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90)

59화

셋이 짜기라도 한 듯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던 애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왜 저래…….”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갑돌이 형 아니면 정우진이겠지.”

그러곤 이내 관심이 떨어졌는지 나에게 시선을 돌린 애들이 다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네모난 쟁반 위에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는 김밥을 보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프라이팬……이요?

조금 당황한 듯한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안 그래도 사려고 했는데 깜빡했었거든. 괜찮으면 사이즈 큰 걸로 하나만 사 줘라.”

-사이즈 큰 걸로요? 제일 큰 걸로 사면 돼요?

“어, 제일 큰 걸로.”

다시 한번 제일 큰 걸로 사 달라고 강조했다.

애들이 워낙 많이 먹어서 밥을 먹을 때 계란 프라이를 하면 제일 적게 해도 열 개씩은 하기 때문에 큰 게 편했다.

-알았어요. 냄비는 안 필요하세요?

“어, 냄비는 최근에 큰 거 산 게 있어서 괜찮아.”

정우진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는 좀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시계는 다음에 만나면 돌려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프라이팬은 그냥 사 드릴 테니까 시계는 가지고 계세요. 어차피 사이즈 줄여서 제가 다시 하기도 좀 그렇고, 정 싫으시면 그냥 버리셔도 돼요.

줄은 다시 늘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그냥 버리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황당해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정우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 선배님. 저 스케줄 가야 해서 이제 끊어야 해요.

“뭐? 아니, 잠깐만!”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야! 그럼 프라이팬 주지 마!”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이미 전화는 끊긴 뒤였다.

황망한 마음으로 끊어진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필요 없어서 돌려주겠다고 한 게 아닌데, 버리긴 뭘 버려? 그리고 이걸 어떻게 버려. 미친 거 아니야?”

혼잣말을 하다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왜 저러는 거야.”

김밥을 말고 있던 이진혁이 손등으로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몰라……. 무슨 일 있어?”

“애인이 프라이팬 사 주기로 했나 봐.”

“근데 왜 화났지?”

유노을과 김강도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애인이라는 말에 안 그래도 짜증이 나는데, 더 짜증이 치밀어 뭐라고 하려는데 이진혁이 먼저 중얼거렸다.

“프라이팬 두 개 있으면 좋겠는데…….”

“맞아, 계란 프라이도 하고 햄도 구워야 되니까.”

김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노을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형, 애인한테 프라이팬 이왕 사 줄 거 하나만 더 사 달라고 하면 안 돼? 아니면 원 플러스 원 하는 거 사든가…….”

“…….”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냥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 됐다, 됐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서 터덜터덜 방으로 걸어가는데 이진혁이 나를 불렀다.

“형, 김밥 먹어!”

“너희들이나 실컷 먹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방문을 열자 뒤에서 또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화났지?”

“애인 있는 거 비밀이었나 봐.”

“근데 뭐 저렇게 티를 내?”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냥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정우진에게 프라이팬 진짜 사 주지 말라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멈칫했다.

이렇게 말하면 결국 시계는 받겠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가만히 수건 위에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후광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부담스럽다 못해 내가 저 시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아서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금 전 잔뜩 들뜬 목소리로 이게 좋았고, 저게 좋았고 신 나서 말하다가 사진도 찍어서 보내 줬는데……. 파란색이면 어나더 색깔이고, 팬인 정우진이 내 생각이 나서 샀다는데……. 근데 필요 없으면 버리라는 소리까지 듣고도 계속 돌려주겠다고 하는 것도 좀 아닌 듯했다.

“…….”

시계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뭐……. 정우진이 저 시계를 빚을 내서 사 준 것도 아니고. 비싸긴 하지만 어쨌든 하던 걸 준 거니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줬겠지.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근데 또 진정이 되기 시작하니까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우진이 원래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최근 들어 그런 것들이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하고…….

시계 가격까지 알고 나니까 애써 마음 한구석에 밀어 두고 모른 척해 왔던 것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

갑자기 심각해진 나는 도저히 혼자서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서 슬금슬금 거실로 나갔다.

김밥을 다 만 건지 이제 먹을 준비를 하던 애들이 나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어 주고 일회용 장갑을 건네줬다. 나는 그걸 받아 오른손에 끼우며 운을 뗐다.

“얘들아, 내가 얼마 전에 갑돌이를 만나러 갔는데…….”

유노을이랑 김강은 김밥 한 줄을 들고 뜯어 먹고 있었고, 이진혁은 김밥을 먹기 좋게 썰고 있었다. 나는 일단 이진혁이 썬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먹으며 말했다.

“갑돌이가 아는 사람한테 비싼 시계를 선물 받았다는데 보통 그렇게 비싼 걸 아무한테 막 주기도 하나? 진짜 시계가 엄청 비싼 거거든?”

내 말에 유노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싸긴 비싸지…….”

“난 그거 이름도 처음 들어 봤어.”

김밥을 썰던 이진혁까지 그렇게 말하자 김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길래? 얼마짜린데?”

“거의 칠천만 원이라던데?”

“켁!”

유노을의 말에 김밥을 먹고 있던 김강이 사레라도 들렸는지 켈룩켈룩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야! 드럽게 뭐 하는 거야! 저리 가!”

김밥을 썰던 이진혁이 티슈를 뽑더니 김강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유노을은 침착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

어차피 다 들킨 것 같았지만 나는 일단 계속 모른 척했다.

“아무튼 부자들은 비싼 걸 원래 그렇게 막 줘?”

“부자들한테는 안 비싼 거 아니야?”

이진혁이 기침을 하는 김강의 등을 퍽퍽 때려 주면서 말했다. 그 말에도 뭔가 일리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유노을도 공감했다.

“맞아, 가격은 상대적인 거니까…….”

사레들린 게 좀 풀렸는지 벌컥벌컥 물을 마신 김강도 말을 보탰다.

“그건 그래. 칠천 원짜리 사탕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잖아.”

그 말에 순간 나는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머릿속으로 번개가 쳤다.

아, 진짜 그런 건가? 정우진에게 칠천만 원은 별거 아닌 돈인가? 내가 친구한테 칠천 원짜리 숙취 해소제를 사 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인 건가?

김밥을 집어 먹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진혁이 물었다.

“형, 근데 갑돌이 형은 시계 진짜 받은 거래?”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노을이 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그거 진짜 부자한테 받은 거 맞대? 걔가 준 거야?”

“칠천이면 김밥이 몇 줄이야…….”

김강이 김밥 한 줄을 들고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그걸 입 안으로 넣었다. 터질 것처럼 빵빵하게 싼 커다란 김밥 한 줄이 한 입에 반이나 없어졌다.

“부자가 그걸 왜 줬대?”

이진혁이 다시 물었다. 그 말에 다시 말하려고 숨을 들이켜는데 유노을이 또 내 말을 끊었다.

“갑돌이 형 진짜 정우진이랑 사귄대?”

갑자기 들린 정우진이라는 이름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김강이 내 눈치를 보다가 팔꿈치로 유노을의 팔을 쿡쿡 찔렀다.

“노을이 형, 방금 정우진이라 그랬어.”

“앗…….”

“…….”

유노을은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싸늘해진 뒤였다. 갑자기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자 유노을이 더듬더듬 말했다.

“알았어, 알았어. 갑돌이 형이 부자한테 받은 거잖아.”

더 이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건 의미가 없는 듯해, 그냥 모든 걸 포기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게 말을 왜 그렇게 하고 난리야. 형이 갑돌이 형 얘기라고 했는데.”

“형, 삐쳤어? 내가 말이 잘못 나왔어. 이제 정우진이라고 안 할게.”

“김밥 좀 더 먹어.”

애들은 내가 화가 나서 들어가 버리는 줄 알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방으로 가서 시계를 수건에 감싸 조심히 모셔 왔다.

“그래, 내가 정우진한테 시계를 선물 받았거든?”

그렇게 말하며 시계를 수건째로 식탁 위에 살살 내려놓자 갑자기 애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걸 왜 이쪽으로 가지고 와!”

“눈부셔서 아무것도 안 보여!”

“칠천만 원……!”

난리 법석 요란을 떠는 모습을 보니 그 마음도 이해가 됐다. 나도 처음에 시계의 가격을 보고는 손목이 갑자기 너무 무거워져서 어깨가 탈골될 뻔했으니까…….

“그만하고 일단 앉아 봐.”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과장되게 놀라던 애들이 짜기라도 한 듯 정색을 하고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저것들은 세쌍둥이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매번 쿵짝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