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정말 오늘은 튀지 않으려고 작정을 한 건지, 차도 평소에 타고 다니던 슈퍼 카가 아니라 평범한 흰색 SUV로 가지고 왔다. 조수석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마트 들러야 하는데 괜찮으시죠?”
“마트? 아, 그래서 너 오늘 이렇게 왔구나.”
그제야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쓰고 있던 안경과 마스크를 벗었다.
“네, 고기랑 비빔국수 재료도 사고……. 선배님 다른 거 드시고 싶으면 그것도 사고요.”
말을 하면서 귀 뒤를 자꾸 만지작거리길래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귀 아파?”
“안경이랑 마스크랑 같이 끼니까 좀……. 괜찮아요.”
그 말에 나는 정우진이 벗어 둔 안경을 가지고 와 살폈다. 안경알은 없는 검은색 패션 안경이었다. 이리저리 보다가 그냥 나도 한 번 써 봤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마음에 드시면 선배님 하실래요? 그건 별로 안 비싸요.”
“…….”
이젠 툭하면 돈 얘기부터 하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빤히 쳐다보자 정우진이 어딘지 모르게 수줍어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안경 잘 어울리시네요.”
“예,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그거 너 해.”
“…….”
다시 웃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조금 전 놓아뒀던 곳에 똑같이 안경을 놔두며 말했다.
“출발해.”
“네.”
씨부럴…….
내가 다시 존댓말을 쓰면 인간이 아니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면서 조용히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대형 마트에 도착해 주차까지 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차장에서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자 정우진이 카트를 꺼내며 말했다.
“고기는 어떤 걸로 살까요? 한우도 괜찮고, 저번에 대패삼겹살 먹었다고 하셨죠? 그것도 괜찮은데……. 아니면 두 개 다 살까요?”
“넌 뭐 먹고 싶은데?”
카트를 밀고 있는 정우진의 옆에 서서 가장 먼저 나오는 신선 칸을 구경하며 물었다.
“저는 선배님이 드시고 싶은 걸로요.”
“음……. 그럼 그냥 대패삼겹살 사자.”
“닭고기는요?”
“그건 다음에……. 야, 상추랑 깻잎도 사야 하지 않아? 비빔국수에 같이 넣어서 비비면 맛있잖아.”
소량씩 포장되어 있는 모둠 쌈을 만지작거리자 정우진이 그걸 카트에 담았다.
“오이도 살까요?”
“오이 좋지. 나 오이 좋아해. 피망도 사자.”
“저도 오이 좋아해요.”
오이는 다섯 개 묶음으로 랩 포장되어 있는 걸, 피망은 초록색, 빨간색, 노란색 각각 하나씩 세트로 포장되어 있는 걸 골랐다.
“골뱅이도 살까?”
“저 골뱅이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
“그거 엄청 쫄깃쫄깃하고 비빔국수에 넣어서 같이 먹으면 맛있어. 너 골뱅이 소면 같은 것도 안 먹어 봤어? 그거랑 비슷해.”
“달팽이는 먹어 봤는데…….”
그 말에 나는 멈칫하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달팽이랑 골뱅이는 다른 거 아니야? 어쨌든 생긴 건 거기서 거기니까 맛도 비슷하려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달팽이는 무슨 맛이야?”
“다음에 같이 먹으러 갈까요? 제가 사 드릴게요.”
“아니, 달팽이는 좀…….”
별로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달팽이는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아, 고기 저기 있다. 대패삼겹살 산다?”
“네.”
정육 코너에 와서 대패삼겹살도 사자 살 만한 건 얼추 다 산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계속 정우진이랑 카트를 끌고 다니다가 과자 코너에 도착했다.
“과자도 좀 살까?”
“네, 선배님 사고 싶은 거 다 사세요.”
“빈츠 좋아해? 이거 되게 맛있지 않냐? 몽쉘도 살까? 너 초코파이랑 몽쉘이랑 빅파이 중에 뭘 더 좋아해? 몽쉘은 전자레인지에 20초만 돌려 먹으면 진짜 엄청 달고 맛있는데.”
단 건 별로 안 좋아했지만 가끔 한 번씩 그렇게 먹으면 맛있긴 했었다. 여러 종류의 과자도 카트에 담고 계산대로 가 산 것을 다 레일 위에 올렸다.
“아, 맞다. 양념 재료는?”
“기본적인 건 다 집에 있어요.”
“고춧가루랑 마늘 이런 것도 다 있어? 간장이랑?”
“네, 그건 며칠 전에 연습하려고 사 둔 거 있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꺼내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선배님, 제가 계산할게요.”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내버려 뒀다가는 계속 이럴 것 같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야,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넌 그냥 가끔씩만 사면 돼. 아주 가끔만.”
“왜요?”
“내가 선배잖아.”
선배가 후배한테 자꾸 얻어먹고 다닐 수도 없고, 비싼 시계까지 받았으니 밥 정도는 내가 사 주는 게 마음이 편했다.
“봉지에 넣어 드릴까요?”
계산대 점원의 물음에 나는 정우진을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네, 주세요. 야, 너는 이거 봉지에 좀 담아 봐.”
내 말에 정우진은 점원이 준 봉지 안에 계산이 끝난 것들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계산대 근처에 있는 군것질거리들을 보며 말했다.
“아, 선배님. 저것도 하나 사 주세요.”
“어떤 거?”
“저거, 빨간 거요.”
정우진이 가리킨 것은 새콤달콤 딸기 맛이었다. 저번에 사 줬을 때 잘 먹더니, 입에 맞았나 보다. 집에 두고 먹으라고 다섯 개 정도 집어서 같이 계산했다.
커다란 봉지를 들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짐은 트렁크에 실었다. 가면서 가볍게 먹을 과자 몇 개를 꺼내자 정우진이 새콤달콤도 하나 꺼냈다.
“그거 맛있어?”
“네, 저번에 선배님이 사 주셔서 먹어 봤는데 좋았어요. 선배님도 하나 드세요.”
난 캐러멜이나 젤리, 사탕 같은 종류의 군것질거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난 과자 먹을래.”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가 차에 탔다. 안전벨트도 잊지 않고 한 뒤 종이 갑을 뜯고 낱개 포장이 되어 있는 비닐도 뜯어 입에 넣었다. 바삭한 과자와 초콜릿이 금세 입 안에서 녹아 서로 뒤섞였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내 말에 정우진이 주차장을 벗어나며 물었다.
“맛있어요?”
“어, 너도 좀 먹어.”
“아…….”
망설이는 말투라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우진이 내 손에 있는 과자를 힐끗 보더니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데 손이…….”
운전 중이라 과자를 먹을 수가 없다는 뜻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비닐을 뜯어 주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곤 과자를 옆에 두면서 말했다.
“그럼 나중에 먹어.”
“…….”
굳이 보지 않아도 정우진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어쩐지 차 안의 공기도 덩달아 시무룩해진 느낌이었다.
“아, 선배님. 회사 오갈 때 대부분 걸어 다니세요?”
“어, 왜?”
신호가 걸리자 정우진이 내가 옆에 뒀던 과자를 자기가 뜯어서 한 입 먹더니 말했다.
“위험하지 않아요?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고……. 왜 혼자 다니세요?”
“그냥……. 원래 계속 그랬는데?”
“데뷔하고 한참 스케줄 많을 때도 그랬어요?”
“아니, 그땐 아니었지…….”
초창기에는 지방 행사도 많아서 사실 숙소에 들어가서 잘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냥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 자고 거기서 밥도 대충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매니저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세요. 필요한 것도 직접 사러 가지 마시고 매니저 시키시고요.”
“뭘 그런 걸 다 일일이 시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우진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그래야 할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밖에 나가서 아무리 얼굴을 다 내놓고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어쩌다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냥 나를 보면 어! 하고 잠깐 놀랐다가 슬금슬금 비켜 지나가는 게 전부고…….
아주 가끔 사인해 달라고 하거나 사진 찍어 달라고 하는 정도? 그것도 군대 가기 전의 일이지 지금은 날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스케줄 있을 땐 같이 다녀도 연습실 가고 뭐 그러는 건 개인 시간이니까……. 개인 스케줄까지 매니저를 대동할 수는 없지.”
내 말에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이 조용해져서 나는 다시 과자 비닐을 뜯었다. 그때 한참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적어도 걸어 다니지는 말고 택시 타고 다니세요.”
“택시비 많이 나와서 안 돼.”
“제가 교통 카드 드릴게요.”
“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운전이나 하세, 애.”
황당한 말에 나도 모르게 또 존댓말을 쓰려다가 아차 싶어 말끝을 이상하게 늘렸다. 하지만 이미 들은 건지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반말을 지껄였다.
“그럼 면허 따자.”
“……야.”
“네?”
나는 한 손으로 과자를 들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너는 좀……. 반말을 하든가 존댓말을 하든가, 하나만 해.”
때마침 신호에 걸려서 정우진도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선배님도 저한테 존댓말 하셨잖아요.”
“난 황당해서 그런 거고.”
“저도 황당해서 그런 거예요.”
“네가 황당하긴 뭐가 황당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보며 어이가 없어 피식 웃자 정우진도 날 따라 웃었다.
“황당하죠.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계속 그러시니까.”
“누가 보면 내가 뭐, 마약 밀매 현장 한복판이라도 활보하고 다니는 줄 알겠네. 그냥 대낮에 길거리 돌아다니는 게 뭐가 위험해?”
“면허 따시면 렌터카 빌려 드릴게요.”
내 말에 정우진이 또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됐다고.”
저번에도 그러더니 또 이 소리였다.
“이 차는 어때요? 이건 별로 안 비싸요.”
“됐다고요.”
별로 안 비싸다고 해도 몇 천만 원은 할 텐데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가격을 떠나서 내가 정우진에게 차를 받을 이유도 없고.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또 반말을 했다.
“그럼 날 기사처럼 쓸래?”
“…….”
아니, 씨발.
난 존댓말도 안 했는데.
잠깐만, 했나? 아, 했잖아. 씨발.
놀란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당황한 나머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정우진의 입으로 퍽 처넣었다.
“됐으니까 이거나 먹어.”
“읏!”
순간 정우진의 신음이 들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놀라서 후다닥 손을 떼자 부스러진 과자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입술에 살짝 비치는 핏기가 눈에 들어오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좆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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