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5/190)

70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정우진은 비빔국수의 양념을 만들기로 하고, 나는 오이를 썰기로 했다.

“선배님, 손 조심하세요.”

그 말에 조금 전이라면 또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우진을 쳐다봤겠지만, 나는 이제 막 지독한 도끼병에서 벗어난 참이라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너도 조심해.”

“혹시 힘들면 그냥 쉬세요. 제가 다 해 드릴게요.”

“괜찮아.”

나는 오이 끝을 조금 잘라 버린 뒤 손가락 한 마디 두께로 통통통 칼질을 했다. 그때 고추장 뚜껑을 열려고 하던 정우진이 내 옆으로 오더니 한참 내가 칼질하는 걸 보다가 나를 불렀다.

“선배님.”

“어?”

“……그거 혹시 고기랑 같이 먹을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아니? 이거 비빔국수랑 같이 먹으려고 산 거잖아. 고기랑 같이 먹을 것도 좀 남겨 둘까?”

“아……. 어, 아니요. 그냥, 음……. 네.”

“……? 고기랑 같이 먹을 것도 남겨 둬?”

무슨 대답이 저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다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뭔가 표정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너 혹시 오이 싫어해?”

“선배님은요?”

“난 좋아한다고 아까 말했잖아.”

“저도 좋아해요…….”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정우진의 행동을 지켜본 결과, 자신의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날 따라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

“네, 맞아요.”

“저번에 커피 마시다가 뿜은 것처럼 오이도 씹다가 뱉는 거 아니지?”

“아니에요, 진짜 좋아해요.”

양손까지 흔들어 대면서 말하는 걸 보니 오이는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양념장 만들게요. 선배님이 썰고 싶으신 대로 써세요.”

그렇게 말한 정우진은 더 이상 나를 관찰하지 않고 자기가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 힐끔힐끔 정우진을 보면서 오이를 세 개 정도 썰어서 빈 쟁반에 담아 두고, 당근도 썰었다.

당근은 딱딱했기 때문에 오이보다 얇은 두께로 썰어서 오이 옆에 가지런히 놨다. 피망은 대충 안에 있는 씨를 빼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있는데 양념장을 다 만들었는지 정우진이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다.

“선배님, 마이야르 반응이라는 거 아세요?”

“겉에 색깔 나게 익히는 거? 이진혁이 맨날 말해서 알아.”

“네, 그렇게 구워야 맛있대요.”

오, 정말 뭘 공부하기는 했나 보다. 그럴듯한 말에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이상한 걸 깨달았다. 대패삼겹살처럼 얇은 고기도 해당이 되는 건가?

정우진은 프라이팬의 온도를 올리고 있는 건지 고기를 바로 넣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구울 건지 궁금해서 옆에서 나도 가만히 기다렸다.

“…….”

“…….”

조금 더 기다리자 정우진이 집게로 기다란 대패삼겹살 한 줄을 프라이팬 정가운데에 놓았다. 치이익, 하고 고기 익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얇아서 그런지 고기가 금방 회색으로 변하면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나는 프라이팬의 텅텅 빈 공간을 보다가 힐끗 정우진을 쳐다봤다. 나였다면 저 고기를 그냥 프라이팬에 쏟아부었을 텐데……. 저래서 언제 다 굽지?

그래도 정우진 나름대로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 그냥 잠자코 지켜보다가 냄비에 국수 면을 삶을 물을 받았다. 그러면서 다시 힐끔 정우진이 굽고 있는 고기를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에 넣었던 대패삼겹살이 타기 일보 직전인 게 보였다. 얼마나 구웠는지 딱딱해 보이는 게 베이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망연자실한 정우진의 표정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그냥 모른 척을 했다.

연습도 했다고 하더니……. 설마 마이야르 반응이 어쩌고 하는 거 보니까 스테이크용 두꺼운 소고기로 연습을 했나? 아, 우리가 온정에서 먹었던 것도 그렇고 소고기로 연습을 했나 보다.

아니, 좀……. 말을 하지. 그럼 소고기로 샀을 텐데…….

다시 치이익, 하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보자 정우진이 또 프라이팬 위에 대패삼겹살을 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쪼그라든 베이컨은 그사이에 버리기라도 한 건지, 보이지 않았다. 탄 것도 아니니까 그것도 그냥 먹어도 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냄비에 물을 너무 많이 받아서 반은 버리고 가스레인지에 놓자 정우진이 변명하듯 물어보지도 않은 걸 혼자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불이 너무 셌나 봐요. 돼지고기는 소고기랑 다르게 전부 익혀 먹어야 해서 좀 센 불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두께가 얇아서 중불로 해도 될 것 같아요.”

“어어, 그리고 그거 그냥 다 넣어서 구워도 될 것 같아.”

“이걸 전부 다요?”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1인분씩 포장이 된 국수를 나중에 넣기 편하게 뜯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거 굽다 보면 기름이 많이 나와서 키친타월로 닦으면서 해야 될 거야. 키친타월 있지?”

“네, 있어요.”

“그거 집게로 키친타월 한 장 집고 그냥 대충 고기 사이로 쑤셔 넣고 기름 닦으면 돼.”

열심히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정우진의 시선이 내 손 쪽으로 가 있었다.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 정우진을 불렀다.

“뭘 그렇게 봐?”

“네? 아니……. 선배님, 혹시 내일까지 있다 가실 거예요?”

“뭐?”

“자고 가실 거예요?”

정우진이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도대체 내 행동 어디에서 그런 걸 읽은 걸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오해할 만한 말을 한 건가? 나는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밥 먹고 갈 건데? 왜?”

내 말에 정우진이 어벙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살짝 벌리고 나를 보다가 다시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면을 많이…….”

“면? 다섯 개밖에 안 뜯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거 다섯 개면 5인분이에요.”

“…….”

정우진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파스타를 먹을 때 1인분이 오백 원짜리 동전만 한 크기라는 걸 들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나는 1인분이라고 묶여진 국수 한 묶음을 들어 정우진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너 국수 먹을 때 이거 하나만 먹어? 이거 먹고 배가 불러?”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정우진은 나만큼이나 당황했다.

“1인분이 한 사람이 먹는 한 끼의 양을 말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그거 먹고 배가 부르냐고 물어보시면 제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 보통 국수는……. 좀 더 많이 먹지 않냐?”

내가 머쓱해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선배님. 많이 드세요. 많이 먹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양이 많아서 혹시 내일 먹을 것까지 같이 삶는 건가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예요. 그리고 많아도 배부르면 남기면 되고…….”

“…….”

그 말에 나는 내가 뜯은 국수의 양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게 그렇게 많은 양인가? 애들이랑 같이 먹는 거면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했겠지만, 정우진이랑 먹는 거라서 나름대로 적당하다고 생각한 양이었는데.

하도 애들이 잘 먹다 보니까 정확한 1인분의 양이 얼마큼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그럼 네 묶음만 넣을까?”

“선배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하세요. 그냥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던 거였어요.”

필사적으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냥 네 묶음만 삶기로 했다. 야채도 있고, 고기도 있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너 그러면 라면 먹을 때도 하나만 먹어?”

같이 촬영도 하려면 정우진이 먹는 양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내 질문에 프라이팬에 고기를 쏟아붓고 있던 정우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 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우진을 보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무슨 라면 제일 좋아해?”

“네? 라면이요? 저는……. 신라면?”

“…….”

신라면은 내가 좋아하는 건데……. 물론 나랑 같은 걸 좋아할 수 있지만 정우진은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정우진은 내 정보를 백과사전 읽듯 읊었던 게 떠올랐다.

내 눈빛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지 정우진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또 고기 다 태워 먹을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고기 타겠다.”

“아, 네.”

다 삶은 국수를 건져서 찬물로 헹구려는데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저번에 쫄면 먹을 때는 유노을이 면을 빡빡 씻어야 된다고 했었는데 소면도 그렇게 씻어야 하나?

이건 면도 얇고 쫄면에 비하면 부드러운데 세게 씻다가 다 짜부라지는 거 아니야?

“…….”

흐르는 찬물에 면을 가만히 두면서 고민하다가 그냥 살살 씻기로 했다. 빡빡 씻든, 살살 씻든 크게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냥 대충 체를 흔들흔들하면서 면을 씻고 양념과 섞을 그릇을 찾으려는데, 정우진이 널따란 도자기 그릇을 가지고 왔다.

“…….”

“…….”

문제는 굳이 담아 보지 않아도 이만큼의 면을 담기에는 그릇이 작아도 한참 작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더 큰 거 없어?”

“이게 제일 큰 건데……. 잠시만요.”

당황한 정우진이 상부 장과 하부 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언뜻 안을 보니 그릇은 몇 개 없고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미료도 그렇고, 잠깐 냉장고를 봤을 때도 그렇고…….

집에서 음식을 해 먹지 않는 것 같은데 이번에 촬영하는 것 때문에 연습하려고 샀던 걸까? 나는 잠시 정우진을 기다리다가 그의 등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냥 그걸로 하면 안 돼?”

“어떤 거요?”

“저거.”

엄청나게 커다란 스테인리스 믹싱 볼을 가리키자 정우진이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걸 꺼냈다.

“왜? 그거 쓰면 안 돼? 그냥 냄비에서 비빌까?”

“아니요, 괜찮아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나는 국수를 믹싱 볼에 쏟아 넣고 조금 전 잘라 놨던 야채도 넣었다. 오이랑 당근은 너무 많아서 반 정도만 넣고 피망은 다 넣었는데, 이미 양이 많아서 골뱅이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야, 골뱅이는…….”

정우진은 조금 전 가지고 온 도자기 그릇을 들고 그걸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그릇에 담아 먹고 싶었던 건가? 문득 대표님을 만나러 갔을 때 정우진이 좋아하는 식기류 브랜드를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너 혹시……. 그거 새로 산 거야?”

설마설마하고 물었는데 정우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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