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휴게소에서 나와 다시 차를 타고 밥을 먹으러 갔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면서 한참 국도를 달리고 있는데 커다란 간판에 냉면이라고 적힌 곳이 보여서 그냥 거기로 들어갔다.
물냉면 두 개랑 같이 먹을 돼지갈비까지 시켜서 다 먹고 나와 차에 올랐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또 아무 데나 차 세워서 내리고 아까 샀던 호두파이도 먹고 바람도 쐬고……. 그렇게 별짓거리를 다 했는데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서 결국 참다못한 나는 이를 악물고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진짜 좀 적당히 하자…….”
“네, 죄송합니다…….”
정우진도 이건 좀 심했다 싶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 겨우 시간을 다 흘려보내고 드디어 영화관에 입장할 시간이 됐다. 도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뭘 한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다가 잠드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한산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예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심야 영화라고 해도 사람이 이렇게 없나?
정우진은 나중에 영화가 시작하고 들어오기로 했는데 그렇게 할 것도 없어 보였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정우진이랑 같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조금 놀랐다.
나도 사실 영화관에 많이 와 본 건 아니고, 그냥 이진혁이 마블 시리즈를 좋아해서 그거 개봉할 때 주로 왔었는데 내가 다니던 곳과는 좀 달랐다. 좌석도 몇 개 없었고 의자도 다 소파처럼 되어 있는데, 여기에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아무도 없지?”
넓고 어두운 공간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내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우리 어디 앉아?”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뭐?”
“저기에 앉을까요?”
정우진이 가리킨 곳은 가장 중앙 자리에서 조금 더 높은 곳이었다. 모든 자리의 소파가 커플 석처럼 두 자리씩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정우진이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 영화관 의자보다 몇 배는 더 컸고, 푹신해 보여서 신기한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강이가 덩치가 커서 영화관 오면 좀 불편해했는데 다음에 올 때는 여기에 오면 되겠다.”
“…….”
정우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소파를 구경하느라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버튼을 누르자 리크라이너 소파처럼 작은 소음을 내며 의자가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적당히 편한 각도를 찾아 멈추고 다리를 올려 몸을 눕히자 너무 편해서 이대로 잠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뭘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체를 일으키자 직원인 듯한 사람이 트레이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그곳엔 마실 것과 간단한 간식거리가 있었다.
“선배님, 그거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오징어 버터에 구운 거요.”
“오다리?”
“아, 네. 저기, 혹시 오다리라는 것도 있어요?”
내 말에 정우진이 직원을 보며 물었다.
“네, 있어요. 준비해 드릴게요.”
짧게 대답한 직원이 자리를 뜨자 정우진이 내게 무릎 담요를 건넸다.
“이거 드릴까요? 안 추우세요?”
별로 춥지는 않았지만 그냥 반사적으로 받아서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렸다. 정우진은 트레이에서 이것저것을 살펴보더니 내게 마실 걸 주며 말했다.
“오늘 커피 너무 많이 마셨으니까 그만 마시고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
“과일 주스요. 오렌지 착즙한 건데 싫으면 다른 걸로 달라고 할게요.”
“아니야, 괜찮아. 이거 마실게.”
정우진이 준 주스를 한 모금 마셔 봤는데 엄청 시원하고 맛있었다.
“탄산수도 있는데 드릴까요? 더 먹고 싶은 건 없으세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하려다 어째 모양새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물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먹을게. 너 지금 완전 영화관 직원 같아.”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알았어. 팝콘 있어?”
“네, 있어요.”
팝콘은 여러 가지 맛이 종류별로 있었는데 캐러멜 맛이 제일 입에 맞아서 이것만 집어 먹다가 아차 싶어 정우진에게 내밀었다.
“너도 좀 먹어.”
“맛있어요?”
“어, 맛있어. 영화관에서 팝콘 먹으면 엄청 맛있지 않냐? 평소에 사 먹으면 그냥 그런데 영화관에서 먹으면 왜 이렇게 맛있지?”
집에서 영화를 볼 때도 편의점에서 팝콘을 사 와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뭔가 이런 맛이 아니었던 기억이 났다. 똑같은 음식도 장소에 따라서 맛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나 보다. 분위기 때문인가?
나는 정우진이 내가 먹던 팝콘을 하나 집어 입에 넣는 걸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살짝 미간이 구겨졌다가 펴지는 걸 발견했다.
“맛있네요.”
“…….”
별로 안 맛있어 하는 거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진짜 맛있는 거 맞아?”
“네?”
“진짜…….”
그때 직원이 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쟁반 안에는 접시에 담긴 오다리가 있었다.
“선배님, 이것도 드셔 보세요.”
직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마자 정우진이 내게 접시를 내밀었다. 사실 보기 전까지는 그다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냄새를 맡으니 견딜 수가 없었다. 버터에 구운 오징어 냄새는 너무 사기였으니까…….
일회용 장갑을 끼고 오징어 하나를 먹자 고소하고 적당히 짭짤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야, 진짜 미쳤다.”
“정말요?”
“너도 먹어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살짝 입을 벌렸다.
“……?”
“…….”
분명 내 표정이 변하는 걸 봤을 텐데도 정우진은 뻔뻔하게 계속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잠시 주춤하다가 그냥 오징어 하나를 집어서 정우진 입에 넣어 줬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보는데 이번에는 구겨지지 않았다.
“와, 진짜 맛있다.”
“그치? 이거 맛있다니까.”
“다음에는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만들어 주든 말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우진이 혹시 또 먹여 달라고 입을 벌릴까 봐 나는 얼른 장갑을 벗어 건네며 말했다.
“이거 너 다 먹어.”
“네?”
“난 많이 먹어 봐서 괜찮아. 근데 여긴 사람이 왜 이렇게 없냐?”
다시 허리를 비틀어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는데 정우진이 내가 준 장갑을 손에 끼지도 않고 그냥 덜렁 든 채로 말했다.
“다른 사람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냥 빌렸어요.”
“빌렸다고? 영화관을?”
“네…….”
대답하는 목소리에 어쩐지 별로 힘이 없어 보였다. 정우진은 오다리 접시를 다시 트레이 위에 올려 두는데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영화가 시작하려나 보다.
“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정우진이 내 귀 쪽으로 얼굴을 바짝 붙이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여긴 사람도 우리밖에 없는데 굳이 이렇게 작게 말할 필요가 있는 건가? 그게 좀 의문이었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영화가 나오기 전에 광고 몇 개가 나왔는데 그걸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정우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거 제목이…….”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흠칫 놀라자 어둠 속에서도 정우진이 웃고 있는 게 확실히 보였다.
왜 앞을 안 보고 날 보고 있는 거지? 혹시 입에 뭐 묻기라도 했나 싶어서 티슈로 닦으며 물었다.
“이거 제목이 뭐라고?”
“네? 아……. 음, 새벽 아침?”
왠지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라 그것도 이상했지만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내가 입을 닦은 티슈를 가져가 트레이 위에 두는 걸 보며 다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쟤는 내 수발을 들러 온 건가? 아까부터 좀 심한 것 같아서 이제는 부담스러운 걸 넘어서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거북함은 스크린에 대문짝만하게 뜬 표시에 더욱 극대화되었다.
“……야, 이거 청불이야?”
“어……. 그러네요.”
“뭐?”
“저도 몰랐어요.”
“뭘 몰라? 네가 보고 싶었던 거라며?”
예매도 자기가 해 놓고 청불인 걸 모를 수가 있나?
“잔인한 건가?”
“로맨스라고 하던데.”
“뭐?”
“로맨스……. 로맨스가 아마 맞을 거예요.”
“…….”
정우진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걸 보며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보고 싶던 영화 맞나?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커먼 남자 둘이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서 청소년 관람 불가 로맨스 영화를 보는 게…….
“…….”
이게 진짜 맞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