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송철 피디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질 않자 점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하.”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한숨을 쉬거나 손을 쥐었다 풀었다 하며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던 송철 피디가 이내 결심했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미안해요. 저는 당연히 아는 줄 알고…….”
“아, 네…….”
“그……. 아무튼 이거는 그럼……. 제가 실수한 거니까, 방금 한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여기서 할 건 아닌 것 같아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전부 지웠다.
“네, 아무튼 저도 말씀드렸다시피 아쉽고 서운했던 거지 막 다른 악감정을 품었던 건 아니었어요. 피디님은 또 프로그램을 만드셔야 하니까 여러 가지 생각하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으실 거고……. 아무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래요. 어, 그러면……. 저거, 뭐야. 저희가 내일 사전 미팅을 할 예정이거든요. 오후 네 시쯤에 할 건데, 들으셨죠? 미리 회사에 말씀드렸거든요. 온정이라고 한우 갈비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서 할 건데 음식점 밖에 기자들이 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고…….”
벌써 반쯤 식은 믹스 커피를 마시자 들쩍지근한 맛이 입 안 가득 찼다.
“사전 미팅하는 것부터 저희가 찍을 거예요. 그래서 그중에 조금 예고편으로 쓸 것 같고……. 그렇다고 막 방송을 하는 그런 느낌은 아니니까 편하게 오시면 돼요. 그냥 한우 구워 먹으면서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연스러운 모습 같은 거 아주 조금만 쓸 거니까.”
송철 피디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방송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정확히 우리가 뭘 찍는 건지, 이 방송의 주제가 무엇인지 같은 건 말해 주지 않았다. 진짜 촬영할 때까지 비밀로 할 모양이었다.
대충 믹스 커피도 다 마시고 이야기가 얼추 끝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피디가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그럼 내일 다시 뵙는 걸로 하고, 오늘은 조심히 들어가세요. 제가 밥이라도 한 끼 사 드리면서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여기까지 불러서 죄송합니다. 이제 곧 촬영이라 도저히 시간이 안 나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다른 관계자들도 내게 인사를 했다. 계속 인사를 하면서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여는데 순간 문이 확 열려 버렸다.
“우악!”
반대쪽에서 문을 연 사람이 내 가슴팍에 부딪치면서 넘어지려고 하는 걸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그 충격 때문인지 옆 책장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책이 흔들리다가 우르르 우리 쪽으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잡고 있던 사람을 확 당겨 안고 팔로 가리면서 떨어지는 책들을 막았다.
“어떡해,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고 내 상태를 살폈다. 내게 안겨 있던 사람도 화들짝 놀라더니 뒤로 물러서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괜찮아요. 안 다치셨어요?”
“네, 전 멀쩡해요.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 다치지도 않았고 딱히 아프거나 그렇지도 않아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문 옆에 책 많이 쌓아 두면 위험하니까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가려는데 직원이 내 손목을 잡았다.
“진짜 괜찮으세요? 혹시 나중에라도 어디 아프신 곳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저 오두막집 남자들 스태프예요.”
“아, 네.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휴, 책 다 치워야겠네.”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 스태프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와 1층으로 갔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갑자기 박준오가 튀어나와 내 앞에 섰다.
“말씀은 잘하셨어요?”
“아, 어. 계속 여기에 있었어?”
“네,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었어요.”
가리키는 곳을 보자 작은 카페가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는데 박준오가 좀 이상해 보이는 눈치였다.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표정도 별로 안 좋은 거 같고…….
아까 송철 피디도 그러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주변에 표정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은 걸까? 힐끔 박준오를 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커피가 맛이 없었어?”
“네?”
“아니,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아……. 그게 아니라, 혹시 제가 같이 갔어야 했을까요? 혼자 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
별안간 사과하는 박준오를 보며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뚱멀뚱 박준오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내가 혼자 가겠다고 했잖아. 왜 갑자기 사과를 해?”
어느새 차가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 박준오가 또 문을 열어 줘서 엉거주춤하게 차에 타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링크)]
[갑자기 왜 그러나 했더니ㅋㅋㅋㅋ 고작 이거 때문에?]
[황당하네 진짜]
“…….”
또 정우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문자가 온 건 강수민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좋지 않은 기분이 순식간에 수직 하강했다. 가만히 문자를 보다가 링크를 눌러 보자 정우진과 내가 함께 예능에 출연한다는 기사가 떴다.
[야 예능 프로그램 하나 출연한다고 뭐, 니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뀔거같냐? 뭔 씨발 술처먹었나 했더니 고작ㅋㅋㅋㅋㅋㅋ]
[서주야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이렇게 기사가 뜨는것도 세가온때문이지 너때문이겠냐? 제발 주제파악 좀해]
이 새끼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빠르게 오고 있는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자 송철 피디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우진이 나랑 동반 출연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사실 원 플러스 원 개념으로 같은 소속사 신인을 끼워 넣어 함께 출연시키는 것 정도는 이 바닥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송철 피디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던 거 같고…….
“가온이 형 만나러 가실 거죠?”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박준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우진을 만나야 하는데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 근데 정우진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아무도 내게 이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고, 송철 피디도 본인이 실수했다고 말했는데 내가 먼저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그냥 계속 모른 척을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다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박준오가 차 문을 쾅 하고 열더니 내렸다.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뭔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는데 박준오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뒷좌석 문을 다시 쾅 열고 내 팔을 보며 외쳤다.
“다치셨어요?!”
“어?”
“손이요! 다치셨어요?!”
그 말에 손을 보자 손등이 약간 붉어져 있고 손목시계 유리가 깨져 있었다. 아까 떨어지는 책을 막으면서 시계에 맞은 것 같았다. 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펄쩍 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계를 풀면서 말했다.
“그냥 부딪친 거야.”
“어떡해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큰일 났네, 진짜. 안 아프세요?”
말을 하면 할수록 박준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다쳤다고 하기에도 뭐했지만 어쨌든 다친 나보다 박준오가 더 난리라 일단 나는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물이라도 좀 마셔 봐.”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새 물을 건네며 말하자 박준오가 물을 받으며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찬물로 좀 씻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부기도 빠지고…….”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진짜 멀쩡하니까 빨리 차에 타기나 해.”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시계는 어떡해요?”
“어떡하긴, 유리 갈면 되지……. 별로 비싼 것도 아니야.”
박준오가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유리가 깨진 내 시계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혹시 이 시계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그냥 진짜 엄청 싼 건데…….
박준오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내 손등과 시계의 안부를 묻다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선배님, 방금 끝났는데 연습실로 갈까요?]
때마침 정우진에게 문자가 왔다. 나는 문자를 보자마자 정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어, 너 끝났어? 근데 진짜 돈가스 먹고 싶어?”
-네, 왜요? 선배님 다른 거 드시고 싶으시면 다른 거 먹어도 돼요.
“아니, 난 뭘 먹든 괜찮은데 진짜 배달 돈가스로 괜찮나 싶어서.”
내 말에 핸드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괜찮아요. 저는 선배님이 드셔 보신 거 먹는 게 제일 좋아요.
“아……. 그래, 그럼 연습실로 와. 나도 이제 출발하니까.”
또 낯간지러운 말을 해서 그런지 손등으로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반대쪽 손으로 괜히 손등을 문지르며 말하자 정우진이 또 웃으면서 말했다.
-네, 빨리 갈게요. 과속하면 20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이번에는 내가 웃어 버렸다.
“빨리 안 와도 되니까 과속하지 말고 안전 운전하면서 천천히 와.”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봬요. 아, 아니면 통화하면서 갈까요? 선배님, 차 안에서 혹시 할 거 있으세요?
그 말에 나는 웃다가 정색을 했다.
“어, 할 거 많으니까 끊어. 아무튼 과속 진짜 하지 말고 천천히 와.”
-네……. 혹시 뭐 필요하신 거 없으세요? 제가 가다가 사 갈게요.
또 토스트 사러 갔던 것처럼 아무 데나 차 세워서 사 오겠다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됐으니까 그냥 몸만 와.”
-……몸만요?
“어, 끊어.”
이러다가 또 돈가스만 내가 사 주고 정우진이 이것저것 살 것 같아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박준오는 내가 통화를 끊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다가 물었다.
“회사로 가면 될까요?”
“어, 회사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박준오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이등병처럼 우렁차게 대답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노래도 틀었는데 또 어나더 데뷔곡인 ‘Boy Meets Girl’이 흘러나왔다.
“…….”
반복 재생이라도 해 둔 건지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 그냥 아주 주야장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