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 때에는, 학교를 가는 길에 담이 높아 빨간색 지붕밖에 보이지 않는 집이 있었다. 대문은 항상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주 가끔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은 너무 궁금해서 담벼락을 타고 올라갔더니 넓은 마당 구석에 목줄이 매인 커다란 개가 있었다. 짖지도 않고 등에 털을 바짝 세운 채 검은색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만 해서 손으로 담벼락을 쾅 치니, 작게 한 번 짖기도 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학교에 가기 전, 매일 아침 담벼락에 올라가 잠시 개를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개는 내가 담벼락을 한 번 치면 한 번 짖고, 두 번 치면 두 번을 짖고, 세 번을 치면 세 번을 짖어 댔다.
이렇게 똑똑한 개가 묶여 있는 게 너무 불쌍해서 가끔 과자를 던져 주기도 했다. 만져 보고 싶은데 담의 안과 밖은 높낮이 차이가 있어 한 번 안쪽으로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러지는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나자 개는 나를 보면 꼬리를 흔들었다. 혼잣말처럼, 일기를 쓰듯이 담벼락에 매달려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저 개가 우리 집 개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매일 예쁘다고 해 주고 밥도 주고 깨끗한 물도 주고, 같이 산책도 갈 텐데.
몇 날 며칠을 떼쓰고 울어 봤지만 결국 나는 개를 키우지도 못하고, 이름도 모르는 개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동네를 떠나야만 했다.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가 남의 집에서 살면서 학교를 다니다가 문득, 너무 더워서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이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는, 털북숭이 작은 개 같은 그 애와.
그 애는 높이 솟은 담벼락 안이 아니라 붉은색 벽돌 건물 가장 아래쪽에, 거의 바닥과 붙어 있는 자그마한 창문 안에 있었다. 처음 개가 나를 보며 털을 세우고 경계했던 것처럼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지만,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어디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나를 보다가 겁을 먹은 것처럼 주춤주춤 다가와 움직일 때마다 끼이익, 끼이익 소리가 나는 창문을 힘겹게 닫았다.
다음 날부터 나는 개를 보러 갔던 것처럼 매일 아침, 학교를 가기 전에 쪼그리고 앉아 창문 안쪽을 확인했다. 대부분 창문은 닫혀 있어서 학교를 마치고 가기도 했고, 늦은 밤에 나와 확인을 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더 마주치자 그 애는 더 이상 창문을 닫지 않고 몇 발자국 떨어져서 나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또 며칠이 지나자 우리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고, 더 시간이 지나자 그 애가 녹이 슨 쇠창살을 작은 손으로 붙잡았다.
더 이상 나를 경계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개에게 그랬던 것처럼 쇠창살을 치려다가 이 애가 사람이라는 걸 떠올렸다.
“야, 너 이름이 뭐야?”
“…….”
“너 말할 줄 몰라?”
“…….”
아무런 말도 들리지가 않아서 결국 나는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창문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름이 뭐야?”
다시 묻자 이번에는 작게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너무 작아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내 말에 그 애가 힘겹게 낑낑거리면서 먼지가 잔뜩 쌓인 방충망을 조금 열었다. 나는 방충망이 열린 끄트머리 쪽으로 가 쇠창살에 바짝 귀를 가져다 대고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진.”
“뭐?”
“……우진.”
“유진?”
“…….”
“유진이?”
“…….”
고개를 휙 돌리자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이 언뜻 보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씻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산발이 된 머리에 몸에 맞지도 않는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아주 잠깐 보인 검은색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개가 처음으로 내게 꼬리를 흔들어 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되어 충동적으로 물었다.
“너 몇 살이야?”
“…….”
“몰라?”
진짜 개도 아닌데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자기 나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냥 말하기 싫은가 보다 싶어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음……. 그럼 앞으로 오빠라고 불러.”
“…….”
“알았지?”
말없이 가만히 나를 보던 유진이가 이번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띠띠띠띠- 띠띠띠띠-
“…….”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눈이 뻑뻑해서 몇 번 감았다 뜨고 있는데 위에서 팔 하나가 쑥 내려와 팔랑팔랑 힘없이 흔들렸다.
“일어나.”
“일어났어.”
“알람…….”
잔뜩 가라앉아서 쉰 목소리에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아 알람을 껐다.
오남자 촬영이 오늘부터라 새벽 여섯 시까지 정우진이 날 데리러 오기로 했다. 챙길 건 옷 몇 개 말고는 딱히 없어서 짐도 별로 없고, 헤어나 메이크업 같은 것도 받을 필요가 없어서 다섯 시에 일어났다.
“…….”
어릴 적 꿈을 꾸면 항상 삼촌이나 숙모, 강수민이 나와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한동안 꾸지 않던 꿈인데 촬영지가 강원도라 마음이 싱숭생숭하긴 했나 보다.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별이 박혀 있는 것 같던 검은색 눈동자만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걔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한때는 찾으려고 해 보기도 했는데 버려진 개처럼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오랫동안 동네에 있었던 사람들도 그 애가 그곳에서 살았는지조차 몰라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형.”
다시 팔이 힘없이 흔들리면서 유노을이 날 불렀다. 나는 얼른 잡념을 치우고 다리를 살짝 들었다가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어, 지금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욕실로 가 씻고 나오자 애들이 다 거실에 나와 있었다.
“형, 근데 진짜 아무것도 안 챙겨 가도 돼?”
그 물음에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유노을이 말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대.”
“차에서 먹을 것도 가지고 가면 안 돼? 이거라도 좀 챙겨.”
김강이 초코파이랑 과자 몇 개를 가지고 와 내가 입을 옷 주머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저 정도의 과자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말리고 로션도 바르고 유노을의 감시하에 선크림도 꼼꼼하게 발랐다.
그리고 느릿느릿 옷을 입고 있는데 이진혁이 다시 물었다.
“형, 과자 가지고 가도 되는 거면 지금 빨리 계란이라도 몇 개 삶을까?”
“그럴 바에 김밥이 낫지. 먹다 보면 목 막히고 껍질 까기도 귀찮은데. 차라리 김밥을 싸자.”
“어차피 밥 먹을 거면 김밥보다 도시락이 훨씬 낫지. 김밥 그거 몇 개 주워 먹는다고 배가 불러? 이왕 먹을 거라면 그냥 도시락을 싸자. 간단하게 볶음밥이랑 따뜻한 국이랑 준비하면 숟가락만 있어도 먹기 편하잖아.”
“도시락까지 쌀 거면 그냥 고기를 굽는 게 낫지. 어차피 도시락 가지고 갈 거면 반찬 통도 있으니까 고기랑 반찬 좀 넣고 밥이랑 국도 싸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집에 3단 도시락 있는데 오히려 그게 낫지 않나? 이왕 도시락 가지고 가는 거 과일도 몇 개 같이 넣어 가면 좋잖아.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밥 다 먹고 과일 먹으면 배도 든든하고 좋지.”
모닝 사려다가 롤스로이스 팬텀까지 가 버리는 사람들처럼 조금씩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는 애들을 두고 나는 주방으로 가 찬물을 마셨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계속 멍하기만 했다.
“지금 나갈 거야. 도시락 싸지 마.”
“형, 그럼 이거 좀 더 가지고 가.”
받지 않으려다가 포도 맛 젤리가 있어서 멈칫했다. 새콤달콤 딸기 맛은 좋아했는데 이것도 좋아하려나? 속옷이랑 양말, 얼굴에 바를 것과 핸드폰 충전기 정도만 백팩에 챙기면서 조금 고민하다가 젤리만 받고 현관문을 열었다.
“간다. 집 잘 지키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잘 갔다 와.”
“돈 많이 벌어 와.”
“안녕.”
건물 밖으로 나와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새벽 공기를 마시니 계속 흐리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크게 내뱉으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챙길 것도 없어서 짐도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나와서 보니 양손에 군것질거리가 한가득했다. 이거 설마 차에 타기 전에 뺏기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어쨌든 3단 도시락 안 싼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이제 곧 해가 뜨려고 하는 건지 하늘이 어슴푸레했다. 하늘을 보면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큰길가 쪽으로 나오자 송철 피디에게 미리 들었던 차종이 보였다. 번호판에 숫자도 맞는 걸 확인하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자 스태프처럼 보이는 사람이 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었다.
나는 걷는 속도를 줄이고 좀 주춤하다가 카메라를 보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그때, 머리 위에서 뭐가 후드득 떨어졌다. 놀라서 바닥을 보니 막대 사탕과 개별 포장이 되어 있는 작은 초콜릿들이었다. 이게 갑자기 왜……. 설마 가방이 열렸나? 아니면 하늘에서 떨어졌나?
“그게 다 뭐예요?”
당황해서 바닥만 보고 있는데 카메라맨도 당황한 채 바닥만 찍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게 다 뭐예요?”
그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게요, 이게 뭐죠? 어디서 떨어졌지?”
“가방 열린 거 아니에요?”
“아.”
근데 난 가방 안에 사탕이랑 초콜릿을 넣은 적이 없는데? 혹시 애들이 넣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확인했지만 지퍼가 열린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후드 사이에서 초콜릿 하나를 발견하고 혹시나 싶어 후드 모자를 탈탈 털어 머리에 쓰자 남아 있던 것들이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다.
“선배님, 왜 안 타세요?”
설마 모자 안에?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후드 모자를 다시 털고 있는데, 정우진이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어, 잠깐만. 나 모자에 뭐가 있어서…….”
“모자에요? 바닥에 떨어진 건 다 뭐예요?”
“야, 그것 좀 다 주워 봐.”
도대체 어디에 뭘 얼마나 넣은 건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초콜릿이나 사탕이 하나씩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할 때 김강이 양손에 뭘 잔뜩 쥐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현관문을 닫고 나가려고 할 때 모자에 쑥 넣었던 게 분명했다. 진상을 알고 나니 갑자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걸 줍고 있는 정우진을 따라 쪼그려 앉아 사탕과 초콜릿을 주웠다. 그리고 순간 잊고 있던 게 떠올라 헉 하고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아, 멤버들이……. 차 안에서 먹으라고 모자 뒤에 넣어 줬나 봐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데, 급하기도 하고 손에 뭐가 많아서 그런 건지 자꾸 뭘 하나 주울 때마다 하나가 떨어지고, 두 개를 주우면 세 개가 떨어지고 그랬다.
“선배님, 그거 저한테 주세요.”
나를 주시하고 있던 정우진이 내가 자꾸 떨어뜨리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말했다. 그러면서 손을 뻗다가 자기가 들고 있는 걸 반도 넘게 떨어뜨렸다.
“풉…….”
“…….”
“…….”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우진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카메라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봐도 지금 우리 둘은 덤 앤 더머가 따로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