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나도 할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답장을 보내지 않고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
너무 놀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핸드폰을 살짝 떼고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뭐 하고 계셨어요?
“나 그냥 있었어. 너는?”
-저는 선배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그냥 웃어넘겼을 텐데 정우진이 하니까 웃기지도 않고 등 뒤가 서늘해지기만 했다. 말문이 턱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제가 사진 올린 거 보셨어요?
“무슨 사진?”
-인별에요.
“아, 고기 사진이랑 우리 같이 찍은 거?”
나는 혹시라도 소심한 정우진이 댓글은 왜 안 달아 주냐고 전화가 온 건가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네, 선배님도 사진 올려 주세요.
“사진? 나는 사진 찍은 게 없는데?”
-제가 선배님 핸드폰으로 찍었어요.
그 말에 핸드폰 갤러리에 들어가 확인을 하자 정말 처음 보는 사진이 꽤 보였다. 가까이에서 얼굴만 크게 나오게 찍은 정우진의 셀카가 대부분이었는데…….
“…….”
나도 평소에 사진 찍는 것에 딱히 취미가 없어서 정말 못 찍는 편인데, 정우진은 나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역광이거나 흔들린 건 기본이고, 각도도 좀 이상해서 원래 얼굴보다 너무 못생기게 나온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내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는 모습과 함께 찍힌 사진은 그나마 좀 봐 줄 만은 했다. 이것도 정우진의 얼굴이 반은 잘려 있긴 했지만…….
-여보세요?
“아, 어.”
정우진이 찍어 둔 사진을 보다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이걸 올리라고? 왜?”
정말 모르겠어서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정우진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는 올렸잖아요.
목소리에 서운함이 듬뿍 묻어 있어서 모른 척하려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 혹시 저번에 연습실에서 떡볶이를 먹었을 때처럼 그런 건가? 내가 정우진을 울렸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각자 인별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같이 사진을 올리자는 뜻일까?
어쨌든 정우진은 나름대로 날 생각해서 꺼낸 말인 것 같았다.
“알았어, 전화 끊고 바로 올릴게.”
-네!
금세 또 기분이 좋아진 건지 목소리가 밝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좀 어린애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사소한 걸로도 이렇게나 행복해하는구나.
어쩐지 조카를 둔 삼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정우진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어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 물었다.
“아, 맞다. 그…… 시계 있잖아.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줬던 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자 정우진이 기쁘다는 듯 말했다.
-네, 그거 선배님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선물해 주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
잔뜩 들뜬 목소리에 나는 다시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라 굳게 마음을 먹었다.
“어, 근데…….”
-그거 시곗줄 줄이는 것도 사실 제가 줄인 거예요. 공구 세트가 있어서 처음 해 봤는데……. 그래서 사실 살짝 흠집도 좀 나긴 했지만 자세히 안 보면 티도 안 나요.
“뭐라고?”
-시곗줄, 제가 줄였다고…….
굳은 내 목소리에 정우진이 주춤하며 말끝을 흐렸다.
공구…… 세트라니? 지금 거의 칠천만 원짜리 시계를 공구 세트로 자기가 줄을 줄였다는 건가? 거기다가 흠집까지 났어?
-예전에 박이삭……. 아, 저희 그룹 리더 형이요. 미르 형이 다이소에서 사 온 게 있어서 그걸로 줄였어요.
“…….”
-……혹시 흠집 난 거 거슬리면 제가 같은 걸로 다시 사 드릴까요?
내가 지금 이러는 게 시계에 흠집이 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지 정우진이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아니, 따지고 보면 흠집이 나서 그런 게 맞긴 했다.
그 비싼 시계를 다이소 공구 세트로 줄을 줄이다가 흠집을 내다니……. 이 새끼 제정신인가? 물론 자기 시계니까 뭘 어떻게 하든 자기 마음이기는 하지만…….
내가 수건 위에 모셔져 있는 은빛 시계를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변명하듯 주절주절 떠들었다.
-아니, 빨리 주고 싶은데 맡기거나 그러면 기다려야 하고, 사실 스케줄 때문에 갈 시간도 없었고…….
“…….”
-다음에 혹시라도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냥 스케줄 펑크 내고 갈게요…….
웅얼거리는 말에 갑자기 뒷골이 당겨서 뒷목을 잡았다.
-선배님, 제가 새 걸로 다시 사 드릴게요. 생각해 보니까 흠집이 난 걸 하고 다니는 것도 너무 기분이 안 좋을 거 같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마음에 드시면 똑같은 걸로 다시 사 드릴게요. 아니면 색깔이 마음에 안 드시면…….
“아니야, 색깔 마음에 들어. 다 좋아. 디자인도 예쁘고 다 좋은데…….”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가 계속 더듬거리자 정우진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거 색깔 예쁘죠? 저도 처음에 시계 봤을 때 파란색이라서 선배님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바로 샀던 거예요. 저는 뭐 살 때 거의 대부분 다 푸른색 계열로 사거든요. 이사하면서 리모델링도 했는데 집도 화이트랑 블루 계열로 했어요. 다음에 저희 집 놀러 오시면 제가 보여 드릴게요.
“아…….”
-침구 색깔도 푸른색이에요. 좀 어두운 푸른색인데……. 바다 색깔 같은? 잠시만요, 제가 지금 사진 찍어서 보내 드릴게요.
“아니, 우진아. 잠시만.”
핸드폰 너머로 정우진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곤 곧 찰칵하고 사진 찍는 소리도 났다.
“하…….”
갑자기 이 모든 상황이 어이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혹시나 싶어 소리를 죽이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선배님, 사진 방금 보냈는데 보셨어요?
“어, 문자 왔어. 있어 봐, 볼게.”
이제는 뭘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정우진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잘 정돈이 되어 있는 커다란 침대 위에는 정우진이 말한 대로 어두운 푸른색 계열의 이불이 덮여져 있었다. 그리고 주방의 상부 장과 하부 장 역시 푸른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굉장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공간처럼 보였다.
“어, 예쁘다. 좋다.”
-다음에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그래, 우진아. 집이 참 좋다. 근데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우진이 다시 내 말을 끊었다.
-아! 시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죠? 죄송해요, 제가 자꾸 말을 돌려서……. 그러면 일단 만날까요? 혹시 좋아하는 브랜드 있으시면 거기 가서 일단 구경부터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말에 나는 하마터면 그러자고 할 뻔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저 페이스에 그대로 끌려갈 것 같아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우진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떠들던 정우진이 별안간 말이 없어졌다. 핸드폰을 확인해도 전화가 끊긴 건 아니었다.
“여보세요?”
-네.
“내 말 듣고 있지?”
-네, 듣고 있어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디어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시계 너무 예쁘고, 내 마음에 들고, 선물해 준 것도 고마운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받기가 좀 그래.”
-…….
“나는 그냥 집에 사 놓은 샴푸 하나 준 건데, 그거 주고 이런 거 받기에는 왠지 부담스러워서……. 그냥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머쓱해서 뒷목을 만지며 말하자 정우진이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냥 받는다고 하셨잖아요.
연습실에서 정우진이 하도 얄밉게 굴어서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땐 시계의 가격을 모를 때였다.
-혹시 제가 흠집 내서 그러는 거예요?
서글픈 듯한 목소리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너 내 말 알아듣고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지?”
또 연습실에서 내 손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을 때처럼 생떼를 부리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줄 제가 줄여서 그런 거죠?
“아니라고 했잖아. 아무튼 진짜 고마워. 정말 고맙고 시계는 다음에 만나면 줄게.”
-…….
정우진은 대답이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에 점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선물로 준 건데 받겠다고 해 놓고 다시 거절을 했으니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이십 번쯤 쉬다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혹시 시계 말고 다른 걸로 줄 수 있어?”
-……어떤 거요?
그제야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안도하며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평소에 딱히 갖고 싶었던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한테 뭐가 필요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보세요?
“어, 잠시만…….”
나는 황급히 방에서 나와 거실을 쭉 둘러봤다. 식탁에 앉아 김밥을 싸고 있던 세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필요한 걸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 집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김밥 재료를 준비하느라 엉망이 되어 있는 주방에 도착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지단을 부치느라 기름이 묻어 있는 프라이팬이었다.
-선배님,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아, 있어.”
-어떤 거요?
“우리 프라이팬 코팅이 거의 다 벗겨졌는데 혹시 그거 사 줄 수 있어?”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에 지단도 부치고 야채도 볶았을 애들을 바라보며 나는 엄지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