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다음 날, 사전 미팅 날이 되었다.
오후 네 시에 온정이라는 한우 갈빗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정우진이 오늘 오전 일정에 문제가 생겨 약속 시간을 오후 일곱 시로 변경했다. 나는 딱히 다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세 시간쯤 미뤄진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선배님 정말 죄송해요ㅠㅠ 오늘 다 찍어야 한다고 하는데 촬영장에 문제가 생겨서 좀 늦는대요ㅠㅠ 제가 계속 안 된다고 오늘 정말 급한 일정 있다고 해도 죄송하다고만 하고 다음에 찍자는 얘길 안 해요ㅠㅠㅠㅠㅠ]
정우진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사실 촬영이나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서 이해가 가기도 했다.
[괜찮으니까 잘 찍고 와. 화보 촬영이야?]
[네 보여 드릴까요?]
그렇게 말한 정우진이 내게 사진 여러 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방금 찍은 것 같은 셀카도 몇 장 있었고, 모니터링을 하면서 찍은 것 같은 사진도 보였다.
[이건 B컷이에요]
다시 사진이 몇 장 왔다. 앞서 온 사진들이랑 비슷한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표정이나 포즈, 사용한 소품이 달랐다. 얼굴의 반은 그림자로 어둡게 가려진 흑백 사진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도 어둡고 음습하고 퇴폐적인 것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정우진과는 정반대였지만 사진 자체는 굉장히 잘 나왔다.
[잘나왔네 멋있다]
팬들이 왜 세가온의 별명을 얼음송곳, 간지 블리자드, 아이스 프린스, 엘프 가온을 줄여서 겔프 등으로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다 유치하긴 했지만 원래 별명이라는 게 그런 것이었다.
참고로 내가 데뷔했을 때 내 별명은 츤츤이었다.
“…….”
아, 갑자기 잊고 있던 걸 떠올리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몸을 배배 꼬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이것도 있어요]
또 보낸 건 정우진이 검은색 셔츠와 검은색 슈트, 그리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검은 레이스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찍은 사진이었다. 좀 과하게 투머치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분위기 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멋있네]
[이거는요?]
마치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다시 사진이 왔다. 이번에는 어딘가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뿔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앞서 보낸 사진들보다는 조금 더 밝은 분위기였다.
[어 괜찮아]
[이건요?]
[그것도 괜찮네]
[이것도요?]
[응 최고 멋있다]
[이것도 있어요]
[짱짱]
[이건 좀 편안한 분위기로 찍어 봤어요]
[어 편해 보인다]
[이건 청량한 느낌?]
[완전 청량하네]
[이건 어때요?]
[죽이네]
수십 장의 사진을 보면서 이젠 할 말도 다 떨어졌다. 다 멋있고 예쁘고 귀엽고 청량하고 편안해 보이고. 아무튼 잘 나온 사진이었지만 이젠 슬슬 지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우진이 사진을 보낸 걸 가만히 보다가 뭔가 좀 이상해서 물었다.
[이걸 오늘 다 찍은 거야?]
[아니요 예전에 찍은 것도 있어요]
“…….”
아니, 예전에 찍은 것까지 왜 보여 주는 건데? 자랑하는 건가? 근데 솔직히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사진이 잘 나오기는 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액정을 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그래 사진 다 잘 나왔고 멋있네 아무튼 나중에 보자]
[조금이라도 일찍 끝나면 연락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ㅇㅋ]
짧게 답장을 보내고 오늘 할 것도 없어서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났다는 정우진의 연락을 받고 숙소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었다.
오늘은 다행……. 아니, 불행하게도 유노을이 없었기 때문에 나 혼자 옷을 입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도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피디님도 편하게 오라고 해서 그냥 대충 머리를 말리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나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벤이 보였다. 짙게 선팅이 돼서 내부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선배님!”
촬영을 하고 바로 와서 그런지 온몸에서 빛이 나고 있는 정우진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일단 정우진을 도로 안으로 밀어 넣으며 나도 차에 탔다.
“안녕하십니까!”
차에 타자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인사했다. 목소리가 익숙하다 했더니 박준오였다.
“어, 준오야. 안녕.”
내 말에 박준오가 꾸벅, 다시 인사를 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 웃고 있던 정우진의 표정은 약간 굳었다.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마치 나를 탓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다음 정우진을 보며 웃었다.
“어, 우진아. 안녕.”
“…….”
똑같이 인사해 줬는데도 정우진의 표정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걸 제대로 보지 못한 나는 아직도 박준오가 잔뜩 굳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일부러 좀 오버를 하면서 말했다.
“원래 비비 매니저인데 임시로 우리 맡아 주는 거라고 했었지? 저번에 피디님 만나러 갈 때도 그렇고 엄청 편하게 잘해 주더라. 운전도 잘하고, 착하고 예의도 바르고.”
잔뜩 칭찬을 해 주자 박준오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멋쩍은 표정으로 쑥스러워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우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자기네 매니저 일 잘한다고 칭찬하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출발하세요.”
“아, 네! 출발하겠습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에 나까지 허리를 펴고 앉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내게 몸을 숙였다. 놀라서 그대로 굳자 정우진이 반대쪽으로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해 주며 말했다.
“많이 기다리셨죠?”
“…….”
아, 벤이라서 방심하고 있었네……. 오자마자 안전벨트부터 했어야 됐는데. 어차피 이미 안전벨트는 착용된 상태라 왜 이러냐고 굳이 따져 묻기도 애매해서 그냥 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별로 안 기다렸어. 네가 뭐 놀다가 온 것도 아닌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다음에는 이런 일 생기지 않도록 신경 쓸게요. 어제 다친 손은 좀 괜찮으세요?”
손? 그 말에 나는 잠시 잊고 있던 걸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내 손등을 살폈다. 다쳤는지 깜빡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미 멀쩡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지. 어제도 말했잖아, 진짜 별거 아니었다고.”
또 병원을 가자느니 그런 소리를 할까 봐 일부러 손을 보여 주며 말하자 정우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 손등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정우진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마음껏 만족할 만큼 보라고 계속 손을 들고 있었다.
“집에 가서 생각났는데 어제 제가 약도 사 드리기로 했었잖아요.”
“그건 그냥 장난이었지.”
“장난이었어요? 저는 진심이었는데. 피로 회복제도 정말 사 드리려고 했단 말이에요.”
“어, 그래. 고마워.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내가 영혼 없이 말하자 정우진이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걸 보니 갑자기 걱정해 준 사람한테 너무했나 싶어서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다음에 사 주든가.”
“그럼 오늘 사 드릴게요.”
“그래……. 약은 됐고 박카스나 한 병 사 줘.”
그동안 정우진의 패턴을 생각해 보면 준다는 건 차라리 빨리 받고 마는 편이 나았다. 내 말에 기분이 좀 풀리기라도 했는지 정우진이 눈웃음을 치다가 말했다.
“아, 그리고 시곗줄 줄였어요.”
정우진이 가방에서 어제 그 시계를 꺼내더니 내 손목에 채워 주며 말했다. 어차피 어제 받기로 이미 결론을 내렸던 거라 나는 그냥 얌전히 손을 대 주고 있었다.
“벌써 줄였어?”
“네, 불편하진 않으세요?”
“어, 사이즈도 완전 딱 맞는데?”
“다행이다.”
시계가 채워진 손을 들어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자 비싸 보이는 건 둘째 치고 생각보다 너무 예쁜 것이었다. 메탈 시계에 청판이었는데 그게 특히 마음에 들었다. 어나더 컬러도 푸른색이라서…….
“근데 겨우 샴푸 주고 이런 거 받으려니까 진짜 너무 민망하다.”
“정말 괜찮아요. 정 그러시면 다음에 술 사 주세요.”
웃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고 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알았어, 술도 사 주고 다음에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너무 비싼 건 말고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어, 너무 비싼 건 말고. 김밥 한 줄 살 수 있는 정도의 가격?”
“좋아요. 다음에 필요한 거 있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웃는 얼굴이 어쩐지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아 나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사실 정우진이 나보다 벌어도 백배는 더 벌 텐데 고작 이런 걸로 좋아하다니…….
혹시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기도 해서 덧붙였다.
“빚내서라도 사 줄게.”
“빚은 저한테 지세요.”
“알았어. 백 원에 일 년이었나?”
“이자 올라서 지금은 십 원에 일 년이에요.”
아니, 이건 올라도 너무 오른 거 아닌가? 나는 황당한 눈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 양아치니?”
“선배님은 특별히 싸게 드리는 거예요.”
실없는 말들을 하며 웃느라 나는 박준오가 우리를 백미러로 귀신을 보듯 힐끔거리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