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영화를 보기까지 시간도 너무 많이 남았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정우진이 바라는 대로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일단,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호두파이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맛있어서 엄청 유명해졌다고 한다.
한참 가고 있는데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정우진이 내게 뜬금없이 물었다.
“선배님, 샴푸 뭐 쓰세요?”
“샴푸?”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도 정우진이 샴푸에 대해 물어봤던 게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슴 쪽 옷자락을 들어 냄새를 맡다가 말했다.
“아마 홈플러스에서 세일할 때 샀던 거 같은데……. 어제도 물어보더니 샴푸는 왜?”
가격도 싸고 엄청 흔한 거라 사실 냄새가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샴푸였다. 그냥 일반 샴푸들처럼 평범한 냄새에 딱히 향이 오래가지도 않는 거 같은데.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차를 출발시키며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선배님한테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나는 거 같아요.”
“…….”
태연한 말에 순간 등 뒤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르르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가볍게 몸을 떨었다. 원래 저런 애라고 생각하려 해도 아무런 면역이 없는 상태에서 들으니 좀 버겁기는 한 말투였다.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바디 워시는 뭐 쓰세요?”
“몰라, 그것도 선물 세트 받을 때 안에 있던 거라…….”
그러고 보니까 정우진을 만날 때 샤워를 하고 만난 적이 많았다. 대부분 연습실에 있다가 숙소에 가서 씻고 나오면 바로 차에 탔으니까……. 그래서 어쩌면 정우진이 더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샴푸를 샀던 때가 떠올라 말했다.
“샴푸는 아마……. 세일할 때 두 통에 구천 원이었나? 보라색이랑 분홍색이랑 하얀색이었는데……. 지금은 하얀색 쓰고 있어. 숙소에 안 뜯은 거 있는데 그거 하나 너 줄까?”
“네?”
“새 거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정우진이 힐끗 나를 보고는 다시 앞을 보며 잠시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입을 열었다.
“샴푸를요?”
“어, 하얀 거 하나 남아 있을 걸?”
“정말요? 저 줘도 돼요?”
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조금 안심해 버렸다.
“당연히 되지. 그게 뭐 별거라고.”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그럼 저도 선배님한테 선물 줘도 될까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마음대로 해.”
정우진은 무슨 샴푸를 쓰는지 모르지만 난 원래 옛날부터 그냥 아무거나 썼기 때문에 딱히 뭘 쓰든 상관은 없었다. 샴푸를 줄 건지, 바디 워시를 줄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든 괜찮았다.
샴푸 얘기를 하는 사이 호두파이 집에 도착했다. 나는 날 따라 내리려는 정우진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내가 사 올 테니까 여기에 있어.”
“같이 가면…….”
“너무 튀어서 안 돼.”
내 단호한 말에 정우진은 아쉬워했지만 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지갑을 들고 차에서 내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손님이 가득했다. 카운터에서 호두파이 큰 거 하나랑 내가 마실 커피와 정우진이 마실 따뜻한 고구마라테를 한 잔씩 주문했다.
종이 캐리어에 음료를 담고 호두파이는 종이 박스, 티슈와 일회용 친환경 나무 포크, 나이프까지 챙겨 주는 걸 받아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우진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한 번 본 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안 건지 자동차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 결국 들켰네…….
하긴 들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아무리 차에 선팅이 되어 있다고 해도 안이 조금은 보일 거고, 일단 저 슈퍼 카 자체가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안에 누가 타고 있든 구경거리가 되기는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근처 대기 의자에 앉아 정우진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일단 너 먼저 가고 좀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만나자]
손에 든 짐이 많아 문자를 쓰는 속도가 좀 느렸지만 어쨌든 다 써서 보내기는 했다. 전송을 하자마자 가게 문이 열리면서 딸랑 하고 맑은 종소리가 났다. 그리고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는 설마설마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안 나오세요?”
“…….”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라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내 손에 있는 종이 캐리어와 호두파이를 담은 박스를 가지고 가더니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을 잡고 가게를 나섰다.
나는 정우진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아니, 사실 끌려가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지금 내 심정이 그랬다.
아무튼 그렇게 시커먼 슈퍼 카에 넋이 나간 얼굴로 타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래서 하마터면 안전벨트 하는 걸 잊을 뻔했다. 차에 타자마자 내게 안전벨트를 해 주려고 하는 정우진의 팔을 밀어내고 재빨리 벨트를 했다.
정우진이 좀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봤지만 나는 최대한 정우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 일단 외곽 쪽으로 빠질까요?”
“그래, 어디든 가자.”
“네.”
어딘지 모르게 신이 난 것 같은 목소리에 갑자기 황당해져서 내가 피식 웃자 정우진이 시동을 걸며 물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냥 웃겨서.”
도대체 정우진은 왜 영화 보러 가는데 저렇게 입고 나온 걸까? 불편하지도 않나? 그리고 원래 어디 다닐 때 주변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인 건가? 내가 지금 이상한 건가?
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어느새 바글바글하게 모였던 사람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달려 인파가 많은 곳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정우진에게 물었다.
“왜 나왔어?”
“선배님이 다시 들어가시길래……. 혹시 무슨 일 생겼나 해서요. 왜요?”
근데 또 그 말을 들으니까 딱히 놀랄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뭐 차 타고 밖에 나와서 호두파이 사는 게 범죄도 아니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꼭 마스크 쓰고 숨어 다녀야 한다는 법도 없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정우진을 숨겨서 다니려고 했던 것 같았다.
괜히 머쓱해져서 고구마라테에 홀더를 끼워 정우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식기 전에 마셔.”
그리고 내 커피도 마시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새삼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이거 마시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너 저번에 이거 마셨잖아.”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닌데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정우진이 어딘지 모르게 잔뜩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걸 기억하세요?”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야, 그걸 잊어버리기가 더 힘들지 않냐? 그날 너 커피 마시다가 뿜었잖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던 정우진이 내 말에 별안간 수치스러워하는 얼굴로 정색을 했다.
“그건 잊어주세요…….”
그걸 보니 또 웃겨서 그만 기가 막히고 말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커피 마시다가 쓰다고 울지를 않나, 맛이 이상하다고 내 얼굴에 뱉지를 않나……. 너무 희귀한 경험이라 아마 평생 못 잊을 것 같았지만 더 놀리자니 필사적으로 정색하고 있는 얼굴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해서 그냥 이쯤 하기로 했다.
“선배님, 근데 저랑 같이 다니는 거 좀 별로예요?”
그때 정우진이 의미 모를 질문을 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자꾸 저한테 기다리라고만 하시길래……. 아까 카페에서도 제가 데리러 갔을 때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요.”
기다리라고 한 건 정우진이 워낙 유명하니까 그냥 내가 빨리 갔다 오는 게 편해서 그랬던 거고, 아까 카페에서는 그냥 당황해서 그런 건데 정말 독특한 쪽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아니야, 별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그랬던 거지. 아까 카페에서도 그렇고…….”
“알아보는 게 왜요?”
“어?”
“우리가 지금 나쁜 짓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좀 알아봐도 괜찮지 않아요?”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이 혹시라도 불편한 일이 생길까 봐 그랬던 거지,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다. 내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 걸 본 건지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그럼 안 좋은 건 아닌 거죠?”
“당연하지.”
그 물음에 급하게 대답하자 정우진이 활짝 웃었다.
“다행이다. 근데 이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뭐가?”
“비밀 연애 같기도 하고.”
“…….”
이상한 단어 선택에 나는 또다시 눈앞이 아득해지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