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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B의 사이-64화 (64/190)

64화

다 식기도 했고 사골 곰탕에 넣고 끓인 만두라 그런지 피가 부드러워서 금방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아깐 당황해서 그냥 넘어갔던 일들이 뒤늦게 떠올랐다.

“야, 너 그 박카스랑 치약은 뭐야?”

“선물이요. 선배님이 샴푸 정도의 가격이면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두 개이긴 하지만 두 개 다 합쳐도 가격은 샴푸 하나보다 싸니까 봐주세요. 그리고 치약은 두 개 세트로밖에 안 팔아서 만 원이긴 한데 하나밖에 안 드렸으니까 오천 원으로 쳐 주시고요. 박카스는 육백 원이에요.”

“…….”

마치 준비해 오기라도 한 듯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말에 나는 다시 당황해 버렸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정우진은 내가 했던 말에서 어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지키라고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가……. 아니, 그렇다고 이걸 이렇게……. 어휴.”

말도 제대로 안 나오고 답답해서 한숨을 쉬자 만두 세 알을 다 먹은 정우진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선배님, 오늘 점심에는 뭐 하세요?”

점심도 같이 먹자는 소리를 할 게 뻔했다.

“연습실 가야 돼.”

“연습실에 몇 시까지 있으세요?”

“연습 다 할 때까지?”

“몇 시요?”

그 말에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 없이 말했다.

“한……. 여섯 시?”

“그럼 연습 다 하고 저녁에는 뭐 하세요?”

“…….”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그걸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받아들인 건지……. 물론 맞긴 하지만, 어쨌든……. 정우진이 활짝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가하시면 저희 집에 오실래요?”

“집에? 너희 집?”

설마 집에 오라고 할 줄은 몰라서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번에 제가 고기 구워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몇 번 연습했더니 괜찮아진 거 같아요. 오늘 제가 고기 맛있게 구워 드릴 테니까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비빔국수도 해 드릴게요.”

딱히 거절할 말이 없어서 난감했다. 무작정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럴듯한 이유도 없고……. 내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정우진이 덧붙였다.

“촬영할 때 음식도 저희가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고기 굽는 거랑 국수 만드는 연습도 했어요. 양념장도 인터넷 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고…….”

그러고 보니 촬영할 때 뭘 만들려면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사전 연습이라 생각하고 미리 만들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다시 웃었다.

“그럼 여섯 시쯤에 제가 데리러 갈게요.”

“아니, 그냥……. 점심에 만나자.”

“연습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가려면 저녁에 가는 것보다 점심 때 가는 게 훨씬 나았다. 그리고 나보다 백배쯤은 더 바쁜 사람을 앞에 두고 바쁜 척하는 것도 좀 민망했다.

“어, 괜찮아. 근데 넌 오늘 스케줄 없어?”

“네, 전 오늘 하루 종일 괜찮아요.”

“내일도?”

“내일은 오전에 있긴 해요.”

그러면 확실히 늦은 시간에 만나는 것보다 일찍 만나는 게 더 나았다.

“그럼 점심시간쯤에 보자.”

“네, 그때 제가 데리러 갈게요. 아니면 저도 연습실에서 같이 있을까요?”

우리가 신곡을 준비 중인 것도 아니고, 각자 개인 연습을 하는 거라 사실 그렇게 해도 안 될 건 없었지만 연습실은 나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니 그건 좀 곤란하긴 했다.

애들도 좀 불편해할 것 같고…….

“아, 그건 안 되겠죠? 절 많이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서…….”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네 말이 맞다고 하기엔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불편하다기보다는……. 그게, 사실 불편한 게 맞긴 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너의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는 그런 뜻이 아니야. 연습하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보면 좀 민망하잖아. 그런 거지.”

“네……. 제가 오늘도 너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찾아와서 죄송해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시간도 너무 이르고 식사하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 아침도 주시고 감사합니다.”

정우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멋쩍은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다음에는 오기 전에 미리 말 좀 해 주면 더 고맙고……. 애들도 그냥 예상치 못한 등장에 놀라서 그런 거지, 기분이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었을 거야.”

“네, 제가 빨리 선배님한테 프라이팬 드리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나 봐요.”

“…….”

프라이팬 얘기를 꺼내니까 갑자기 또 뒷골이 당겼다. 내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자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왜 웃으세요?”

“웃기잖아. 프라이팬 그걸……. 아니, 내가 그거 주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도 이미 사 놨는데 어떡해요. 저는 이렇게 큰 거 안 쓴단 말이에요.”

“아, 이미 사 놨었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저 정도 크기의 프라이팬이면……. 가정용이 아니라 업소용이기는 하지. 아니면 명절에 전 부칠 때 쓰는 거라든가…….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치약이랑 박카스도 고맙고.”

“네, 그냥 제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래 주변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주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들으니 또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엄청 비싼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꽤 있었기 때문에 납득이 갔다.

나는 그럼 만나서 밥이나 사 주고 하면 대충 쌤쌤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알았어. 그럼 열두 시쯤에 보자.”

“네, 그리고……. 놀러 온다고 미리 말하고 오는 건 괜찮아요?”

그 말에 나는 좀 고민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애들도 있어서 그건 좀…….”

“그럼 선배님 혼자 있을 때는요?”

“그건 괜찮긴 한데……. 근데 집에서 뭐 하고 놀게? 딱히 할 것도 없어. 우리도 숙소에 있는 시간보다 연습실에 있을 때가 더 많아서.”

누굴 숙소에 데리고 온 적도 없고, 진짜 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왜 정우진이 자꾸 숙소에 오려고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냥 밖에서 보는 것보다 집에서 보는 게 더 편하지 않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 아무튼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나도 연습실 가 봐야 하니까 나중에 보자.”

이러다가 화장실에서 이진혁과 김강이 질식해 죽을 것 같아서 정우진부터 빨리 내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제가 설거지만 하고 갈게요.”

“야, 손님이 설거지는 무슨 설거지야. 됐어, 내가 할 테니까 그냥 가.”

“그래도……. 그럼 제가 먹은 것만이라도…….”

“됐어, 됐어. 가, 그냥.”

나는 억지로 정우진을 일으켜 세워서 현관 앞으로 끌고 갔다.

“손님 아니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때 정우진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질문의 뜻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대충 흘려들으며 말했다.

“지금 아홉 시니까……. 열두 시 말고 한……. 한 시쯤에 보자. 나도 씻고 연습실 가면 열 시는 될 것 같아서.”

“네, 언제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았어. 나중에 보자.”

그렇게 말하고 손까지 흔들었는데 정우진은 현관문 앞에서 문도 열지 않고 계속 서성거리기만 했다.

“왜?”

더 할 말이 있나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망설이다가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봬요.”

나가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문을 연 정우진이 한 발자국 밖으로 나가서 다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렇게 또 가만히 날 보다가 손을 흔들고 천천히 문을 닫았다.

“…….”

달칵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났음에도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말로 정의 내리기 힘든 그런 것들이 안에서 휘몰아치는 느낌이었다.

딱히 좋은 느낌은 아니라서 습관처럼 뒷목을 벅벅 긁고 화장실 쪽으로 가 발로 문을 퍽퍽 찼다.

“야, 갔으니까 나와.”

그렇게 말하자 화장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면서 이진혁과 김강이 나왔다. 그래도 정말 씻기는 했는지 둘 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기는 했다.

“거기서 둘이 뭐 하는 거야? 뭐, 죄지었어? 왜 화장실에 숨어 있어?”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이진혁이 반박하듯 말했다.

“숨기는 뭘 숨어, 난 진짜 씻으러 들어간 건데 얘가 나 따라 들어온 거지.”

“난 솔직히 도망친 거 맞아.”

“…….”

이렇게 또 순순히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갑자기 와서 놀란 건 알겠는데 그렇게 대놓고 도망을 치면 어떡하냐, 애 민망하게.”

“그건 그래. 미안, 잘못했어.”

“…….”

김강이 다시 순순히 사과를 했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머쓱해져서 다시 뒷목을 박박 긁었다.

“아니, 사과할 일은 아니고……. 아무튼…….”

“사과의 의미로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할게.”

“…….”

이렇게까지 말하니 도리어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진혁은 머리를 말리러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주방 쪽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식탁에 있는 그릇을 싱크대에 놔주며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나는 김강이 설거지한 그릇을 받아 물기를 닦고 상부 장 안에 차곡차곡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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