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6/190)

71화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스테인리스 믹싱 볼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국수와 야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가 너무 눈치 없이 많이 한 건가? 정우진은 예쁜 그릇에 담아서 뭔가……. 인별 감성처럼 먹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야, 그러면 국수는 양이 많아서 안 되니까 골뱅이무침을 만들어서 거기에 담을래?”

“골뱅이무침이요?”

“너 그거 안 먹어 봤다며? 만들 줄 모르지? 있어 봐, 내가 진혁이한테 전화 좀 해 볼게.”

왠지 평소에 요리도 안 하다가 이번에 하려고 그릇도 사고 재료도 산 것 같아서 그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새로 산 그릇을 안 쓰면 많이 아쉬울 테니까.

나는 핸드폰으로 이진혁에게 전화를 하며 말했다.

“넌 국수 양념장이나 좀 더 만들어. 그걸로 모자라.”

내 말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데 이진혁이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왜?

“야, 저번에 네가 골뱅이무침 만들어 준 거 있잖아.”

-골뱅이무침? 갑자기 그건 왜?

“양념장 어떻게 만들어?”

그러고 보니 적을 게 없어서 나는 정우진을 보며 입 모양으로 ‘볼펜이랑 종이’라고 말하며 손으로 무언가를 쓰는 흉내를 냈다. 그러자 정우진이 어딘가로 가서 노트와 펜을 금방 가지고 왔다.

-골뱅이 얼마나 있는데?

“400그람짜리 통조림 하나.”

-하나? 하나밖에 안 해? 그만큼은 안 해 봐서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비율만 맞으면 되니까, 그럼 양념 만든 거 한꺼번에 다 넣지 말고 조금씩 넣으면서 형이 간을 봐. 아니, 형이 간 보지 말고 정우진한테 보라고 해.

나더러 간을 보지 말라는 말에 한마디 하려다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서 그냥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어떻게 만들어?”

-고추장이랑 식초랑 설탕은 아빠 숟가락으로 세 숟가락씩 넣고, 음. 고춧가루는……. 한 숟가락이나 두 숟가락 정도?

“한 숟가락 넣어, 두 숟가락 넣어? 정확하게 말해.”

-그럼 한 숟가락 반. 그리고 다진 마늘도 한 숟가락 정도 넣고. 아, 통조림 국물도 좀 넣어. 그냥 잘 비벼지게 농도 맞추는 용도로.

나는 정우진이 가져다준 펜으로 이진혁이 알려 주는 양념장 레시피를 빠르게 적었다.

-마지막으로 참기름도 한 바퀴 뿌리고. 깨 있으면 깨도 뿌리고.

“참기름 한 바퀴가 얼마만큼이야?”

-그냥 한 바퀴, 빙.

“정확한 양을 말해 봐.”

-한 숟가락 정도?

혹시라도 망하면 큰일이라 정확한 양까지 적은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끊는다.”

-형! 참기름 대신 식용유 같은 거 넣지 마!

이 새끼는 내가 바본 줄 아나? 대답할 가치도 없어서 그냥 전화를 끊자 그사이 정우진이 비빔국수 양념장을 추가로 더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면 국수는 괜찮을 것 같아서 나는 정우진과 함께 골뱅이무침 양념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이거는 다 세 숟가락씩 넣으래.”

“고춧가루는 한 숟가락 반만 넣는 거 아니에요?”

“두 숟가락 아니야?”

“여기 한 숟가락 반이라고 써져 있는데요?”

“아, 그럼 다른 걸 반 숟가락 씩 더 넣자. 이진혁이 비율만 맞으면 된대.”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긴 했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골뱅이무침을 완성했다. 그냥 야채랑 골뱅이 잘라서 양념만 섞으면 돼서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참기름은 두 숟가락 넣을까? 고소하면 맛있잖아.”

“좋아요.”

마지막에 참기름을 두르고 통깨까지 뿌리니 반짝반짝 윤기까지 나는 게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정우진은 그릇에 골뱅이무침을 담아 식탁에 두고 나는 비빔국수를 비볐다. 그사이 고기가 좀 식기는 했지만 어차피 차가운 국수랑 먹을 거라 이 정도는 괜찮았다.

“앞접시도 샀어? 젓가락이랑 숟가락도?”

식탁에 하나, 둘 세팅이 되는 음식을 보다가 정우진이 가지고 온 비싸 보이는 앞접시와 수저 받침대, 그리고 수저를 보며 혹시나 싶어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님이랑 같이 먹는 첫 끼니까…….”

첫 끼는 아닌데……. 혹시 직접 만들어서 집에서 먹는 밥이 첫 끼라는 뜻일까? 또 낯간지러운 말을 해서 살짝 팔뚝에 소름이 돋기는 했지만 정우진은 원래 이런 애였다.

아직 간도 못 봐서 앉은 김에 먹어 보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정쩡하게 젓가락을 들고 정우진이 사진을 다 찍을 때까지 기다리는데 정말 스테인리스 믹싱 볼이 눈에 확 띄었다.

그게 웃겨서 내가 작게 피식거리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웃겨서……. 다음에는 국수 딱 2인분만 해 먹자.”

“아니에요, 제가 좀 더 큰 그릇을 살게요.”

아까는 시무룩하더니 지금은 그래도 기분이 많이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비록 과정이 좀 어설프기도 했고, 고기는 다 식고 국수는 야채 무더기처럼 만들어졌지만 초보자들이 만든 것치고 모양은 그럴듯했다.

“이제 먹어도 돼?”

“네, 맛있게 드세요.”

“그래, 너도.”

골뱅이무침은 좀 짜고 비빔국수는 싱거운 편이었지만 두 가지를 같이 먹으니 얼추 간이 맞았다. 고기도 식었지만 국수랑 먹으니까 고소해서 맛있었다.

“거기 가면 조미료 같은 건 다 있겠지?”

“기본적인 것들은 다 있지 않을까요? 설마 그런 것도 없으면…….”

불안한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라면…….”

라면 얘기를 하니까 아까 하다 말았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고 있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야, 너 근데 라면 좋아해?”

“라면이요? 선배님은요?”

“난 별로 안 좋아해. 신라면도 매워서 안 먹어.”

“저도 좋아……, 네?”

당연히 내가 좋아한다고 할 줄 알았는지 말을 하다 말고 정우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정우진을 보며 다시 물었다.

“너 신라면 못 먹지? 그걸 매워서 네가 어떻게 먹어?”

이번에는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자꾸 날 따라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정우진이 말했던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저번에 우리 영화관 같이 갔을 때 캐러멜 팝콘 먹었던 거 기억나?”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 그것도 나한테 맛있다고 했잖아. 근데 사실 별로 맛없었지?”

“…….”

“아니, 도대체 왜 맛도 없는 걸 맛있다고 하는 거야? 그냥 네 취향이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면 되잖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때 강수민이랑 잘 지내보고 싶어서 하기도 싫은 술래잡기를 매일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정우진의 행동이 그것과 겹쳐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정우진이 좀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고 정말 누굴 사귀는 것에 서툴기는 한 것 같았다.

“오다리는 진짜 맛있었어?”

“네, 그건 진짜 맛있었어요. 고소하고, 냄새도 좋고.”

이것도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정말 맛있기는 했나 보다. 내가 웃자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팝콘은 좀 너무 달고…….”

“단 거 싫어해?”

“네, 근데 선배님도 단 거 안 좋아하지 않으세요?”

“그렇기는 한데……. 예외도 좀 있는 것 같아.”

나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평소에는 단 걸 먹지 않지만 영화관에 가면 캐러멜 팝콘을 꼭 먹어야 한다든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땐 꼭 초코 맛을 먹는다든지…….

“아무튼 싫은 건 싫다고 말을 해. 그래야 내가 알지. 내가 뭐, 설마 네가 싫다는데 억지로 먹이겠냐? 아니면 너한테 넌 캐러멜 팝콘 못 먹으니까 절교하자고 하겠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팝콘 먹고 싶을 땐 절 찾지 않으실 거 아니에요.”

우물쭈물하면서 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정우진의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팝콘 먹을 때?”

“만약 캐러멜 팝콘이 너무 먹고 싶으면 저한테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실 거예요?”

“……아니?”

그렇게 물으니 그제야 질문의 의도를 알 것 같기도 했다. 확실히 정우진이 하는 말이 맞았다. 굳이 팝콘을 싫어하는 정우진을 데리고 팝콘을 먹으러 가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우진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이것도 좀 이상하기는 했다.

“그럼 너랑은 팝콘 말고 다른 거 먹으러 가면 되잖아.”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라 고개를 갸웃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젓가락으로 앞접시에 덜어 둔 비빔국수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싫어요…….”

“…….”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퉁명스러움이 가득했다.

순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너 약간 그런 거구나.”

“어떤 거요?”

“내 친구가 다른 애랑 같이 노는 거 싫어하는……, 그런 거.”

보통 이런 건 학창 시절에나 느끼는 감정 아닌가? 아, 얘는 연습생 생활을 하느라 학교도 별로 못 가고 친구도 주변에 없어서 뒤늦게 이러는 건가? 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사실 유노을도 아주 약간 이런 성향이라 엄청나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싫은 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 말 안 하면 나는 모르잖아. 팝콘 말고 다른 거 먹어도 되는데.”

“그럼 팝콘 먹고 싶을 때 저한테 연락해 주실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팝콘이 먹고 싶으면……. 뭐, 정우진은 오다리를 먹으면 되는 거니까 별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웃었다.

“너 호두파이는 진짜 좋아하냐?”

“그건 그냥 그럭저럭 좋아해요.”

“오이는?”

“오이는 좋아해요.”

“라면은?”

“라면은 싫어요. 너무 맛없어서 한 젓가락 먹기도 힘들어요. 씹으면 밀가루 맛밖에 안 나고…….”

“…….”

갑자기 열변을 토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조금 당황해 버렸다. 진짜 엄청 싫어하는구나…….

“그럼 갑멘 갔을 때도 별로였어?”

그때 체하기까지 해서 혹시나 싶어 묻자 정우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저 사실 국물 요리 별로 안 좋아해요.”

“진짜? 진작 알았으면 다른 거 먹었을 텐데.”

“갑멘은 엄청 맛없는 건 아닌데 그냥 양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어요. 숙주는 좋아해서 그건 잘 먹었어요. 그리고 저번에 선배님이랑 같이 먹었던 미역국이랑 옥돔구이는 정말 맛있었어요.”

미역국 얘기를 해서 떠오른 건데 지금 생각해 보니, 정우진은 그때도 국물은 별로 먹지 않고 미역만 젓가락으로 건져 먹었던 것 같았다.

“…….”

지금도 가만히 보니 골뱅이무침도 오이만 먹고 있었고, 비빔국수도 면보다는 오이를 더 많이 먹고 있었다. 고기도 별로 안 먹은 것 같고……. 마트에서 일찍 물어봤다면 정우진이 좋아하는 것도 같이 샀을 텐데.

당근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고……. 피망은 잘 먹네.

모를 땐 안 보이던 것들이 알고 나니 너무 쉽게 눈에 띄었다. 내가 먹다 말고 가만히 쳐다보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아니……. 다음에는 네가 좋아하는 걸로 먹자고.”

“……네.”

갑자기 좀 머쓱해서 뒷목을 만지자 정우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