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던 정우진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선배님, 그렇게 거칠게 넣으시면…….”
눈가에 눈물까지 고이고 있는 걸 보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미, 미안.”
황급히 사과하자 정우진이 손등으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가 뗐다. 아주 조금이지만 피가 묻어 나오는 게 내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뭐 닦을 게 없나 찾아봤지만 당황해서 그런지 눈에 보이는 것도 없었다. 양손을 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허벅지 근처에 떨어져 있던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말했다.
“맛있네요.”
“그걸 왜 주워 먹어? 네가 땅그지야?”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건 정우진도 마찬가지였다.
“…….”
“…….”
순간 이상할 만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뭐지? 나 왠지 이런 장면을 어디서 본 거 같기도 한데……. 이런 걸 데자뷔라고 하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목을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
“……아니……. 그렇게 세게 칠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나 봐. 어떡하냐, 하필 얼굴이 그렇게 돼 가지고…….”
정우진 얼굴에 상처를 내다니…….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자 당황하고 혼자 넘겨짚고 혼자 화내고 혼자 설치다가…….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집에 마데카솔 같은 거 있어? 후시딘이나…….”
“네, 있어요. 선배님은 손 괜찮으세요?”
“야, 내 손이 뭐. 지금 너 입술에서 피 나는데. 난 완전 멀쩡해.”
양손을 들고 앞뒤로 흔들면서 펄럭펄럭하자 정우진이 웃었다.
“제가 오늘 립밤을 안 발라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좀 잘 찢어지고 갈라지고 그러는 편이에요.”
원래 좀 건조한 편인가? 나도 모르게 정우진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는데 딱히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선배님도 손 닦으세요.”
“어? 아, 어.”
어딘가에서 티슈를 꺼낸 정우진이 내게 건네고, 자기도 대충 부스러기를 털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미안해져서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말했다.
“많이 미안하시면 저 립밤 하나만 사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되지, 당연히 되지. 오백 개도 사 줄 수 있어.”
“오백 개는 안 사 주셔도 되고, 하나만 사 주세요. 선배님은 립밤 뭐 쓰세요? 저도 그걸로 사 주세요.”
“나 립밤 안 쓰는데?”
그냥 씻고 나와서 로션이나 바르고……. 가끔 유노을이 관리 좀 하라고 마스크 팩을 붙여 주는 게 다였다.
“그럼 두 개 사서 하나는 선배님 쓰시고 하나는 저 주세요.”
“그래, 알았어.”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왜 같은 걸 사서 굳이 하나는 내가 쓰고 하나는 자기가 쓰겠다고 하는 거지?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냥 정우진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티슈 한 장을 더 받아 차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도 좀 줍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짐을 챙겨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곳이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고가의 아파트라고 들었던 걸 떠올렸다.
정우진이 현관문에 카드를 찍자 문이 열렸다. 먼저 안으로 들어간 정우진이 허리를 굽혀 내 앞에 거실 슬리퍼를 놔주며 피딱지가 굳은 입술로 웃었다.
“이거 신고 들어오세요.”
활짝 웃는 얼굴에 조금 주춤하다가 앞에 놓여 있는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을 지나 복도식으로 된 긴 길을 지나치자 오버 좀 많이 해서 운동장같이 커다랗고 넓은 거실이 나왔다. 가구도 별로 없고 워낙 넓어서 그런지 좀 비어 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만큼 개방감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잠시만요.”
푹신해 보이는 소파를 보며 저기에 누워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집이 워낙 넓어서 그런지 사라진 정우진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홀린 듯이 소파 쪽으로 다가가다가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다시 걸음을 돌렸다. 한쪽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고 고층이라 그런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림 같았다. 혹시 지문이라도 묻을까 창문은 만지지도 못하고 그냥 넋 놓고 밖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과 앞머리 끄트머리가 젖어서 물을 뚝뚝 흘리는 정우진이 약상자를 가지고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 그거 약이야?”
그러고 보니까 약부터 발라야 할 것 같아서 다가가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약상자를 건넸다.
“근데 연고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약상자를 열어 보니 반창고부터 시작해서 각종 비상약들이 있었다.
“내가 찾아보고 있을 테니까 넌 물 좀 닦고 와. 세수했어?”
“네.”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하자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움찔하고 어깨를 떨자 정우진이 빤히 나를 쳐다봤다.
“…….”
“…….”
세수를 해서 그런 건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투명해 보였다. 기다란 속눈썹도 젖어서 무겁게 축 늘어져 있었고 피가 났던 입술도 살짝 부어서 평소보다 붉었다.
실제로는 몇 초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체감상 몇 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뭘 봐?”
“네?”
“아, 뭘 그렇게 보냐고……. 빨리 물이나 닦고 와. 물 다 떨어지잖아. 넌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 안 닦아?”
당황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자꾸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다.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뜨고 날 보다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아까 선배님이 엄청 걱정하시고 속상해하시는 것 같아서 빨리 이거 갖다 드리려고요.”
정우진이 내가 들고 있던 약상자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래, 빨리 갖다 줘서 고맙다. 내가 연고 찾아볼 테니까 얼굴 닦고 와.”
“네.”
나오는 대로 내뱉자 정우진이 짧게 대답하고 또 어딘가로 가 버렸다. 나는 약상자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정우진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심정은 정우진이랑 같이 새벽 아침을 보러 영화관에 갔을 때와 비슷했다. 뭐라고 정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내 눈과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가고 너무 어색해서 차라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결국 불쾌해져 버리고야 마는 그런 종류의 어떠한 것이었다.
“선배님.”
얼굴을 닦고 온 건지 정우진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정신을 차린 나는 뒤늦게 바닥에 주저앉아 약상자를 내려놓고 안에서 연고를 찾기 시작했다.
“이거 아니야?”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뜯지도 않은 새 연고를 찾았다. 약상자 구석에 낱개로 포장이 된 멸균 면봉도 있어서 그거 하나랑 연고를 정우진에게 건넸다.
“자, 이거 발라.”
하지만 정우진은 그걸 멀뚱멀뚱 보기만 하고 받지를 않았다. 또 왜 이러나 싶어 이제는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애써 숨기고 태연한 척 물었다.
“왜? 네가 따로 쓰는 전용 연고라도 있어? 이 약, 아니야?”
“그게 아니라……. 선배님이 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뭘 해 줘?”
황당해서 말이 급하게 나왔다.
“선배님이 약 발라 주시는 거 아니에요?”
“약을 내가 왜 발라 주지? 간호사도 아닌데?”
“약 발라 주려면 간호사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돼요?”
“뭔 소리야? 그냥 네가 거울 보고 발라. 내가 발라 주면 더 아플 수도 있잖아.”
이상한 헛소리에 결국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시무룩한 얼굴로 시위하듯 말없이 나를 가만히 보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아파도 되니까 그냥 선배님이 해 주세요.”
“나 이런 거 해 본 적도 없어서 못 해. 그냥 빨리 네가 발라. 난 마트에서 사 온 거 꺼내고 있을 테니까.”
더 이상 정우진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억지로 손에 면봉과 연고를 쥐여 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중문 쪽으로 가 아까 들어와 짐을 놔뒀던 곳으로 갔다.
또 정우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따라올까 봐 최대한 빨리 걸었다. 그러곤 느릿느릿 봉지를 들고 다시 거실로 오자 약을 바르러 간 건지, 다행스럽게도 정우진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으로 가 짐을 놔두고 봉지 안에서 아까 산 재료들을 꺼내고 있는데 숨을 쉬는 게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덤덤한 성격이라 어딜 가든 그럭저럭 잘 적응하면서 살았는데, 정우진은 왜 이렇게 불편한 건지 모르겠다.
친해진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자주 만났으면 좀 편해질 만도 한데……. 대부분 촬영 때문에 만나는 거라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고, 괜히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오해해서 방송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이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
씨발…….
저 새끼 진짜, 남자 좋아하나?
“…….”
아니, 남자를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닌데……. 왜 하필 나냐고. 만약 진짜 정우진이 날 좋아하는 거라고 해도 난 게이도 아니고……. 애초에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만약, 아주 만약에 정우진이 나에게 고백을 한다고 해도 사실상 그냥 거절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걱정을 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사이가 이런 걸로 어색해지거나 그러면 분명 방송에서도 다 티가 날 거고……. 촬영을 하면서도 불편할 텐데, 그런 걸 피디나 스태프, 그리고 보는 시청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특히 오남자는 게스트도 없고 우리 둘이 같이 여행을 떠나는 컨셉이라 출연자들의 케미가 제일 중요할 텐데, 어색하게 뚝딱거리면 그냥 방송 조지는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
머리가 복잡해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최대한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서 이상한 헛소리를 자꾸 해 대서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진짜 내 착각일 확률도 아직 남아 있으니까……. 원래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느끼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는 거고, 말투는 아이돌이니까 팬들이랑 소통하면서 저 모양으로 변한 걸 수도 있었다.
“…….”
그래……. 그래, 내가 도끼병일 수 있을 확률도 아직 배제할 수는 없지.
혼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뒤에서 약간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리자 정우진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발을 질질 끌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거슬리는 소리의 정체는 거실 슬리퍼가 바닥에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였다.
한참 지익, 지익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다가와 내 앞에 선 정우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
입술에 연고를 애벌레처럼 한 사발은 올려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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