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90)

40화

너무 나만 말을 많이 했나 싶어서 좀 머쓱해졌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 가냐?”

“일단 근교로 나가고 있어요.”

“아…….”

고개를 끄덕이다가 컵에 남은 얼음을 마저 먹었다.

좀 더 그렇게 이동하다 보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라 창밖을 구경했다.

“바다 진짜 오랜만에 오네.”

“저도요. 휴게소 있으니까 거기에서 잠시 내릴까요?”

“그래.”

도대체 드라이브 같은 걸 왜 하나 했더니 그냥 가만히 앉아서 풍경 구경하는 것도 의외로 마음의 안정이 됐다. 이래서 사람들이 차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나 보다.

나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서 모르겠지만 운전하고 있는 정우진은 좀 힘드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슬쩍 옆을 바라보는데 새삼스럽게 다시 놀랐다.

진짜 쟤는……. 그냥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 나와도 들킬까 말까 한 마당에 뭘 저렇게 꾸미고 나온 거야. 아니면 혹시 뭐 비행기 처음 타는 사람한테 신발 벗고 타라고 장난치는 것처럼 그런 거에 당했나?

영화관 갈 때는 드레스 코드에 맞춰서 한껏 꾸며야 한다고…….

내가 계속 쳐다보자 시선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힐끗 나를 바라봤다.

“덥지는 않아?”

“네, 더위 잘 안 타서 괜찮아요. 더우세요?”

“아니, 나도 괜찮아. 그래도 휴게소에서 내릴 때 재킷은 벗자. 넥타이도 좀 풀고…….”

그럼 그나마 개미 눈곱만큼은 덜 튀겠지…….

“다음에는 그냥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올게요.”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궁금해져서 물었다.

“근데 왜 그렇게 꾸미고 나온 거야?”

“선배님이랑 처음 영화 보러 가는 거라서 좀 들떴나 봐요.”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어서 그런 건 아니지?”

“이상한 소리요?”

의아해하는 걸 보니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래, 영화 보러 처음 가는 건데 들뜰 수도 있지. 꼭 소풍 가기 전날 들떠서 밤을 새고야 마는 어린애 같기도 해서 좀 웃겼다.

휴게소에 도착해 구석에 주차를 한 후 정우진이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셔츠의 단추도 두 개 정도 풀었지만 조금 전과 크게 달라진 거 같지는 않았다. 머리 뒤에서 비치던 후광이 한 1센티미터 정도 줄어든 정도의 차이랄까…….

“혹시 여기에 모자 파나? 모자랑 선글라스도 좀 살까?”

“네, 마스크는 가지고 왔어요.”

“그래, 일단 나가 보자. 그래도 사람이 엄청 많지는 않네.”

대강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크게 기지개를 폈다.

“여기 바닷길 따라서 걸을 수 있는 산책로도 있다고 하던데 그쪽으로 가 볼래요?”

“그래, 뭐 먹을 것도 좀 살까? 걸으면서 먹을 수 있게.”

“네, 좋아요.”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자 여러 먹을거리들을 파는 식당가가 나왔다. 그리고 한쪽에는 모자와 선글라스, 인형처럼 잡다한 걸 파는 곳이 보여 일단 그쪽으로 갔다.

“야, 근데 선글라스가 너무……, 좀 장난감처럼 생기지 않았냐?”

모자는 그래도 그냥 평범한데 선글라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테가 굉장히 두껍고 색깔도 오색찬란한 게 어린이용인 듯했다. 그중에서 가장 무난한 걸 찾아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새카만 캡 모자를 쓰고 나를 불렀다.

“선배님, 이거 어때요?”

“괜찮네. 그거 사.”

“선배님은 안 사세요?”

“나도? 나도 모자 쓰라고?”

난 모자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살까 싶어지기도 했다. 그때 정우진이 자기가 쓰고 있는 똑같은 모자를 가지고 와 머리에 씌워 줬다.

앞쪽의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니 그냥 무난했다.

“제가 사 드릴게요. 이거 하나 사세요.”

“아니야, 집에 모자 많아. 야, 근데 선글라스는…….”

“오메, 세상에. 혹시 연예인이에요?”

그때 옆에서 우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한 아주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유명한 연예인이에요? 아니, 너무 훤칠해서 연예인인가 보다 했는데, 맞았네!”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걸 보니 우리가 누군지는 모르는 듯했다.

“모자 그거 사실 거예요? 두 개 사시면 천 원 깎아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선글라스도 하나 살 거예요.”

“두 개요. 선배님도 하나 사세요.”

“아니, 난 안 살 거야.”

그때 뒤에서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덧붙였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선글라스를 쭉 둘러보더니 테가 붉은색인 아주 화려한 선글라스를 빼서 내 얼굴에 씌워 주며 말했다.

“이거 되게 잘 나가는데.”

“아……. 이런 거 말고 좀 안 튀는 건 없어요? 무난하고 평범한…….”

“그럼 흰색은 어때요? 검은색도 있긴 한데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

그러니까 그런 너무 평범한 걸 찾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계속 화려한 걸로만 골라 줬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보여 줬는데, 막 금색으로 문양이 있다든지, 선글라스 다리에 큐빅이 잔뜩 박혀 있다든지……. 그런 것밖에 없었다.

이런 걸 보니까 차라리 테가 흰색이기만 한 게 제일 무난해 보여 결국 그걸로 사 버렸다.

나는 살 생각이 없었는데 어찌나 언변이 화려한지 정신없이 홀려서 다 사 버리고 말았다. 정우진과 똑같은 모자를 쓰고 테가 흰색인 선글라스까지 끼자 모습이 가관이었다.

거울을 보며 허탈하게 웃고 있는데 정우진도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거울을 가만히 보더니 세팅되어 있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자 머리가 풀리면서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지금 정우진은 흰색 셔츠에 목깃 단추를 풀고 검은색 슈트 바지, 그리고 검은색 구두를 신고 거기에 검은색 캡 모자를 썼다. 게다가 두껍고 하얀 테의 선글라스를 끼고 마스크까지 했는데도 생각보다 이상해 보이지가 않아서 황당했다.

“알감자 드실래요?”

점검을 끝낸 건지 정우진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그래, 휴게소에서는 알감자지.”

“선글라스 왜 벗으세요?”

“난 괜찮아. 어차피 알아볼 사람도 없고.”

“그래도…….”

“너나 잘 쓰고 다녀.”

선글라스 안쪽으로 살짝 정우진의 눈이 보였지만 얼굴이 전부 가려진 상태라 표정이 어떤지 알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알감자와 소시지, 그리고 마실 것을 사서 산책로 쪽으로 걸었다.

사람들이 많지도 않았고, 있어도 대부분 나이가 든 어르신들이라 우리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해 다행이었다.

“알감자 엄청 오랜만에 먹는다.”

“전 처음 먹어 봐요.”

“진짜? 이걸 처음 먹어 본다고?”

“네, 감자는 먹어 본 적 있는데 이렇게 작은 감자는 처음이에요.”

얜 영화관도 한 번도 안 가 봤다고 하더니 알감자도 처음 먹어 보고……. 나는 혹시나 싶어 손에 들고 있던 소시지를 내밀며 물었다.

“이것도 처음 먹어 봐?”

“아니요, 이건 먹어 봤어요.”

그 말에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내가 내민 소시지를 한 입 먹어 버렸다.

“야, 내 건데 왜 먹어.”

“저 먹으라고 내민 거 아니었어요?”

“아닌데? 네 거 있잖아.”

“그럼 선배님도 제 거 한 입 드세요.”

정우진이 내미는 소시지를 진짜 한 입 먹을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됐고, 이것 좀 들어 봐. 알감자도 먹게.”

손에 마실 것과 소시지를 들고 있어서 알감자를 먹을 수가 없었다. 정우진은 금방 들어 주려 하다가 멈칫하고 자기 소시지를 입에 물고 이쑤시개로 알감자를 찍어 내 입에 댔다.

“…….”

“…….”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에 소시지를 물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질 못했다. 근데 그냥 손이 모자라 먹여 주는 건데, 또 혼자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알감자를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웃으며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먹는 알감자는 진짜 엄청나게, 존나 맛있었다. 포슬포슬하고 부드러운 감자의 맛과 고소한 버터 향의 조화가 정말 끝내줬다.

“하나 더 살걸.”

“제가 지금 빨리 가서 하나 더 사 올까요?”

“아니, 됐어.”

감자를 더 먹고 싶은데 또 정우진이 자기가 먹여 준다고 할까 봐 나는 얼른 손에 들고 있는 소시지를 먹어 버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다 먹은 막대를 버리고 알감자를 먹으려고 하는데 아직 소시지를 반도 먹지 못한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저도 감자 하나만 주세요.”

그 말에 멈칫했지만 고작 감자 따위가 뭐라고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이상해서 그냥 하나 찍어서 먹여 줬다.

“맛있다.”

“…….”

입 안에 감자를 잔뜩 넣고 함박웃음을 짓는 정우진을 보니 갑자기 좀 측은지심이 생겨서 물었다.

“더 줄까?”

“네.”

이렇게 맛있는 알감자도 못 먹어 보고, 얘는 도대체 돈을 그렇게 벌어서 다 어디에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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