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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1/190)

61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박준오에게 전화가 왔다.

“어, 준오야.”

자다 말고 전화를 받아서인지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어, 무슨 일인데?”

-대표님이 그, 정리 글 관련으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회사로 오라고 하셔서요. 제가 지금 모시러 갈게요.

그 말에 잠이 확 깼다. 나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목을 돌렸다.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나니 찌뿌듯했던 어깨랑 목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해.”

-네, 한 삼십 분쯤 걸릴 거예요.

“그래.”

전화를 끊고 씻으러 가려는데 유노을이 깬 건지 눈도 못 뜨고 물었다.

“어디 가?”

“잠깐 회사 좀.”

“회사? 왜? 무슨 일 있어?”

“전에 그 일 때문에……. 아무튼 나 일단 좀 씻을게.”

빠르게 세수하고 머리를 감고 밖으로 나오자 유노을이 애들을 깨웠는지 전부 거실에 나와 있었다. 그제야 시간을 보니 오전 일곱 시밖에 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대충 손에 잡히는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진혁이 식탁 앞에 서서 내게 말했다.

“형, 이거 마시고 가.”

“뭔데?”

“미숫가루.”

별로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이진혁은 이런 걸 안 먹어 주면 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기 때문에 받아서 그냥 원샷을 때렸다. 그때 핸드폰으로 박준오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네, 저 밑에 도착했는데 올라갈까요?

“아니, 내가 지금 내려갈게.”

-넵, 알겠습니다.

빈 컵을 싱크대에 넣고 현관문 쪽으로 가자 아버지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애들처럼 세 명이 우르르 다가왔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갔다 와.”

“안녕.”

“…….”

신발을 신다 말고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좀 뭉클한 거 같기도 했다. 고맙기도 하고 약간의 전우애 같은 느낌도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대표님이 최대한 숙소에 있으라고 했으니까 너희도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우린 알아서 잘 하니까 형 일이나 신경 써.”

“그래, 갔다 올게.”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가자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바닥이 젖어 있고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내리막길을 내려가자 시커먼 벤이 보였다. 순간 좀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우리는 항상 이동할 때 벤이 아니라 그냥 SUV를 타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정우진이 튀어나왔다.

“선배님!”

문을 열고 그 앞에 서서 양손을 들고 흔드는 모습에 나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얼른 뛰어가 정우진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선배님, 회사 가신다고 해서 저도 왔어요.”

“아…….”

그러고 보니 사실상 이 일은 내 문제만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정우진은 그 정리 글의 주장대로 따르면 피해자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같이 대표님과 이야기를 하는 게 맞았다.

“안녕하십니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박준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인사했다.

“어, 그래. 너 밥은 먹었어?”

“아니요, 아직 안 먹었어요.”

아침부터 고생하는 것 같아 박준오에게 물었는데 정우진이 대답했다.

“선배님은 드셨어요?”

“나는 그냥 미숫가루 한 잔…….”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에 순간 벼락처럼 떠오르는 생각에 얼른 안전벨트부터 했다.

“선배님, 근데 왜 사진 안 올리셨어요?”

“사진? 아, 맞다. 깜빡했네.”

정우진이 찍은 사진을 인별에 올리기로 했는데, 어제 시계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중에 올릴게.”

“지금 올리면 안 돼요?”

“되지.”

딱히 안 될 것도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내 갤러리에 들어갔다. 사진이 워낙 많아서 뭘 올릴까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옆에 바짝 붙으며 액정을 바라봤다.

“그거 어때요?”

“이거?”

“네, 선배님 얼굴 잘 나왔잖아요.”

“……이게?”

젓가락으로 집은 고기를 입에 넣고 있는 사진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이상한데 어쨌든 이걸로 올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

“아, 이건 잘 나온 거 같아.”

내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우진의 얼굴이 반쯤 잘려 있긴 했지만 이건 어제 보고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진이었다.

“그럼 두 개 올릴까?”

“네, 저도 태그해 주세요.”

“알았어.”

“뭐라고 쓰실 거예요?”

글씨를 써야 하나? 딱히 쓸 말도 없는데…….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맛있는 고기?”

“맛있는 우진이는 어때요?”

“뭐?”

“농담이에요.”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정우진이랑 유머 코드가 맞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만……. 이번에 새삼 다시 느꼈달까?

이상한 농담을 하고 세상 무해하게 웃고 있는 정우진을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말했다.

“그냥 사진만 올릴까? 나 원래 따로 사족을 잘 안 붙이기는 해.”

“그럼 이모티콘만 쓰실래요? 웃는 표시 같은 거……. 저번에 선배님이 저한테 댓글 달아 주셨을 때처럼요.”

도대체 인별에 사진 올리면서 덧붙일 말이 뭐가 중요한가 싶었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냥 정우진이 하라는 대로 했다. 어쨌든 우리가 서로 친하다는 걸 전하기만 하면 되고, 이모티콘 쓰는 게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인별에 ^^라는 이모티콘과 함께 정우진을 태그하고 사진 두 장을 올리자 정우진이 곧바로 자기 핸드폰을 확인했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무심코 앞을 보는데, 문득 박준오와 백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너 어디 아파?”

표정이 좀 창백해 보여 조심스럽게 묻자 박준오가 과하게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요, 멀쩡합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계속 캐묻기도 멋쩍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다. 아직 신입이라 긴장을 해서 그런가? 말투를 보면 좀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일도 잘하고 운전도 잘하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을까? 사실 지금 내 코가 석 자라 누굴 걱정할 처지는 못 되지만, 박준오는 나이도 어려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회사와 숙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지하에 차를 주차하고 대표님의 방으로 가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지 아무도 없었다.

“잠시만요, 제가 전화해 볼게요.”

“어, 그래.”

박준오가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선배님, 앉으세요.”

나는 정우진과 함께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왔던 게 군대 가기 전이니까……. 거의 2년 만인가?

그때 문이 열리면서 박준오가 들어왔다.

“대표님이랑 실장님 바로 밑에 있다고 금방 올라오신대요. 저는 그럼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박준오가 다시 나가자 정우진이 물었다.

“선배님, 혹시 좋아하는 식기류 브랜드 있으세요?”

식기류면 그릇이랑 수저를 말하는 건가? 살면서 브랜드를 따져 가면서 그런 걸 사 본 역사가 없기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근데 그건…….”

그건 왜 물어보냐고 하려다가 혹시나 싶어 미간을 구겼다.

“너 설마 프라이팬이랑 그릇도 사 주려고?”

“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참, 말 나온 김에 말하는데 프라이팬은 안 사 줘도 돼.”

내 말에 정우진이 또 입술을 삐죽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어? 넌 여기 왜 있어?”

대표님과 실장님이 들어오면서 정우진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파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하려고 하다가 그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설마 부르지도 않았는데 온 건가? 난 당연히 불러서 같이 온 건 줄 알았는데.

“제 일이기도 하니까 저도 같이 들어야죠, 왜 저를 빼놓고 선배님만 부르세요?”

“아니, 너 지금 공항에 있어야 하지 않냐?”

대표님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얘기 끝나고 가도 돼요.”

“아닐 텐데?”

정우진의 말에 대표님이 실장님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멀뚱멀뚱 그 모습을 보다가 우선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일단 앉자.”

대표님은 검붉은 색 실크 셔츠의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올백으로 올린 번들번들한 머리까지 더해지니 마치 90년대 건달을 보는 듯했다. 진짜 건달이 맞긴 했지만……. 아니, 전직인가?

“너 그 정리 글 봤니? 철이한테 안 그래도 전화가 왔는데 이거 어떻게든 해결하고 가는 게 낫다고 해서 입장문을 쓰든 고소를 한다고 하든 좀 해야 되겠다.”

철이가 누구지? 순간 그런 생각을 하다가 대표님이 말한 철이가 송철 피디라는 걸 깨닫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숨을 한번 삼키는 사이, 대표님이 다시 물었다.

“너 일단 그거 사실은 아닌 거 맞지?”

“네, 전부 아닙니다.”

내 말에 대표님이 정우진을 한번 힐긋 쳐다봤다.

“아닌 거 맞으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래도 대표님인데 쟤는 아까부터 뭐 저렇게 삐딱하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한 얼굴로 대표님의 눈치를 보는데, 정우진의 행동에 딱히 별말을 안 해서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럼 근거도 없는 얘기 자꾸 씨불이면 빵에 처넣는다고 하면 대충 정리되겠지?”

“그 정리 글인지 뭔지 쓴 사람은 고소해야 되지 않을까요?”

정우진의 말에 대표님이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고소를 하자고? 그렇게 시끄럽게 갈 필요가 있나? 일단 한 번 경고하면…….”

“그럼 두 번째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때 고소하면 일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해결하는 거랑 다를 게 없어요.”

그 말에 대표님이 다시 정우진을 빤히 보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고소를 하는 게 낫지. 덕수야, 그 새끼 고소하고 입장문 써서 올려.”

“예, 알겠습니다.”

뒤에 형님이라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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