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90)

55화

소고기라 금방 익은 고기를 하나 집어 입에 넣어 봤는데 그냥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소고기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진이 말했다.

“앞으로 고기 굽는 연습 많이 할게요.”

입에 있던 고기를 삼키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다 익은 고기를 내 앞접시에 놔주며 다시 말했다.

“다음에는 제가 맛있게 구워 드리겠다는 말이에요.”

“…….”

그 말에 순간 목덜미에서부터 뺨을 지나 두피에까지 소름이 쫙 돋았다. 나도 모르게 힐끗 시선을 돌려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스태프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표정이 없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게 보였다. 방금 그 말을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척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 많이 드세요.”

“그래, 너도 많이 먹어.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로봇처럼 대답하고 난 뒤 고기를 굽고 있는 스태프에게 물었다.

“네?”

“아, 아직 성함을 모르는 것 같아서……. 고기 구워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에요, 편하게 드세요. 이름은 이채, 외자라 그냥 편하게 이채라고 부르셔도 되고, 동료들은 채야라고 불러요.”

이름이 좀 특이하기도 하고 예뻐서 눈을 크게 떴다가 말했다.

“이름 되게 예쁘시네요. 이채 씨도 고기 많이 드세요.”

“아, 네.”

그러고 보니 다른 스태프들과 인사만 했지 따로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름도 물어보고 인사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채가 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저 기억 안 나세요?”

그 말에 나는 이채를 바라보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났어요?”

“아……. 어제 책 쓰러지면서…….”

“아! 그분이셨구나!”

그렇게 말하니 기억이 났다. 얼굴은 잘 보질 못해서 바로 떠오르지 않았나 보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내가 묻자 스태프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저는 완전 멀쩡해요. 서주 씨는 안 다치셨어요? 그때 대신 책 넘어지는 거 다 막아 주셨잖아요.”

“네, 그냥 스친 거라서 저도 멀쩡해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완전히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모습이라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황당해서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냥, 고기 안 드시나 해서요.”

또 정색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표정이 지나치게 차가워 보였다. 원래 이렇게 생긴 걸 계속 표정 좀 풀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야지. 너도 빨리 먹어.”

“저는 입맛이 별로 없어서 괜찮아요.”

“입맛이 없다고? 왜?”

고기 엄청 맛있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정우진은 별말도 없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촬영장에서 뭘 따로 먹은 건가? 그동안 같이 이것저것 먹으러 다녀 보니까 원래가 뭘 많이 먹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긴 했다.

입맛이 없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고 내 것만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날 불렀다.

“선배님.”

“응?”

입에 잔뜩 고기를 넣고 고개를 돌리자 찰칵하고 사진이 찍혔다.

“뭐야?”

“기념사진이요.”

“무슨 기념?”

“같이 방송하니까 기념이요.”

그렇게 말하며 정우진은 조금 전 자기 앞접시 위에 올려 뒀던 두 점의 새카만 고기도 사진을 찍었다.

다들 밥 먹는데 혼자 안 먹으니까 심심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낯가려서 좀 겉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 빨리 먹고 나라도 좀 같이 놀아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먹는 데에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대충 다 먹어 갈 때쯤 다시 프로그램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대본도 없이 진행할 예정이고……. 그냥 정해진 게 딱히 없어요. 저희는 장소만 대관해 주는 거고, 우진 씨랑 서주 씨는 거기서 편하신 대로 계시면 돼요. 밥도 드시고 산책도 하시고 그러면서요. 근처에 저수지 큰 게 있어서 낚시할 곳도 있거든요.”

그 말에 나는 좀 걱정이 돼서 물었다.

“만약 분량이 안 나오면 어떡하죠?”

“방송 분량이요? 그건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다 알아서 합니다.”

믿음직스러운 말이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여전했다.

“장소는 어디예요?”

정우진의 말에 나도 아, 하고 송철 피디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까 이걸 듣지 못했다.

“그건 비밀입니다. 우선 오시면 알아요.”

“아……. 그럼 지역만이라도……. 거리가 멀어요? 혹시 섬은 아니죠?”

“음, 네. 일단 와 보시면 압니다.”

전혀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니까 더 불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안 알려 주는 건가? 설마 가는 길에 안대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근데 힐링이라며.

그동안 송철 피디가 연출했던 프로그램들은 대부분이 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생해야 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두 분의 요리 실력은……. 쓰읍, 대충 알겠네요.”

정우진의 앞접시에 놓인 탄 고기를 보며 송철 피디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가서 요리도 저희가 다 해야 하는 거죠?”

“네, 재료도 스스로 다 구하셔야 해요.”

“재료를 어디서 구하죠? 산에서 캐고 저수지에서 낚시하고?”

“예, 뭐……. 그러셔도 되고. 그냥 알아서 구하시기만 하면 방법은 어찌 됐든 상관없습니다.”

여기까지 들으니 대충 무슨 컨셉인지 감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정우진이 예리한 질문을 했다.

“그럼 재료나 밀키트 같은 거 가지고 가도 돼요?”

만약 이게 가능하면 그냥 곰국 끓이고 그거 냉동시켜서 가지고 가도 되지 않을까? 당연히 방송 분량을 뽑으려면 이러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재료만이라도 가지고 가면 선택지가 많아질 것 같았다.

“아, 그건 당연히 안 되고요. 핸드폰 빼고 모든 짐은 저희가 압수할 예정이에요.”

“압수까지요?”

그 말에 나는 웃으며 물었다.

“혹시 저희 수련회 가나요? 힐링이랑은 너무 안 어울리는 단어 같은데…….”

“아, 저희 프로그램 힐링이 주목적인 건 맞고요. 아무튼 말씀드렸다시피 정해진 포맷도 없고 대본도 없으니까 그냥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막 굳이 예능이니까 웃겨야겠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마시고 카메라도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여행 왔다 생각하고 즐겨 주시면 돼요.”

길게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아무것도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우리 프로그램은 힐링이 맞으니 걱정 말고 준비해 올 것도 딱히 없고 몸만 와라.

이런 뜻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우진 씨랑 서주 씨 인터뷰 하나씩만 딸게요. 어떤 분이 먼저?”

음식도 다 먹었고 이제 할 이야기도 대충 다 한 것 같았다. 나는 정우진이 또 낯을 가릴 것 같아서 그냥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할게요. 그냥 여기서 하면 될까요?”

“아니요, 잠시 저쪽에서…….”

나는 송철 피디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그래 봤자 바로 뒤에 정우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 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와 그걸 보고 있는데 스태프가 물었다.

“이번에 같은 소속사 후배이자 친한 동생인 정우진 씨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음……. 우선 같이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고, 예능 방송도 너무 오랜만이라 많이 떨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커서 빨리 촬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진이랑 지금도 친하지만 프로그램을 통해서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것도 좋고요.”

속에 있는 솔직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자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정말 방송이 너무 오랜만이라 사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만 해도 좀 긴장이 됐고……. 잘 찍히고 있는 건지 걱정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정우진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은?”

“…….”

이렇게 갑자기? 순간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힘내자.”

“끝이에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는 뭐든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올려 주먹을 쥐었다.

“파이팅!”

그렇게 내 인터뷰가 끝이 나고 이번에는 정우진의 차례가 왔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정우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같은 소속사 선배이자 친한 형인 강서주 씨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됐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나와 같은 질문이었다. 새삼 뭐라고 할지 궁금해서 조용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좋아요!”

그 우렁찬 소리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인터뷰를 하고 있던 스태프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도, 옆에서 그냥 구경하던 사람도 전부 놀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서 정우진이 어떤 표정인지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예상이 가기도 했다.

“섭외 들어왔을 때부터 너무 좋았어요. 섭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즘 너무 기대돼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겠어요. 빨리 선배님이랑 같이 촬영하고 싶어서 그날만 기다리면서 지내고 있어요.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여행을 가는 건 처음이라 그것도 너무 기대가 되고요. 선배님이랑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설레요. 그리고…….”

정우진은 오랫동안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너무 좋다는 말만 구구절절 수다쟁이처럼 떠들었다.

“마지막으로 강서주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이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지막 말은 쉽게 꺼내지 못했다. 나도 이때 좀 당황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침묵이 좀 길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만나요.”

그렇게 사전 미팅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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