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딱딱하게 굳어서 앞만 보고 있는데 스크린에 검은 밤하늘 끄트머리에서 조금씩 해가 뜨고 있었다.
영화는 이제 시작해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아니, 뭐……. 이건 영화고……. 둘 다 성인인데 못 볼 것도 없지.
“…….”
애써 좋게 생각하며 몸을 뒤척거리다가 편안한 자세로 누웠다. 몸에 힘을 빼고 영화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느낌이 묘했다.
자꾸만 옆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고민하다가 슬쩍 옆으로 눈알을 굴리자 정우진이 아예 팔걸이에 팔꿈치를 댄 채 턱까지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완전히 무슨 동물원 원숭이 감시하듯이…….
“…….”
“…….”
눈이 마주차자 정우진이 아, 하고 어색하게 웃더니 몸을 돌려서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봤지만 나는 여전히 계속 정우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쳐다보면 눈알을 찔러 버리려고 했는데 다행히 한참이 지나도 이쪽을 보진 않아서 나도 포기하고 앞을 바라봤다.
스크린에 연구실처럼 보이는 깨끗하고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20대 초중반처럼 보이는 젊은 남녀 연구원 둘이서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었다. 한마디 대사도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둘은 어느새 연인이 되었고, 곧 결혼을 하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이불 속에 두 사람이 보였다.
“…….”
아니…….
아니, 지금……. 영화 시작한 지 5분도 안 됐는데…….
왜 벌써 이런 게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그냥 앞만 계속 쳐다봤다.
둘은 이불 속에서 한참 서로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쪽쪽거리는 소리와 혀를 섞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영화관이라 그런지 사운드가 아주 예술이었다.
“…….”
씨발…….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참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무슨 열아홉 살짜리 미성년자도 아니고, 이게 왜? 그냥 여러 가지 앞뒤 상황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나는 고작 이런 거 때문에 곤란해하는 그런 숙맥이 아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정적으로 키스하던 남녀는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잠시 눈을 감은 채 행복하게 웃었다. 이제 끝나는가 보다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여자 위에 있던 남자가 다시 덮치듯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점점 입술이 아래로 내려가, 목, 어깨, 팔을 지나서 손가락도 깨물고 납작하고 탄탄해 보이는 배에도 입술을 문질렀다.
“…….”
여자가 느끼고 있는 건지 신음은 더욱 커졌고, 둘의 몸을 가려 주고 있던 새하얀 이불도 허물을 벗듯 점점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은 지나칠 정도로 세세했다.
아니, 이게 무슨 성교육 동영상이야? 이렇게 자세할 필요가 있나? 그냥 대충 했다 치고 좀 넘어가지 영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남의 잠자리만 계속 보여 주는 거야…….
천천히 손을 뻗어 아까 먹다 남은 오렌지주스를 전부 마신 뒤에 살짝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다행히 정우진은 내가 아닌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영화에서 무슨 내용이 나오든 별 관심도 없는 표정이었다. 소파를 뒤로 젖히지도 않아서 살짝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등을 기댄 불량해 보이는 자세였다.
저렇게 앉으면 척추 박살 날 텐데…….
기다란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화면을 보던 정우진이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우진이 눈웃음을 쳤다.
나는 이상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은 뒤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바라봤다.
저 사람들은 아직도 한창 관계를 하는 중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이불은 다 벗겨지고 옷도 없이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 되었다.
“…….”
그러다가 문득 내가 너무 필요 이상으로 민망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까?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고, 나는 이렇게 오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뭐, 진짜로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사실 이런 걸 다른 사람이랑 같이 본 적이 없었다. 봐도 혼자 보지 이런 걸 대체 누구랑 같이 본단 말인가? 영화관에서도 당연히 청불 영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폭력 수위 때문에 청불이었지, 야해서 청불이 아니었다.
에라이, 씨발.
차라리 머리와 뇌를 비우려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관계가 시작되고 난 다음부터는 그런 것도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결국 참다못해 천천히 눈을 감고 이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지나가기만을 차분히 기다렸다. 세상사 모든 것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귀도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튀는 행동이라 그러진 못했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까 뭔가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 위로 아주 거대한 그림자가 진 것 같은 불길하고도 이상한 느낌 말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눈알을 몇 번 굴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씨.”
그리고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정우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보였기 때문이다.
“뭐야?”
“아니, 선배님 혹시 주무시는 건가 해서…….”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주인공이 절정에 다다르는 듯한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아아앗!’
“……아니, 오늘 너무 돌아다녔더니…….”
‘하읏……. 아윽!’
“피곤해서 그냥 눈 감고 있었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나는 미친 헛소리를 지껄여 버리고야 말았다.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아무튼 괜찮으니까 비켜.”
나는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차라리 정우진이 나를 공기 취급해 줬으면 좋겠다…….
“마실 것 좀 더 드릴까요?”
“괜찮아.”
짧게 말하고 다시 화면을 보는데 주인공들은 이제 2차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징하다, 징해…….
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볼까 봐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그냥 스크린 가장 아래 끄트머리쯤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드디어 천 년 같은 시간이 끝나고 장면이 전환되었다.
부부는 같이 연구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밤에는 아주 긴 사랑도 나누면서 행복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다가 둘이 함께 연구하던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그건 바로 세포의 재생력을 극대화시켜 상처가 나도 빠르게 자가 수복이 되는 능력을 가진 이른바 ‘슈퍼 세포’였다.
연구원들은 자기들이 개발한 슈퍼 세포를 세상에 발표하고 인류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그 슈퍼 세포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자가 수복이 진행될수록 세포는 조금씩 증식하다가 그것이 뇌에 다다르면 결국 기생충처럼 인간의 몸을 지배해 버리는, 아주 치명적인 부작용이었다.
“…….”
이때쯤부터 나는 완전히 영화에 빠져들어서 뭘 마시는 것도,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너무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구원들은 뒤늦게 부작용을 알아차리고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로 인해 결국 인류는 멸망 위기에 놓였고, 가장 처음 슈퍼 세포를 발명하게 된 주인공 부부는 괴세포에게 지배당해 다른 생명체가 된 인간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백신을 만들기 시작했다.
백신을 만드는 과정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험난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잔인한 장면도 많이 나왔고, 폐허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부부의 모습도 나왔다.
그런 고난과 역경 끝에 결국 백신 개발은 성공하고 인류의 재건을 암시하는 장면과 함께 어두운 밤하늘에서 해가 뜨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났다.
정신없이 보다가 끝이 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잠시 여운에 빠져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는 스크린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온몸이 찌뿌듯해서 젖혀져 있던 의자를 똑바로 하고 목을 움직이면서 허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
“…….”
정우진은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아예 몸까지 완전히 내 쪽으로 돌린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