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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70/190)

65화

숙소에서 나와 애들이랑 연습실에 도착하자 먼저 가 있었던 유노을이 우리를 반겼다.

점심에 정우진이랑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농땡이도 못 부리고 쉬지도 않고 바로 몸을 풀었다. 최근에 이진혁은 작사, 작곡을 많이 하는 편이라 장비가 있는 개인 연습실에 가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에게 왔다.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

“난 약속 있어서 나가 봐야 돼.”

별것도 아닌 말인데 이유도 없이 머쓱해져서 어색한 목소리로 말하자 셋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짜증 나게 아무런 말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해서 괜히 찔린 내가 먼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뭘 봐?”

내 말에 셋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유노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헤헤 웃었다.

“미안, 다음에는 몰래 볼게.”

“…….”

놀리는 게 분명한 말투와 행동에 순간 말문이 막혀 있는데, 이진혁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야, 놀리지 마. 장난도 아니고 이제 진짠데…….”

“맞아. 예전에는 장난인 줄 알고 놀린 거지, 이젠 그런 걸로 놀리면 안 되지.”

김강까지 맞장구를 치자 유노을이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형. 앞으로 형 애인에 관련된 말은 안 할게.”

“애인 아니라고.”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말하고 있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들을 보며 물었다.

“야, 근데 만약 사귀는 게 진짜라고 해도 이상하지도 않냐? 어쨌든 정우진이랑 나는 둘 다 남자잖아. 물론 정말 사귀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 몰라서 뒤에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 말에 가장 먼저 이진혁이 입을 열었다.

“뭐, 어때……. 나랑 사귀는 것도 아닌데.”

그러자 유노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형이 나이가 몇 살인데 연애를 누구랑 하든 그건 형 마음이지.”

그 말을 들으니 또 그건 그랬다. 내가 게이인 건 아니었지만 남자가 남자랑 사귄다는 게 치부도 아니고……. 물론 직업이 아이돌이니까 치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개 연애를 할 게 아니라면 딱히……. 아니, 근데 소문이 날 수도 있지 않나?

위험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게이가 아니니까 이런 건 내가 고민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 혼자 가만히 있던 김강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혹시 세가온 미성년자야?”

“뭐? 미성년자냐고? 당연히 아니지, 그건 갑자기 왜?”

“그럼 유부남이야?”

“아니?”

사실 정우진에게 이런 속 깊은 이야기까진 듣지 못했지만, 일단 내가 알기로는 유부남은커녕 애인이 있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됐어. 회사에 들키지만 않으면 돼.”

모쏠이면서도 마음만은 넓은 막내였다.

우리 애들은 다 편견도 없고 착하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감동받아서 잠시 가만히 있다가 확실히 말했다.

“아무튼 사귀는 거 아니니까 그만해. 그런 걸로 장난도 그만 치고. 혹시라도 정우진이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난 정우진을 만나러 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쟤들이 어떻게 안 건지 모르겠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차피 좋은 말은 못 들을 것 같아 그냥 관두고 핸드폰을 챙겼다.

“나 먼저 간다.”

내 말에 애들이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인사도 받아 주지 않고 계속 쳐다보기만 해서 결국 나는 또 괜히 찔려서 한마디 해 버렸다.

“오남자에서 할 음식 연습하러 가는 거야. 거기선 둘이 해 먹어야 하니까.”

이쯤 말하면 다들 그렇구나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라 당황해서 나 역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진혁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더듬었다.

“으응, 잘 다녀와.”

말을 하면서도 계속 멈칫멈칫하는 꼴에 또 기분이 안 좋아졌는데 유노을과 김강이 내 앞에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집엘 간다는 거야?”

“미쳤다리…….”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냥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다음부터는 그냥 어딜 간다고 말도 안 해야지…….

***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오자 타이밍 좋게 정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나 숙소야. 방금 씻고 나왔어.”

-숙소요? 그럼 지금 데리러 갈까요?

그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데리러 온다고? 괜찮으니까 그냥 주소만 보내 줘.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

-그냥 제가 데리러 가면 안 돼요?

그래도 사실 상관이 없긴 한데 굳이? 내가 잠시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정우진은 혼자 뭐에 찔렸는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술술 했다.

-사실은 벌써 왔어요.

“뭐? 왔다고? 너 지금 우리 숙소 밑에 있어?”

-네.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도 원래 만나기로 한 것보다 살짝 늦은 상태였다.

언제 왔는지, 왜 왔는지 이런 건 일단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우선 기다리니까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머리 말리고 옷도 입어야 되니까 일단 좀 있어 봐.”

-천천히 나오셔도 돼요. 아니면 제가 올라갈까요? 혹시 멤버들이랑 같이 있어요?

“어? 아니, 그건 아닌데…….”

-혼자 계세요?

핸드폰 너머로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내려갈 테니까 그냥 있어.”

-저 지금 올라가는 중이에요.

“알았어, 올라와.”

-네.

어차피 말도 안 들을 것 같고, 그보다 정우진이 오기 전에 옷부터 입어야 할 것 같아서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얼마나 걸음이 빠른 건지,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어, 잠깐만!”

남은 다리도 얼른 끼우고 티셔츠를 입으면서 문을 열었다.

“…….”

“…….”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웬 멀대같은 도둑놈이었다.

내가 잠시 주춤하자 정우진이 코까지 내려오는 벙거지 모자를 살짝 들더니 말했다.

“저예요.”

“어어, 들어와. 오늘 완전…….”

저번에 잔뜩 꾸미고 나온 것과는 반대로 오늘은 정말 평범한 차림이었다. 코까지 내려와 얼굴의 반을 덮고 있는 벙거지 모자에 짙은 회색 후드 티와 같은 색의 조거 팬츠, 그리고 밝은 회색 운동화, 마스크에 안경까지…….

바로 앞에서 봐도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별로 안 튀죠?”

정우진이 안으로 들어와 모자를 벗으며 물었다. 안 튀어서 좋기는 한데 내가 입은 옷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냥 급하게 아무거나 입은 건데, 하필이면 나도 조거 팬츠에 후드 티를 입어서……. 난 그나마 검은색이기는 했지만.

“아무 데나 앉아 있어.”

“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아니, 근데 갑자기 옷 갈아입으면 좀 이상하지 않나? 아니면 내가 너무 의식하는 걸까?

평소라면 애초에 이런 걸로 고민도 안 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꾸 정우진만 관련이 되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신경 쓰였다. 근데 그럴 만도 한 게, 정우진은 말투도 행동도 다 별났고 좀 느끼하고 낯간지러운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아, 씨! 깜짝이야!”

멍하게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말리다가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모습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들고 있던 드라이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드라이기를 끄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대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랐잖아.”

“왜 놀라요?”

“아니,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계속 여기에 있었어요.”

거울 속에 비친 모습 때문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사실 속으로 정우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필요 이상으로 놀랐던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대충 머리도 다 말렸으니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화장대에 있는 걸 아무거나 잡고 손바닥에 짰다.

“선배님, 혹시 시계는 버리셨어요?”

“시계? 안 버렸는데?”

로션인 줄 알았는데 손바닥에 짜고 보니까 좀 되직한 것 같아서 다시 보니 핸드크림이었다. 이미 짠 걸 도로 넣을 수도 없어서 그냥 손바닥을 비비다가 얼굴에 발랐다.

“…….”

“…….”

대충 크림을 바르고 다시 정우진을 보는데 표정이 어쩐지 시무룩했다. 그걸 보니 나도 모르게 서랍장 위쪽으로 시선이 갔다.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도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건 위에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는 시계가 있었다.

갑자기 민망해져서 그 자리에 굳어 있는데 한참 그걸 보던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날 쳐다봤다.

“…….”

“…….”

갑작스레 시작된 침묵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설마 지금 저 시계 당장 하라고 압박을 주고 있는 건가? 무언의 요청 사항인 걸까? 계속 시계 버렸냐고 물어보는 것도 그렇고……. 나는 손에 남은 미끌미끌한 걸 팔뚝에 슥슥 펴 바르면서 서랍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시계를 손에 잡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제가 해 드릴까요?”

대답하지도 않고 그냥 손목에 시계를 끼우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걸 못 본 척하면서 나는 괜히 손으로 옷을 툭툭 털고 말했다.

“나가자.”

“머리 아직 덜 마른 거 아니에요?”

“거의 다 말랐어.”

“끝이 아직 좀 젖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정우진이 내 쪽으로 다가와 드라이기를 잡으려고 했다. 벼락처럼 드는 불길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정우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빨리 나가자, 그냥.”

“……네.”

나는 정우진이 내 머리를 말려 준다고 할까 봐 쫓기듯 집에서 나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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