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분명 착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제 곧 촬영에 들어갈 테니 그때까지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는 게 나을 듯싶었다.
괜히 자꾸 의식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다 티가 날 거고…….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며 잠들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정우진이랑 따로 연락을 하는 것도 없어서 그런지 의외로 금방 덤덤해졌다.
“냉동실에 만두가 왜 이렇게 많아?”
“할인 엄청 하길래 샀지.”
이진혁은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고, 유노을은 씻는 중이라 오늘 아침은 김강과 내가 준비하는 중이었다.
“진혁이도 닭 가슴살 할인한다고 한 박스 샀다던데? 그것도 오늘이나 내일쯤 올 거 같은데……. 냉동실도 비울 겸 만둣국이나 해 먹을까?”
“그래.”
메뉴가 정해지자마자 우리 집에서 제일 큰 곰국 냄비를 꺼냈다. 나는 냄비를 한 번 더 씻은 후 인스턴트 사골 곰탕을 뜯어 냄비에 전부 부었고, 김강은 도마를 꺼내 파와 고추를 썰었다.
냉장고에 계란이 열 개밖에 없어서 그것만 꺼내 큰 그릇에 깨서 대충 저어 풀자 냄비가 끓기 시작했다. 냉동실에서 만두를 꺼내 와 포장을 뜯고 냄비 안으로 쏟아붓고 있는데 김강이 물었다.
“만두 몇 개 넣을 거야?”
“네 봉지쯤 넣으면 얼추 되지 않을까?”
“그럼 다섯 봉지 넣을까?”
“그래, 그럼.”
어차피 뭘 해도 남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김강의 말대로 냄비 안에 고기만두 다섯 봉지를 뜯어 넣었다. 한 번 끓어오르면 썰어 둔 파 무더기와 고추도 넣고 풀어 둔 계란도 휘휘 부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후추를 뿌리고 불을 끄자 애들이 배식을 받는 것처럼 커다란 그릇을 들고 한 줄로 섰다. 국자로 한 그릇씩 퍼 주고 내 것도 퍼서 식탁에 앉자 언제 꺼낸 건지, 김치가 종류별로 나와 있었다.
인스턴트 사골 곰탕에 대기업 만두까지 더해지는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김치도 한 조각 먹으려고 하는데 방 안에 뒀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먹다 말고 방으로 가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정우진에게 온 전화였다.
별생각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멈칫했다.
-여보세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정우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선배님, 제 목소리 안 들리세요?
다급해지는 목소리에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켠 다음 말했다.
“아니, 들려.”
-저 한국 들어왔어요.
“아, 그래? 고생했네.”
-네…….
그냥 한 말이었는데 정우진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시무룩해졌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
말을 안 해 줄 거면 그렇게 티를 내지 말든가. 그래도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피곤할 텐데 집에 가서 쉬어.”
-선배님, 아침 드셨어요?
“어, 지금 먹고 있어.”
-뭐 드세요?
“그냥 만둣국? 넌 아침 먹었어?”
뭔가 말이 좀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밖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띵동 하고 벨이 울렸다. 방 밖으로 나가자 김강이 현관문 앞으로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구세요.”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문 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말했다.
-저예요.
“저예요.”
“……?”
문이 열리자 보인 건 놀랍게도 정우진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정우진이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멀뚱멀뚱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정우진을 보다가 눈을 뻑뻑 소리가 나게 비빈 뒤 다시 봐도 그곳엔 똑같은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김강이 나를 돌아보는 표정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형, 부자 왔어…….”
넋이 나간 얼굴과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에 식탁에 앉아 있던 이진혁과 유노을도 거실로 나왔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던 정우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제가 너무 말도 없이 찾아왔나요?”
그 말에 나는 전화를 끊고 얼른 정우진에게 다가갔다.
“너 여긴 어쩐 일이야?”
“아, 이거 드리려고…….”
“이게 뭔…….”
분명 포장이 되어 있긴 했는데, 겉모양만 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포장지에 싸인 동그라미 밑에 손잡이처럼 보이는 것…….
“프라이팬이야, 설마?”
“네, 제일 큰 걸로 사 달라고 하셨잖아요.”
“이거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네, 그리고 이것도…….”
두 번째로 정우진이 내민 건 작은 종이 가방이었다.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종이 가방 안쪽에 있는 걸 꺼냈다.
“…….”
입구 목 쪽에 푸른색 리본이 묶여 있는 박카스 한 병과 똑같이 정중앙에 엑스 자로 푸른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 치약을 보니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거 두 개 다 합쳐 봤자 육천 원도 안 해요. 그리고 프라이팬은 별개니까 이건 가격에 합산시키지 말고 따로 봐주세요.”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는데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제가 부자예요?”
그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야. 아무튼……. 그, 뭐냐. 아, 맞다. 일단 인사해. 얘는 정우진이고, 얘들은 우리 멤버들. 알지?”
고개를 돌리자 애들도 황당했던 건지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내 말에 정우진이 먼저 인사를 하자 애들도 차례대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부자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예요. 안녕하세요.”
얼마나 뚝딱거리는지 로봇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쟤들이 봤을 땐 나도 로봇처럼 보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태연해 보이는 건 정우진뿐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밥은 먹었어?”
“아, 공항에서 바로 온 거라 못 먹었어요.”
“배고프겠네……. 우리 지금 밥 먹고 있는데 같이 먹을래?”
맹세코 이건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무작정 남의 집에 쳐들어온 사람이 밥까지 먹고 가겠다고 할 리가 없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온, 그런 질문이라는 뜻이었다.
“저도 같이 먹어도 돼요?”
“……그럼, 되지. 당연히 괜찮지.”
하지만 정우진이 많이 특이하고 희한한 놈이라는 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애들도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그래……. 일단, 들어와.”
“네, 그럼 실례할게요.”
정우진이 안으로 들어오자 애들이 갑자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우진을 데리고 식탁 앞으로 갔다. 유노을은 그사이 벌써 다 먹었는지 그릇이 텅텅 비어 있었다.
“아, 여기에 앉으세요. 저는 다 먹었으니까…….”
유노을이 그릇을 치우고 이진혁이 식탁을 한 번 닦더니 김강이 의자를 빼주었다. 정말 완벽한 호흡이 아닐 수 없었다.
“만들어 놓은 걸 다 먹어서 새로 끓여야 되는데…….”
좀 전에 만든 만둣국은 이미 국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유노을이 작은 냄비를 꺼내며 말했다.
“그럼 내가 끓일게. 그냥 한 번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 시간도 별로 안 걸려. 만두는 몇 개 드세요?”
유노을이 정우진에게 질문하며 냉장고 쪽으로 갔다. 정우진은 그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한……. 세 개 정도?”
그 말에 유노을이 놀란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아기세요?”
“네?”
“아니……. 아, 세 개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만두가 세 개 들어간 만둣국을 제가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후배인데.”
만두 세 개로도 만둣국을 만들 수가 있나? 나도 당황하고 있는데 이진혁과 김강은 엄청난 속도로 자기들 몫의 만둣국을 먹고 있었다. 불편해서 그냥 빨리 먹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 그래……. 그럼 그렇게 할게.”
누가 봐도 어색한 목소리로 유노을이 말하자 이번에는 정우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님, 먼저 드세요. 다 식는 거 아니에요?”
“나 원래 뜨거운 거 잘 못 먹어서 괜찮아. 그냥 식히고 있는 거야.”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데 어느새 만둣국을 다 먹은 이진혁과 김강에게도 정우진이 말했다.
“두 분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저는 괜찮아요…….”
“응, 그럼 편하게 할게.”
정우진보다 선배고 나이도 많은 이진혁이 거절했는데 나이가 어린 김강은 금세 말을 놨다. 이진혁은 원래 좀 낯을 가리는 성격이고, 김강은 친해지기만 하면 나이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
“아, 맞다. 계란 없는데.”
갑자기 생각나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말했다.
“계란 없어도 괜찮아요.”
“그래, 그럼 다음에……. 아니, 저기 얘 매운 거 못 먹으니까 고추는 빼고 파만 넣어.”
“알았어.”
나는 빈말로 그럼 다음에 계란 넣어서 해 주겠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정우진은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무튼 유노을에게 말하고 조금 기다리자 금방 만둣국을 끓여서 가지고 왔다. 양도 적어서 금방 끓인 것 같았다.
“저기, 나는 그럼 먼저 연습실에 가 있을게.”
“아, 그럼 나는 씻어야 되겠다.”
유노을이 말하자 이진혁도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혼자 남게 된 김강이 멀뚱멀뚱 나와 정우진을 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방을 벗어났다.
“진혁이 형, 같이 씻자.”
“…….”
“…….”
누가 봐도 도망가는 듯한 멘트를 치고 가 버린 김강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게 먹어.”
“선배님, 원래 씻을 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씻기도 해요?”
“어, 먹어.”
“…….”
쪽팔려서 짧게 대답하고 다 식은 만둣국을 얼른 한 입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