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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90)

62화

순식간에 진행되는 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침착하게 가만히 있었다.

“선배님.”

그때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 대표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차에 가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나는 대표님을 쳐다봤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서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봐.”

“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정우진을 바라봤다. 가볍게 눈짓만 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대표님도 그렇고 실장님도 그렇고 벌써 같이 일한 지 4년이 넘었지만 만날 때마다 불편한 건 여전했다. 특히 건달이었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욱 거북했다. 그래도 정우진은 대표님도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것보다 이렇게 얘기가 빨리 끝나서 신기하기도 하고 좀 이상하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도대체 왜 이런 얘기가 나온 건지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정우진이 같이 있어서 그랬던 걸까? 하긴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더 물어볼 게 뭐가 있겠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박준오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가 차에 탔다.

“얘기는 잘 끝나셨어요?”

운전석에 탄 박준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물었다.

“어, 잘 끝났어. 정우진은 대표님이랑 얘기할 게 있다고 해서 조금 있다가 올 거야.”

“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딱히 할 말도 없어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정우진 공항 가는 길이었어?”

좀 전에 들었던 말이 궁금해서 묻자 박준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네, 근데 늦어서 시간 미뤘어요.”

“아……. 스케줄 때문에?”

“네, SL사 행사에 참석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SL사면……. 정우진이 글로벌 엠버서더로 활동하는 브랜드인 걸로 알고 있다. 시간이 괜찮으니까 비행기도 미룬 거겠지? 아까 대표님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오늘 정우진은 부른 것 같지도 않던데…….

어떻게 알고 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창문에 바짝 얼굴을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려 하고 있었다. 저렇게 해도 당연히 안 보일 텐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설마 문이 잠겨 있나 싶어서 확인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황당한 얼굴로 그걸 보다가 내가 문을 열어 주자 정우진이 웃으며 차에 탔다.

“왜 안 타고 거기서 그러고 있어?”

“그냥요. 선배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너 기다리고 있었…….”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게 정우진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팔을 뻗어 내게 안전벨트를 해 줬기 때문이다.

아, 혼자 차에 먼저 타서 깜빡했다. 방심했던 걸 인정하다가 문득 너무 황당해서 물었다.

“너 내가 안전벨트 안 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걸 보니 더 황당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진지하게 운을 뗐다.

“저번에도 말한 적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알겠어요.”

정우진은 내가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내 말을 끊고 대답했다.

“알겠다고? 내가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알아?”

“안전벨트 해 주지 말라는 소리 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

정확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정우진은 눈치가 빨랐다. 그러니 평소에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생떼를 피우는 말들이 전부 의도적이라는 뜻이었다.

“화나셨어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물었다. 그 말에 아니라고 하려는데 지금껏 조용히 있던 박준오가 작게 물었다.

“저기, 이제 출발할까요?”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박준오를 바라봤다. 어쩐지 싸늘한 눈빛이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 가자. 정우진은 공항으로 가지? 그럼 나 숙소에 내려 주고 가면 되겠다.”

“넵, 알겠습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정우진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화난 게 아니라 그냥 나 혼자 할 수 있는 걸 굳이 남의 도움 받고 싶지가 않아서 그런 거야.”

어떻게 해야 최대한 좋은 말로 돌려 말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내 말에 정우진이 어색해 보이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네……. 선배님이 차에 타기만 하면 귀신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안전벨트부터 하길래 오기가 생겼나 봐요. 죄송합니다.”

“…….”

‘귀신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면서.’

정우진의 말에 순간 뜨끔했지만 그렇다고 했던 말을 무르긴 싫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근데 그렇게 막 엄청 놀라서 한 건 아니었어. 그냥 차에 타면 안전벨트는 해야 되니까 그런 거지.”

“네, 죄송합니다.”

“야, 뭘 그렇게 또 계속 사과를 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네…….”

시무룩한 목소리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어차피 한번은 말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지금 위치를 확인했다. 빨리 내리고 싶어서…….

“선배님.”

“어?”

날 부르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시계는 버리셨어요?”

“뭐?”

“버리신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편한 마음은 더더욱 극대화됐다.

“안 버렸지. 그걸 어떻게 버려?”

“아……. 오늘 안 하고 나오셨길래 버린 줄 알았어요.”

“급하게 나오느라 그런 거지, 버리긴 뭘 버려. 안 버렸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것도 확실히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계 진짜 고마워. 그리고 다음에는 그렇게 비싼 건 안 사 줘도 돼. 솔직히 좀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불편하거나 기분이 안 좋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말 그대로 부담이 돼서 그래. 나는 그렇게 비싼 건 사 줄 수도 없고…….”

“선물 받고 싶어서 드린 거 아니에요.”

“알아. 그런 거 아니라는 거 당연히 알지. 근데 내 마음이 그냥 그렇다는 거야. 알았지? 그런 거 안 줘도 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뭐라고 하려던 정우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작게 대답했다.

“네…….”

살짝 숙인 고개와 아래를 향해 있는 시선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차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나는 창밖만 바라보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슬쩍 정우진을 바라봤다.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

혹시 바닥에 뭐가 있나 싶어 나도 정우진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곳을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혼이 나서 잔뜩 풀이 죽은 개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샴푸 같은 건 괜찮아…….”

“네?”

“샴푸나……. 그런 거.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정말요?”

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변화였다.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띤 정우진을 보다가 나는 또 속은 건가 싶어 덧붙였다.

“딱 그 정도까지만…….”

“샴푸 정도의 가격은 된다는 뜻이죠?”

“…….”

아니, 씨발……. 뭘 또 이렇게 극단적이게 자세한 거야. 물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긴 한 거지만, 이걸 또 이렇게 물어보니까 말문이 막혔다.

“구천 원이요? 아, 묶음으로 샀다고 하셨으니까 개별 가격으로 따지면 더 싼 거죠?”

“……야.”

이놈이 또 나를 놀리고 있는 건가 싶어 잔뜩 목소리를 깔고 부르자 정우진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근데 왜 아까도 그렇고 자꾸 정우진이라 그러고 야, 라고 해요? 우진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어, 우진아. 너 지금 나 놀리고 있는 거지?”

내 말에 정우진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네? 제가요? 제가 선배님을요? 어떻게 그래요? 절대 아니에요. 저는 그냥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제 마음대로 샀다가 또 선배님이 부담스럽다고 안 받으시면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앞으로는 가격을 정확하게 정해 주시면 제가 그 안에서 어떻게든 최대한 선배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걸로 사 볼게요.”

“…….”

놀리고 있는 거 맞네……. 저걸 진짜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만약 애들이 이런 식으로 말했으면 진작 한 대 후려쳤을 텐데.

내 눈빛이 살벌한 걸 느낀 건지 정우진이 웃었다. 얼마나 활짝 웃는지 눈이 반달 모양이 됐다.

“그래도 아예 안 받는다고 하진 않으셔서 너무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그건 굉장히 이상한 말이었다. 도대체 이게 뭐가 감사할 만한 일이란 말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 제가 일이 있어서 오늘 출국하는데 한국 들어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아프지 말고 잘 계셔야 해요. 알겠죠?”

때마침 차가 숙소에 도착했다. 뉘앙스를 보니 또 정우진이 소름 끼치는 말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는 얼른 안전벨트를 풀면서 말했다.

“아플 일이 뭐가 있어. 너도 조심히 잘 갔다 와. 아무튼 난 간다.”

“선배님.”

미련이 철철 넘치는 부름에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어?”

“…….”

“…….”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하든가, 계속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해서 또 살갗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더 이상 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려는 그때,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던 정우진이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니에요, 혹시 하고 싶은 말이나 곤란한 일 생기면 꼭 연락 주세요.”

“그래, 갈게. 준오야, 너도 수고해.”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데, 출발하는 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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