
아무리 소풍이라고 생각해도 그렇지 어떻게 도시락만 딸랑 가지고 오지?
당황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캐리어 가지고 와서 트렁크에 있어요.”
“뭐? 캐리어?”
“네, 짐이 좀 많아서…….”
이건 도시락만 가지고 온 것보다 더 놀랄 일이었다. 나는 혹시 내가 송철 피디에게 잘못 들었나 싶어 물었다.
“우리 2박 3일만 있다가 오는 거 아니야?”
“맞아요.”
“옷도 다 준비해 놨으니까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한 거 맞지?”
“네.”
근데 도대체 뭐 때문에 캐리어를 챙긴 거지? 그냥 끌고 다니기 편해서 가지고 온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혹시 다치거나 탈이 날 수도 있으니까 비상약도 챙겨야 하고,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담요나 걸칠 거랑, 저수지도 있다고 해서 수건이랑 저번에 선배님이 사 주신 선글라스랑 모자도 챙겨야 하고, 일기 예보 보니까 비 올 확률도 있어서 우비랑 우산이랑 낮에는 아직 해가 뜨거우니까 선크림이랑…….”
“우진아.”
“네?”
주절주절 읊는 정우진의 말을 듣다가 그의 이름을 불러 말을 끊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고르다가 최대한 정제를 해서 입 밖으로 꺼냈다.
“너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감사합니다.”
수줍게 웃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다가 다시 도시락을 쳐다봤다. 정우진이 저렇게 구구절절 말을 하면 이상하게 불안했다. 워낙 예측할 수가 없어 저 입에서 또 무슨 희한한 말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때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운전대를 잡고 앞을 보고 있던 정우진이 갑자기 말도 없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귓속말을 했다.
“저 시계도 가지고 왔어요.”
귓가에 닿는 숨결에 너무 놀라서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미 온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였고, 마음 같아서는 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카메라가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비명을 겨우 삼켜 내고, 나는 자연스럽게 한쪽 귀를 막고 벅벅 문지르면서 말했다.
“야, 너는 무슨 화장실 가고 싶다는 얘기를 귓속말로 해.”
“네?”
“가다가 휴게소 있으면 거기 잠깐 들르자.”
시계도 가지고 왔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시계에 대해 떠들 거라고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단 나는 말을 돌렸다.
내가 갑자기 딴소리를 하자 멀뚱멀뚱 나를 보던 정우진이 활짝 웃었다.
“네, 그럼 가다가 휴게소로 빠질게요.”
“어, 그래…….”
또 뭐가 저렇게 좋은 걸까……. 이제는 예측도 되지 않아서 나는 그냥 짧게 대답하고 재차 도시락을 확인했다. 가만히 보니까 크기가 생각보다 크고 높이도…….
도시락의 가장 아래쪽을 확인한 나는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이게 다 도시락이야?”
“네, 왜요?”
“3단?”
“네.”
이 정도면 소풍이 아니라 그냥 운동회 아닌가? 애들이 장난처럼 말했던 3단 도시락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
“보온병은 뭔데?”
“김밥만 먹으면 목이 멜 수도 있으니까 소고기 뭇국도 같이 끓여 왔어요. 선배님 고기 좋아하시잖아요. 아침에 빨간 국물 먹으면 속 안 좋을 수도 있으니까 맑게 끓였어요.”
“…….”
술술 말하는 걸 들으며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에 김밥을 싸 왔다고 했을 땐 그냥 락앤락 통에 담아서 조금 가지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도시락을 싸 왔을 줄이야.
“그리고 김밥만 먹으면 물리니까 선배님 오이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오이도 먹기 편하게 스틱형으로 자르고, 소시지도 굽고, 입가심도 해야 하니까 과일도 몇 개 잘라 왔어요.”
정우진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왠지 이 안에 엄청난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1단에는 가게에서 사 온 것 같은 비주얼의 큼지막하고 맛있어 보이는 김밥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2단에는 조금 전 정우진이 말했던 것처럼 스틱형으로 잘린 오이와 당근,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려 있는 구운 아스파라거스, 문어 모양의 소시지, 샛노란 계란말이, 백김치, 단무지가 서로 섞이지 않게 각각 다른 칸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3단에는 과일이 있었는데, 과일 가게를 통째로 털어 오기라도 했는지 종류가 엄청 다양했다. 한입 가득 먹을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하게 자른 멜론과 적포도, 청포도, 키위, 체리와 방울토마토까지…….
갑자기 도시락에서 빛이 나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이거 사 온 거야?”
고기도 제대로 못 굽는 애가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든 거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산 거 아니에요. 제가 밤새워서 만든 거예요.”
“밤을……. 아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에 도시락을 하나씩 보여 줬다. 1단부터 3단까지 차례대로 잘 보일 수 있게 가까이 가져다 대며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세가온 씨가 밤을 새우면서 만든 도시락입니다.”
내 말에 운전을 하고 있던 정우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별안간 뭉클해졌다.
아니, 애가 도대체 얼마나 기대를 했으면…….
친구가 없어서 농담도 잘 못 하고 별로 놀아 본 적도 없다고 했으니, 당연히 소풍도 가 봤을 리가 없었다. 영화 보러 갈 때도 잔뜩 들떠서 공작새처럼 꾸몄던 게 떠오르자 커다란 책임감이 생겼다.
사실 나도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건 안 좋아해서 여행을 많이 다녀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정우진보다는 나으니까 내가 이번에 책임지고 노는 게 뭔지 알려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