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
“…….”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정우진의 입술만 빤히 쳐다봤다. 정확히는 입술이 아니라, 그 위에 말 그대로 수북하게 쌓여 있는 연고였다.
당황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나는 살면서 약을 저런 식으로 바르는 인간을 단언컨대 본 적이 없었다. 아니지, 저건 바른 게 아니라 그냥 얹은 거지.
저렇게 많은 양이 입술 위에서 용케 떨어지지도 않고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짝 달라붙어 있는 것도 신기했다.
“넌 무슨 약을…….”
“…….”
“그렇게 많이 짜서 올렸어?”
겨우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데 얼마나 황당한지 목이 멨다.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몇 번 하자 정우진이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꼴이 사고를 치고 눈치 보는 개 같았다. 그러니까 자기가 저질러 놓고 안 한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모습과 흡사했다.
그렇게 바르는 게 아닌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이 가증스러운 모습이…….
“…….”
그것이 구라인지 알고 있음에도 상대방이 지나치게 뻔뻔하고 노골적이게 나오면 말문이 막히기 마련이었다.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그냥 빨리 나으라고 많이 발라 봤어요.”
“…….”
덧붙이는 개소리에 나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근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거죠? 밥 먹을 때 어쩔 수 없이 조금 먹을 것 같기는 한데…….”
“…….”
저놈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게 없는 걸까?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지독한 사람 같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정우진이 연고를 입술에 바르고 다니면 되니까 립밤도 사 줄 필요 없다고 할 것 같아서 나는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연고랑 면봉…….”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약과 면봉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손바닥 위에 올려 두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진짜 미친 사람 같았어, 방금.”
“헤헤.”
“헤헤? 헤헤? 넌 이게 웃기냐? 헤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성질을 내자 정우진이 티슈를 한 장 뽑더니 제 입술을 닦고 얌전히 내 앞에 서서 눈을 살포시 감았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그냥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웃기기만 했다.
한숨을 내쉬며 면봉 끄트머리에 연고를 찔끔 짜다가 나는 정우진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때렸다.
“야, 눈 뜨고 이거 봐.”
“네?”
“약은 이만큼만 짜. 알았어?”
“네, 선생님.”
“어휴, 씨발…….”
나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욕을 하자 정우진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님, 방금 욕하셨죠?”
“안 했는데요?”
“했잖아, 방금.”
“안 했는데요?”
“했잖아.”
“안 했는데요?”
“…….”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자 정우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틈에 나는 약을 묻힌 면봉을 정우진의 입술에 대충 슥슥 문질렀다. 피딱지가 씻겨서 그런지 이제 상처는 별로 티도 나지 않아서 사실 약을 바르기도 민망한 수준이긴 했다.
다 바를 때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내가 손을 내리자 말했다.
“저도 욕해도 돼요?”
그건 또 의외의 말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웃었다.
“해 봐.”
뭐 해 봤자, 욕을 얼마나 할까 싶어서 흔쾌히 허락하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 할 테니까 그땐 모른 척해 주세요.”
“뭐, 예고 욕이야?”
내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김이 빠져서 나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했다.
“아무튼 빨리 밥이나 해 먹자.”
“선배님.”
“왜.”
아까 꺼내다 만 재료들을 꺼내자 정우진도 내 옆에서 재료를 꺼내며 나를 불렀다.
“아까 제가 고집 부려서 혹시 화나셨어요?”
“입술에 애벌레처럼 약 짜 온 거?”
애벌레라는 말에 정우진이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작게 대답했다.
“네.”
많이 황당하긴 했지만 화가 났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정우진이 다음에도 또 이런 이상한 짓을 할까 봐 좀 겁이 나긴 했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화가 났었다고 말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선배님이 그랬으니까……. 당연히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제 입술을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책임도 선배님이 지셔야 하는 게 맞잖아요.”
“…….”
뭔가 단어나 문장의 배열이 좀 특이하긴 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기는 했다. 어쨌든 상처는 내가 낸 거니까…….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냥 약 발라 주는 건데 그게 뭐 대수인가 싶었다.
김강이 헬스를 하다 삐끗한 적이 있어서 손목에 압박 붕대를 감아 준 적도 있었고, 유노을이 술 처먹다가 미끄러져서 까진 무릎을 소독해 주고 습윤 밴드를 붙여 준 적도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는 이진혁이 근육통이 심하다고 파스 좀 붙여 달라고 해서 등짝에 붙여 준 적도 있었는데, 고작 약 발라 주는 것쯤이야…….
그냥 정우진이 워낙 눈빛도 이상하고 말투도 팬 사인회 온 팬 대하듯 날 대해서 그런 거지, 따지고 보면 그렇게 엄청 요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건, 뭐……. 그렇지.”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납득하며 말하자 정우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쵸?”
“……어, 근데 너 왜 이렇게 신 나 보이냐? 짜증 나게?”
“제가 짜증 나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얼굴을 보며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정우진이 옆에서 다시 깐족거렸다.
“입술에 반창고 같은 건 안 붙여도 될까요?”
“반창고는 무슨 반창고야, 그것도 입술에. 거기에 그걸 어떻게 붙여?”
“그럼 붕대는요?”
“그냥 얼굴에 다 감고 다녀, 미라처럼. 굳이 모자 안 쓰고 마스크 안 껴도 사람들이 못 알아볼 테니까 편하겠네.”
봉지에서 재료를 다 꺼내고 싱크대로 가져가 야채들을 씻으려고 하자 정우진이 또 내 옆에 붙어서 야채를 따라 씻으며 말했다.
“그럼 선배님이 같이 붕대 감고 다녀 주실 거예요?”
“내가 왜?”
“저 혼자 그러면 좀 부끄럽잖아요.”
중얼거리듯 하는 말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정우진을 쳐다봤다.
“네가 부끄러움도 느껴?”
“……무슨 뜻이에요?”
“너한테도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것에 순수하게 놀라고 있는 중인데?”
그동안 워낙 뻔뻔했던 적이 많아서 한 말인데 정우진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저 부끄러움 엄청 많은데요?”
“아…….”
“진짜예요.”
“아…….”
“왜 자꾸 아……, 만 하세요?”
“에…….”
어린 조카랑 놀아 주는 기분으로 대충 대답하며 야채도 얼추 다 씻었다. 그리고 이제 뭘 할까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옆에서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갑자기 작게 말했다.
“이…….”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 뒤로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뭘 기다리듯 계속 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설마, 혹시나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
“우…….”
“…….”
아니, 씨발…….
도대체 뭐 하는 건데…….
너무 놀란 나머지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경악하는데, 멀뚱멀뚱 날 보던 정우진이 갑자기 혼자 푸핫 하고 터져서 배를 부여잡고 웃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호탕한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전염이라도 된 듯 나까지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미친 거 아니냐, 진짜? 아, 소름 끼쳐!”
내가 웃으며 비명을 지르듯 외치자 정우진이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님이 먼저 하셨잖아요.”
“내가 아에이오우, 하자고 아……. 라고 했냐?”
“근데 선배님 이런 거 좋아하세요?”
웃느라 울기까지 한 정우진이 갑자기 나한테 화살을 돌렸다. 황당하고 억울해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뭘! 네가 웃으니까 나도 따라 웃은 거지. 난 원래 이런 썰렁하고 어색한 개그 안 좋아해.”
“선배님은 제가 웃으면 웃음이 나오세요?”
그럼 울면서 배를 부여잡고 등신 팔푼이처럼 웃고 있는데 안 웃기냐?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별안간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활짝 웃더니 고백하듯 말했다.
“저도 선배님이 웃으면 웃음이 나와요.”
“…….”
황당하고 웃겼던 기분이 순식간에 발밑 끝까지 추락하기 시작했다. 안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고 식은땀이 나면서 소름까지 끼쳤다. 이러다가는 닭으로 변할 것 같아서 나는 큰마음을 먹고 말했다.
“야, 너 좀……. 그런 느끼한 말 좀 안 하면 안 되냐? 나 진짜 면역이 없어서 그래. 내 주변에 너처럼 이런 유형의 인간이 한 번도 없었다고……. 진짜 죽겠으니까 제발 느끼하게 말하지 마. 진짜, 부탁 좀 할게.”
양손으로 팔뚝을 비비면서 몸을 부르르 떨자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없었다고요?”
그 물음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진짜 한 명도 없었어. 난 형제도 없고……. 아니, 사촌 형이 있긴 한데, 아무튼 주변에 이렇게 좀…….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잘 표현은 못 하겠는데, 되게 남사스러운? 그런 어투로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무슨 뜻인지 알겠지?”
제발 게이 새끼처럼 말하지 말라는 말을 최대한 돌리고 돌려서 좋게 표현하느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간절한 내 바람이 통한 건지,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을 할 건 해야 하니까…….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때 정우진이 별안간 정색을 했다. 표정이 없는 얼굴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검은색 눈동자를 마주 보자 숨이 턱 막혀서 나도 모르게 하얗게 질리는데 정우진이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러더니 가볍게 아주 살짝, 내 어깨를 밀면서 말했다. 나는 힘없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멀뚱멀뚱 웃고 있는 정우진을 보다가 결국 주먹을 들었다.
“으앗!”
그러곤 그대로 정우진의 정수리 한가운데를 꽝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