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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50/190)

50화

처음 우리가 이곳에서 떡볶이를 같이 먹었을 때처럼 바닥에 대충 신문지를 깔고 배달이 온 돈가스를 펼쳤다.

맛있기는 했지만 사실 크게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돈가스였다. 익숙한 맛의 부드러운 소스에 흠뻑 젖은 돈가스와 흰 쌀밥, 크림 스프, 잘 익은 깍두기, 마카로니 샐러드…….

“맛있어?”

궁금해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어요.”

“너 새우튀김은 먹어 봤냐?”

“새우튀김은 당연히 먹어 봤죠.”

뭐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이라 좀 가소로웠지만 어쨌든 잘 먹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피디님은 잘 만나고 오셨어요?”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잘 만나고 왔지. 내일 사전 미팅, 한우 갈빗집에서 한대. 온정이라고 하던데 거기 가 봤어?”

“아니요. 선배님 한우 갈비 좋아하세요? 그럼 제가 오늘 저녁으로 한우 사 드릴까요?”

정우진의 프로그램 출연 조건이 나와 동반 출연이었다는 게 다시 떠올라 살짝 어색해하고 있다가 곧 들려오는 질문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한우?”

“네, 선배님이 돈가스 사 주셨으니까 제가 저녁 사 드릴게요.”

혹시 잘못 들었나? 나는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네가 사 줘.”

“네? 아니, 다음 말고 오늘 저녁이요.”

역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오늘? 나중에 다시 보자고?”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정우진이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에 있다가 나중에…….”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정우진은 말을 끝맺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저녁까지 있자고?”

“네? 네…….”

“무슨 여기에서 저녁까지 있어? 나 숙소 갈 거야.”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대번에 울상을 지었다.

“그럼 저는요?”

“너, 뭐? 너도 집에 가.”

“진짜 밥만 먹고 가실 거예요?”

“애초에 밥 먹으러 만난 거잖아.”

“그렇다고 진짜 밥만 먹고 가면 어떡해요.”

서운한 티가 역력한 목소리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밥 먹자고 해서 만났는데 그럼 밥만 먹지, 뭘 더 하자고?

근데 또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정우진이랑 만나면 이것저것 하고 여기저기 다니기는 했었다. 이렇게 딱 밥만 먹고 헤어진 적이……. 없긴 했구나.

“내일 스케줄도 있으니까 오늘은 그냥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쉬자.”

“…….”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한우 안 사 줘도 돼. 구천 원짜리 돈가스 사 주고 한우 갈비를 얻어먹기엔 내가 너무 양심이 없는 거 같고…….”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차선책을 내놓았다.

“그럼 한우 말고 수입산으로 사 드릴게요.”

어이가 없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됐다고. 넌 왜 이렇게 자꾸 나한테 뭘 사 주려고 해? 내가 그렇게 뭘 못 먹고 다니는 거 같아?”

“그럼 밥 말고 다른 건 사 줘도 돼요?”

그 말이 아닌데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손을 휘휘 저은 다음 남은 돈가스를 먹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정우진도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돈가스와 새우튀김까지 다 먹고 쓰레기까지 치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우진이 물었다.

“정말 그냥 가실 거예요?”

“응.”

일어서자 다시 바지가 밑으로 흘러서 한 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말했다. 정우진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잠시 나를 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손 다친 곳 한 번만 더 보여 주세요.”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얠 빨리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군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정우진은 살짝 고개를 숙여 내 손등을 틀린 그림 찾기 하는 사람처럼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반대쪽도 보여 주세요.”

반대쪽? 반대쪽 손은 안 다쳤는데? 고개를 갸웃했지만 역시나 나는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기 때문에 반대쪽 손도 보여 줬다.

그러자 정우진이 갑자기 자기가 하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 내 손목에 채워 줬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워서 나는 이상한 걸 느낄 틈도 없었다.

정우진은 내 손목을 잡고 살짝 위로 들어 올려 헐렁헐렁한 시계를 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줄여야겠다.”

“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묻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뺐다.

“아까 선배님 시계 유리 깨졌다고 들어서…….”

“그게 왜? 설마 지금 이거 빌려 주는 거야?”

갑자기 시계를 주는 것도 이상해서 최대한 다른 이유를 찾아보다가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빌려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드리는 거예요.”

“…….”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맞았다. 내 표정이 변하는 걸 본 정우진이 덧붙였다.

“선배님이 저한테 샴푸 선물해 주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드린다고 했었고…….”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시계를 준다는 뜻인지는 몰랐다.

“나는 네가 똑같이 샴푸 주겠다는 건 줄 알고 알겠다고 한 건데…….”

딱 봐도 비싸 보였고 꼭 가격이 아니라도 내가 이걸 받을 이유가 없어서 시계를 풀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럼 다음에 샴푸도 드릴 테니까 시계도 선배 하세요.”

“아니야, 됐어. 괜찮으니까……. 야, 손에 힘 좀 풀어.”

허리춤을 잡은 손은 뗄 수가 없어서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게다가 정우진이 손목을 잡은 손을 놔주질 않아서 시계를 벗기는커녕 팔을 뺄 수도 없었다.

제법 힘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꼼짝도 하질 않아서 나는 꽤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씨발. 이게 왜 안 움직여?

팔을 빼려고 몇 번 더 힘을 줘서 뿌리치려고 했지만 정우진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혹시 제가 줘서 그런 거예요?”

“뭐?”

그때 정우진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눈으로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제가 많이 부담스러우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음 같아서는 네가 대표님보다 더 부담스럽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이라 차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저는 선배님이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이제 곧 같은 프로그램도 하고 그동안 밥도 같이 많이 먹고 영화도 보고 바다도 보러 가고……. 그래서 제가 착각했나 봐요.”

“뭐라고? 아니,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냥 시계 안 받는다고 한 건데, 누가 보면 앞으로 평생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소리라도 들은 줄 알겠다.

“안 그래도 선물은 뭘 드릴까 고민했는데 좀 전에 시계 망가졌다는 얘기 듣고 드린 건데……. 아, 혹시 제가 하던 거라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술 마셨어?”

혹시 아까 돈가스랑 같이 왔던 우동 국물에 술이라도 섞여 있었던 걸까? 갑자기 혼자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 정우진을 보며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 샴푸 비싼 것도 아니야. 그냥 홈플러스에 할인할 때 산 거라, 만 원도 안 해. 그래서 그런 거야. 네가 하던 거라서 그런 게 아니라.”

“네, 죄송합니다…….”

“…….”

차근차근 말했는데도 정우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말했다. 그 와중에도 손목을 잡은 손은 여전히 풀리질 않아서 시계를 뺄 수도 없었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다시 팔에 힘을 몇 번 주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 너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에 왜 힘은 안 풀어? 너 지금 힘세다고 자랑하냐?”

“새 거 사 드리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제 거 드린 건데, 선물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저 같아도 누가 쓰던 건 받기 싫었을 것 같고…….”

“아니, 그게 아니라!”

저놈은 귀가 먹었나? 내 말이 안 들리나? 그것보다 아니라고 해도 혼자 계속 땅굴을 파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별안간 정우진의 어깨가 위로 펄쩍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지나치게 놀라서 깨갱하는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우진을 보자 나도 덩달아 놀라 버렸다.

갑자기 왜 이렇게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저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귓가로 ‘제발’이라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발악을 해 보았다.

“그냥 너도 샴푸 사 주면 안 돼?”

“샴푸도 사 드릴게요. 꼭 홈플러스에서 할인하는 걸로, 만 원 미만으로 살게요. 정확한 가격을 알려 주시면 오차 10원도 생기지 않게 할 수 있어요.”

“…….”

이 새끼가 지금 날 멕이는 건가…….

저 말까지 들으니 더 이상 내가 뭐라고 하든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몸에 힘을 쭉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시계 잘 쓸게.”

내 말에 정우진이 그제야 활짝 웃으며 내 손목을 꽉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네, 감사합니다!”

“…….”

싱글벙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게 너무 얄미워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짜 저걸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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