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90)

47화

유노을이 심혈을 기울여 코디해 준, 어느 정도 격식은 있어 보이지만 과하게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황에 맞는 옷차림이라는 게 진짜 중요하거든. 막 비싼 명품을 두르고 그러라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만나는 자리가 어딘지 그런 걸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나는 으깬 달걀을 식빵 사이에 발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형은 키도 크고 무슨 옷을 입든 핏이 잘 살기는 하니까 적당히 입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머리도 맨날 드라이하기 귀찮다고 대충 털어 말리고 그러니까 다 뻗치고 그러잖아. 살짝만 만져 줘도 이렇게 분위기가 다른데.”

“그렇지, 그렇지.”

“옷도 너무 기본으로만 사지 말고 포인트 줄 수 있는 아이템도 좀 사. 맨날 똑같은 흰색 티셔츠만 사지 말고. 형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맨날 형이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줄 알잖아. 형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 진짜 유명해. 도대체 저건 뭔데 몇 년을 입어도 목도 늘어나지도 않고 저렇게 매일 새 옷 같으냐고.”

“…….”

유노을이 내 머리에 뭘 바르고 만지고 드라이를 하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꾸를 하다가 나중에는 좀 힘들어져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서 식빵을 다 먹어 치웠다.

“선크림 까먹지 말고 발라.”

“넵.”

또 뭐라고 할까 봐 짧게 대답하고 얼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김강이 준 선크림을 얼굴이 치덕치덕 바르다가 이럴 거면 그냥 숍을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노을은 이렇게 가끔 사람을 두고 인형 놀이하는 것처럼 꾸며 주는 걸 좋아해서 이러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근데 진혁이랑 강이는 어디 갔어?”

“라디오랑 약속. 근데 형 기사 떴더라. 봤지? 오두막집 남자들.”

“아, 어. 봤어. 넌 집에 있을 거야? 나 밥 먹고 올 거라 좀 늦을 수도 있어. 집에 있을 거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

내 말에 유노을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또 세가온 만나?”

“……갔다 올게.”

“외박하지 마!”

그 말에 뭐라고 똑같이 장난을 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맞장구를 쳤을 텐데, 정우진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라 이젠 이런 걸로 장난을 치기도 뭐했다.

나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 버렸다.

어쩐지 갑자기 좀 심란해져서 터덜터덜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군기가 바짝 들어간 어떤 남자가 내게 90도를 넘어서 가슴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인사하며 우렁차게 외쳤다. 놀란 내가 주춤하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내 옆에 선 남자가 말했다.

“연락 드렸던 박준오라고 합니다. 새로운 매니저 구할 때까지 임시로 제가 같이 다닐 예정이에요.”

“아, 원래 비비 매니저예요?”

“네, 그리고 제가 나이 더 어리니까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박준오라고 자기를 소개한 매니저가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그걸 보며 나는 다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까지 누가 내가 탈 차의 문을 열어 준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아, 예. 감사합니다.”

“말 놓으셔도 됩니다.”

“그래…….”

내가 차에 타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매니저가 후다닥 뛰어 운전석으로 타더니 내게 목 베게와 마실 것을 건네주었다.

“혹시 입 심심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사 올게요.”

“아, 괜찮아.”

지나치게 깍듯한 행동에 카 시트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노래는 어떤 걸로 틀어 드릴까요?”

안전벨트를 한 매니저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전의 매니저 형은 정신 사납다고 노래는커녕 라디오도 못 틀게 했던 게 떠올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매니저님이 듣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틀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매니저님’이라는 부분만 살짝 어눌하게 말하자 매니저가 화들짝 놀랐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준오라고 하셔도 되고, 준오 씨라고 하셔도 되고, 동생이라고 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 준오야, 노래는 네가 듣고 싶은 걸로 틀어.”

“네, 감사합니다.”

나보다도 나이가 어린 거면 많아 봤자 스물넷이라는 소린데,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남들 비위 맞추느라 고생하는 것 같아 갑자기 좀 마음이 뭉클해졌다.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지금 바로 말하면 그것조차 불편해할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편하게 있으라고 말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낯익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

박준오가 백미러로 힐끔힐끔 나를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말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아, 예…….”

너무 부담스러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다시 존댓말을 쓰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게 지금 나오고 있는 노래는 어나더의 데뷔곡이었기 때문이다.

***

차 안에서 송철 피디를 만나기로 한 곳과 그 외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방송국에 도착했다.

“저는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요?”

“어, 그렇게 해.”

“혹시 무슨 일 생기거나 곤란한 일 있으시면 바로 전화해 주세요. 3분 안에 뛰어갈게요.”

진지한 표정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3분 안에 안 와도 되고, 천천히 와도 되니까 어디 근처에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있어. 밥 안 먹었으면 밥 먹어도 되고. 카드 있지?”

“네, 그럼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박준오를 뒤로하고 송철 피디를 만나기로 했던 예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송철 피디가 누군가와 통화 중인 게 바로 보였다.

나를 본 피디가 눈짓으로 인사한 뒤 얼른 전화를 끊고 내게 다가왔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저번에 잠시 봐서 낯이 익은 스태프들이랑도 가볍게 인사하고 회의실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잘 계셨죠? 아, 혹시 오늘 기사 뜬 거 보셨어요?”

“네, 봤어요. 오두막집 남자들? 맞죠?”

“네, 네. 맞아요. 프로그램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저희가 찍는……. 아, 이건 스포니까 일단 나중에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 여기까지 와 주셔서 고마워요.”

뭔가 말투도 그렇고 목소리도 한껏 들떠 보이기는 했지만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전체적으로 보면 좋아하는 것 같고, 입도 웃고 있기는 한데 묘하게 눈빛이 싸늘하다고 할까.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덩달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채 앉자 곧 스태프 한 명이 종이컵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나와 피디 앞에 놓더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아, 혹시 아메리카노 드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하하, 제가 좀 구닥다리라서 그런지 믹스 커피가 제일 맛있더라고요.”

“저도 단것 먹고 싶을 때 가끔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김이 펄펄 나고 있는 믹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 하는데 피디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번에는 내가 생각이 너무 급했던 거 같아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이건 좀 도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주변에서도 말이 좀 나오고 그래서 저희끼리 회의도 많이 해 보고 강만덕 대표님이랑 이야기도 좀 하고 그랬어요. 들으셨죠?”

“아, 네. 회사에 오셔서 대표님이랑 같이 말씀하셨다고…….”

“네, 그래서 그냥 기존 포맷대로 가기로 했어요. 기분이 상할 수도 있었던 일인데 이렇게 흔쾌히 다시 출연하기로 결정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는 피디를 보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직접 말씀까지 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앞으로 촬영하면서 자주 봐야 하기도 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넘어가는 게 낫죠. 저희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던 건 아니고 어떻게 더 잘 해 보고 싶어서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됐던 거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 아쉬웠던 건 사실인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다시 같이할 수 있게 돼서 좋은 것 같아요.”

서로 좋게 말하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그럴 게 피디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매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디가 표정 관리를 잘 못하는 사람인가?

그러니까 꼭……. 뭔가 궁금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사과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내가 독심술사가 아니니 정확히 피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만 보면 일단 이 자리가 엄청나게 불편해 보이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피디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도대체 왜 계속 이런 표정으로 일관했던 건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세가온 씨가 원 씨랑 동반 출연 조건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고 한 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이었거든요. 계약을 할 땐 그냥 두 분이 같이 출연한다고 하셔서 같은 회사니까 같이 나오려고 하는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해서…….”

“…….”

“그렇게 두 분이 친하신 줄 알았다면 저희도 애초에 그런 결정은 안 했을 거예요. 아무튼 정말…….”

“…….”

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던 피디가 점점 변해 가는 내 표정을 보더니 덩달아 표정이 바뀌며 천천히 말꼬리를 흐렸다.

“…….”

“…….”

우리는 잠시 서로 멀뚱멀뚱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피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하더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몰랐어요?”

“…….”

나는 내 대답이 정우진과 회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파악이 되질 않아 입을 열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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