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나도 덩달아 정우진을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고 싶다고 기다렸다더니, 진짜 재밌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생각보다 많기는 했지만 영화 자체는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다.
“근데 이거 로맨스라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든 생각에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착각을 한 사람치고는 이상하게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영화가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라 이해는 됐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벌써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정말 좀 피곤한 것도 같아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밖으로 나와 차에 타면서 말했다.
“나중에 한 번 더 보고 싶다.”
“영화요? 저도 너무 재미있어서 또 보고 싶은데, 그럼 나중에 또 같이 보러 올까요?”
기다렸다는 듯 정우진이 물었지만 나는 그냥 웃기만 하고 대답하진 않았다. 왜냐면 이걸 다시 정우진이랑 볼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재미있었지만 아무튼 수위 높은 야한 장면들도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약 보러 와도 그냥 혼자 오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님, 배는 안 고프세요?”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살짝 출출하긴 한데……. 뭘 먹기엔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냥 가자.”
내 말에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주차장을 벗어났다. 그렇게 도로를 따라 계속 달리더니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왜?”
“잠시만요.”
“어? 야, 어디 가?”
말릴 틈도 없이 정우진이 안전벨트를 풀더니 문을 열고 내려 버렸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주변에 술집도 제법 있는 번화가라 사람들이 그래도 꽤 있었는데, 정우진을 보자마자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어디를 가나 했더니 정우진이 길가에 있는 토스트집으로 가더니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리기 시작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러다가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싶기도 해서 결국 나도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박이다, 진짜.”
“세가온이야, 세가온.”
“존나 잘생겼다.”
“와…….”
“오빠, 팬이에요!”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고막에 꽂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정우진을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로는 마치 결계가 쳐진 것처럼 사람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정우진에게 다가가 그의 팔뚝을 잡았다.
“내가 받아서 갈 테니까 들어가 있어.”
“왜 나오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이를 꽉 물고 복화술을 썼다.
“어떻게 안 나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렸는데.”
“혹시 화나셨어요?”
“아니? 화 안 났으니까 일단 들어가 있어.”
“아니에요, 이제 다 돼서…….”
자꾸 안 들어가려고 하는 정우진의 손목을 잡고 차까지 가서 억지로 안으로 밀어 넣고 겨우 문을 닫았다. 때마침 토스트도 나와서 검은 봉지를 받아 나도 얼른 차에 탔다.
자동차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면서 조금씩 자리를 비켜 주기 시작했다. 차 창문을 두드리거나 앞을 막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러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검은 봉지 안에 토스트 두 개를 보며 물었다.
“이건 왜 샀어? 배가 많이 고파?”
“아까 좀 출출하다고 하셔서 샀어요.”
그러고 분명 그냥 가자고 했는데 뒷말은 안 들은 건가? 아니, 그래도 일단 샀고 냄새가 너무 좋아서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우진이 운전하고 있는데 혼자 먹을 수는 없어서 검은 봉지를 들고만 있었다.
“안 드세요?”
“같이 먹게 일단 숙소 쪽으로 가 봐. 저번에 그 밑에 너 주차했던 곳.”
“거기 주차 금지 구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새벽이고, 뭐…….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토스트 먹는데 십 분도 안 걸릴 거 같은데.”
내 말에 정우진이 속도를 조금 더 내는 게 느껴졌다. 종이로 감싼 토스트 앞에는 동그란 스티커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는 스페셜 감자 토스트, 다른 하나는 스페셜 햄 치즈 토스트였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라 숙소까지 금방 도착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기 전 바로 아래쪽에 주차를 하고 토스트를 꺼내며 물었다.
“둘 중에 어떤 거 먹을 거야?”
“선배님은요?”
“난 아무거나 괜찮아.”
“저도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결정 장애가 있는 정우진을 위해 그냥 더 왈가왈부하지 않고 내가 먼저 고르기로 했다.
“그럼 내가 스페셜 감자 먹을게.”
정우진에게 스페셜 햄 치즈를 건네고 종이를 벗겼다. 그사이에 살짝 식기는 했지만 한 입 먹으니 고소하고 살짝 눅눅한 식빵과 아삭한 야채, 케첩 소스, 조금 단단해진 모차렐라 치즈와 바삭 눅눅한 해시 브라운의 짭짤한 맛까지 모든 게 다 조화로웠다.
“왜 이렇게 맛있냐.”
“맛있어요?”
“그냥 평범한 토스트 맛인데 왜 맛있지? 배가 고파서 그런가?”
한 입 크게 먹고, 다시 한 입을 베어 무는데 정우진은 어째 잘 먹지를 못하고 있었다. 뭔가 먹는 모양도 좀 어색해 보였고 한 입 먹을 때마다 밑으로 잘게 잘린 양배추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흘리고 먹어?”
“자꾸 흘러요.”
“손을 좀 이렇게 잡아 봐. 밑으로, 종이랑 같이.”
내 말대로 고쳐 잡은 정우진이 다시 한 입 먹자 이번에는 야채들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약간 불편해 보여서 다음에 살 때는 차라리 야채가 안 들어간 토스트를 사는 게 나을 듯싶었다.
토스트 하나쯤은 금방 먹어 치우고 종이 쓰레기를 봉지 안에 넣고 꽉 묵었다.
“쓰레기는 내가 가지고 가서 버릴게.”
“네, 선배님. 저희 내일은 몇 시에 만나요?”
“내일? 내일은 왜?”
“새벽 아침, 또 보신다면서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아……. 다음에. 내일 말고.”
“다음 언제요? 혹시 많이 바쁘세요?”
“바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너 스케줄 없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있긴 있는데 시간 맞출 수 있어요.”
도대체 뭘 맞춘다는 거지? 아무튼 나는 정우진이랑 같이 또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 없어서 다시 한번 더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다음에 다시 말하고, 일단 늦었으니까 들어가.”
“다음 언제요? 이번 주 주말이요? 며칠이요? 이번 달은 맞죠?”
“…….”
하지만 정우진은 집요했다.
“정확히 날짜 말씀해 주시면 체크해 둘게요.”
그 말에 나는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혹시 일정 때문에 이렇게 미리 정해 두는 건가? 워낙 스케줄도 바쁘고 정우진이면 분명 몇 달 후까지 일정이 빽빽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정우진의 행동이 이해되기도 했다.
“우리 촬영 끝나고 한 번 다시 얘기해 보자.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촬영이요? 촬영 언제 해요?”
정우진이 뭔가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묻기에 덩달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지? 근데 이제 곧 하지 않을까? 저번에 피디님 말씀하시는 거 들어 보니까 뭐 예약하고 준비하고 이런 건 거의 다 끝난 것 같더라. 이제 촬영만 하면 되는 것 같던데?”
내 말에도 정우진은 뭔가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차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난 이제 가야겠다는 말을 언제 꺼내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
“아, 잠시만.”
“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검은 봉지를 들고 황급히 차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리고 숙소 안으로 들어가자 애들은 다 자고 있는지 조용했다. 혹시 깰까 봐 조심스럽게 검은 봉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욕실로 가 아직 뜯지 않은 새 샴푸를 꺼내 밖으로 나왔다.
정우진은 어느새 차 밖으로 나와 보닛 위에 손을 올리고 한 손으로는 가슴을 쥐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래?
어디 아픈가 싶어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자 정우진이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붉어져 있어서 놀란 눈으로 물었다.
“너 혹시 어디 아파?”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오늘…….”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던 정우진이 내 손에 들린 샴푸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아, 하고 샴푸를 정우진에게 건넸다.
“이거 너 준다고 했던 거.”
정우진은 멍한 눈으로 그걸 가만히 보다가 양손으로 공손하게 받았다. 그러더니 이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갑자기 좀 민망해졌다. 생각해 보니 오늘 계산도 거의 정우진이 했는데……. 뭔가 계산을 하려고 할 때면 계속 놀라거나 그런 일들이 생겨서 계산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후배한테 얻어먹고 다니기만 할 수는 없어서 나는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만지며 말했다.
“다음에는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럼 우리 뭐 먹어요? 어디 갈까요?”
또 시동을 걸고 있는 정우진을 억지로 차에 태우며 말했다.
“일단 집에 가. 지금 한 시 넘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꼭 말해 주세요.”
“알았다고. 잘 가!”
차 문을 닫고 손을 흔들자 정우진이 창문을 내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알았어. 가!”
손을 흔들다가 등을 돌려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상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차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계속 쳐다보자 눈치라도 보인 건지 조금 움직이기는 했지만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조금 움직이다가 또 멈추고…….
답답하게 왜 저러는 거야?
나는 결국 아예 몸을 돌려 팔짱을 낀 채 자동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