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90)

39화

도대체 누가 비밀 연애를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왜 우리 사이에 그런 엉뚱한 단어를 쓰는 거지?

내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은 혼자 신 나게 떠들고 있었다.

“막 몰래 다니고 그러는 게 좀 비슷하지 않아요? 선배님이 계속 혼자 나가셔서 차 안에서 기다리는 거 심심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

“나중에 영화관도 몰래 들어갈 텐데 그땐 정말 안 들키게 조심히 들어가 봐요. 재미있겠다.”

“…….”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고민하다가 일단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빨대를 입에 물고 계속 빨아 먹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게 물었다.

“목 많이 마르셨어요?”

때마침 커피를 다 마신 건지 공기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크게 났다.

“편의점 들를까요? 아니면 카페 다시 찾아볼까요?”

“아니, 괜찮아. 얼음 먹으면 돼.”

“편의점 보이면 잠시 내려서 물이라도 사 올게요.”

“아니야, 됐어. 괜찮아.”

컵 뚜껑을 열어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 씹다 보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기도 했다.

“호두파이는 안 드세요?”

“어, 나중에.”

“고구마라테 제 거 드셔 보실래요? 저번에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괜찮아.”

쉬지 않고 물어오는 질문에 계속 단답형으로 대답하니 정우진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등 뒤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지 않나?

정우진이 원래 좀 성격이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이거는 뭔가……. 내가 너무 유별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닌 것 같다가도 다시 이상해지고,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가도 뭔가 긴가민가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이 계속 반복됐다.

아니야, 그래도 정우진은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혼자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아, 선배님.”

“어?”

불안한 눈으로 앞만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하자 정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나오기 전에 잠시 대표님이랑 통화했는데 미팅은 이번 주 안으로 잡힐 거 같다고 하셨어요.”

“아, 그래?”

그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까는 눈빛도 좀 이상한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평소랑 똑같았다.

“사전 미팅하기 전에 피디님이 선배님이랑 만나서 얘기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던데…….”

“피디님이? 무슨 얘기?”

“그날 있었던 일 사과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촬영하려면 그래도 며칠은 같이 지내야 하는데 저도 그냥 넘어가는 것보다는 짚고 넘어가야 할 건 서로 대화로 풀고 진행해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사과라니? 의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4년이면 짧지 않은 시간이고, 그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이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많았지만 사과를 받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보통 사과를 해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받고 그랬었는데…….

“혹시 부담스러워서 그러신 거라면 그냥 만나지 마세요.”

“뭐?”

내 침묵의 의미를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야, 그래도 만나자고 먼저 말씀해 주셨는데 어떻게 안 만나. 그리고 부담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의외라서 그런 거야.”

“당연히 사과 받으셔야죠. 보통은 그런 식으로 당일에 통보하지 않잖아요.”

“당일은 아니었어. 전날이었지……. 근데 매니저 형이 미팅 가는 차 안에서 나한테 말해 줬던 거고.”

“당일이나 전날이나 그게 그거예요.”

크게 차이가 없는 건 맞지만 어쨌든 이미 다 지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다시 하기로 했고 따로 만나서 사과도 해 준다면 더 이상 이 일을 문제 삼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정말 사과를 하는 건지 아닌지, 만나 봐야 알겠지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길가에 사람들이 보였다.

“…….”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사실 일하면서 옳고 그른 걸 따지기가 너무 힘들었다.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감내해야 할 때가 너무 많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그게 잘못된 거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늘 생각했지만 사실은 좀 무섭기도 했다.

내가 참지 못하고 뱉어낸 말 한마디나 행동 때문에 회사가, 그리고 우리 멤버들까지 다 싸잡혀서 함께 밑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이제 데뷔하기 전처럼 성격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만 살 수가 없었다. 할 말을 참고, 그냥 죄송하다고 하고, 모르는 척, 못 들은 척 웃고…….

그러면서 살다 보니까 그냥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당연하게 됐다.

이번 일도 나는 정우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 없다고,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런 거라고 그냥 포기하고 자기 합리화하며 넘어갔을 것이다.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겠지만…….

“…….”

지금 드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지만 나는 정우진이 고맙기도 하고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면서 당해 왔던 많은 일들이 새삼 부당하다는 걸 다시 깨달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너 내가 어떻게 데뷔했는지 알아?”

한참 창밖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는데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롯데리아에서 야간 아르바이트하다가 스카우트당한 거 아니에요?”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내가 멀뚱멀뚱하게 보자 앞을 향하고 있던 정우진이 힐끗 나를 쳐다봤다.

“아니에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선배님 라이브 방송 하실 때 들었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라방을 한 게 언제였더라. 군대 가기 전이니까 2년도 넘은 건데……. 정말 모르는 게 없구나.

“원래 난 되고 싶은 것도 없었고 딱히 꿈도 없었거든. 그냥 돈이 많이 필요해서 계속 아르바이트만 했는데 어떤 날은 웬 아저씨가 다가와서 아이돌 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러는 거야. 뭔 술 취한 놈이 이상한 헛소리하는 거 같아서 생각 없다고 됐다고 했는데도 자꾸 말 걸고…….”

“…….”

“새벽에 손님도 별로 없어서 그냥 대충 대꾸해 주면서 내 이름도 말하고 나이도 말하고 다니는 학교까지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된 거야. 그러니까 그 아저씨가 나보고 자기도 강씨래. 같은 강씨니까 같이 일해 보자는 거야. 자기가 책임지고 키워 주겠다고.”

같은 강씨라는 말에 좀 혹했던 걸 떠올리니 웃음이 나왔다. 나도 정말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았다.

“아이돌 되면 돈 많이 벌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때 대표님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니요, 그건 못 들었어요.”

그래, 나도 이 얘기는 멤버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때 대표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 있게 말했던 걸 떠올리며 똑같이 따라 했다.

“내가 이 건물 사게 해 줄게.”

“…….”

“위층은 학원가였고, 1층이랑 2층이 롯데리아였거든. 건물이 몇 층까지 있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꽤 높은 건물이었어. 지하도 있었고.”

망망대해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 것 같던 당시의 나에게 그 말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연예인이 돈을 많이 번다는 걸 어렴풋 알고 있기도 했었고…….

결국 나는 그 말에 홀려서 팔자에도 없던 아이돌 연습생이 된 것이었다.

“상가 건물 가지고 싶으세요?”

“그건 왜?”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중국집 가서 짜장면 사 주겠다는 말투로 가볍게 말했다.

“제가 사 드릴까요?”

그 말에 나는 푸핫 하고 웃어 버렸다.

“이제 안 속지.”

“정말이에요.”

“너 강이는 어떻게 데뷔하게 됐는지 알아?”

“…….”

내가 대놓고 무시하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게 보였다.

“걔는 내가 일하는 롯데리아에 엄청 자주 왔었거든. 같은 건물 학원에 다니기도 했고, 근처에 독서실도 있고 아파트도 있어서……. 근데 걔가 어렸을 때부터 덩치가 엄청 컸어. 그래서 단골이기도 하고 양이 좀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세트 시키면 감자튀김을 엄청 많이 줬단 말이야.”

“건물 진짜 사 줄 수 있는데…….”

“대표님이 강이도 눈여겨보고 있었는지 명함도 주고 막 그러는 걸 봤는데 그때 강이가 엄청 매몰차게 거절했거든? 완전 무슨 도를 아십니까 보듯이 하면서 극혐했는데 어느 날은 나랑 대표님이 대화하고 있는 걸 봤나 봐. 그러더니 불고기 버거랑……. 아, 걔가 불고기 버거를 좋아해. 아무튼 그거 다섯 개를 세트로 시키면서 나한테 엄청 작은 소리로 형도 조심하라면서 그러는 거야.”

그때 제법 진지하던 김강이 떠올랐다. 단골이기는 했지만 우리가 딱히 사적인 이야기를 하던 사이는 아니었는데 처음으로 주문이 아니라 다른 대화를 한 것이었다.

“그때 난 이미 계약한 상태라서 그거에 대해서 걔한테 말을 해 줬거든. 그 이상한 아저씨는 사실 아이돌 기획사 대표고 나는 연습생이 됐다고……. 그러니까 갑자기 강이가 그거 재밌냐고 하면서 자기도 한 번 해 보겠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같이하게 됐어. 신기하지?”

“…….”

“그래서 가끔 강이한테 미안하기도 해. 우리가 좀…… 다사다난했거든. 데뷔하기 전부터 데뷔하고 난 다음까지……. 언제는 걔한테 왜 그때 갑자기 하려고 했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감자튀김 많이 주는 사람이라서 평소에도 좋아했었대. 그래서 그냥 같이하고 싶었대.”

혼자 그때 일을 떠올리며 주절주절 떠들다가 문득 정우진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