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90)

37화

나는 잠시 내 몰골을 본 뒤 말했다.

“아니, 지금 땀을 너무 흘려서 좀 씻고 가야 될 거 같은데……. 너 근데 영화관 가도 괜찮겠어?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거 아니야? 마스크 쓰고 안경 끼고 모자 써도 그냥 보면 나 연예인이에요, 하는 티 다 나던데.”

솔직하게 느낀 심정을 말하자 정우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나를 안심시켰다.

-불 꺼지면 들어갔다가 불 켜지기 전에 나오면 돼요.

“그래? 일단 알겠으니까 나 좀 씻고 다시 연락할게.”

-네, 그럼 표는 제가 예매해 둘게요. 씻고 연락해 주세요.

“알았어.”

전화를 끊고 연습실로 들어가자 아까 좀비 같은 애들은 어딜 갔는지 다들 가자미눈을 뜨고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뭘 봐.”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의문스런 표정으로 묻자 갑자기 이진혁이 애들을 보며 말했다.

“얘들아, 그냥 모른 척해 주자. 형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뜻 모를 말을 하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찡긋 윙크를 했다. 그리고 파이팅 하는 제스처까지……. 가만 보니까 아무래도 내가 나갈 때 핸드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나 보다.

괜히 아니라고 역정을 내기도 뭣해서 그냥 한숨만 내쉬고 마는데, 가만히 있던 유노을과 김강마저 말없이 내게 윙크를 하고 동시에 파이팅을 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표정이라 결국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

“데이트 아니라고…….”

“엥? 아무도 데이트라고 안 했는데 왜 혼자 갑자기 데이트라고 하지?”

“찔리쥬? 들켰쥬?”

“도둑이 제 발 저리쥬?”

셋이서 아주 작정을 했는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장난기가 많아서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이건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초등학생 세 명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 더 이상 아니라고 하기에도 지쳤다.

나는 대충 짐을 챙겨 나가며 말했다.

“그래, 그래. 데이트하러 간다, 가.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영화도 보고 올게. 외박할지도 모르니까 먼저 자라.”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자 이진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외박 안 돼!”

“뭐? 그럼 나도 외박할래!”

“안 된다고!”

이진혁이랑 유노을이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뒤로한 채 연습실을 벗어났다.

***

숙소로 돌아와 씻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그냥 손에 잡히는 흰색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도 탈탈 털어 대충 말리고 운동화를 신으면서 정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나 이제 나가는데 어디로 갈까?”

-아, 저 지금 숙소 앞이니까 그냥 나오세요.

“어? 아, 어어. 알았어.”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왔지? 혹시 몰라 마스크도 챙겨서 밖으로 나왔는데 늘 정우진이 이곳에 오면 주차해 두던 곳에 차가 보이지 않았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와 두리번거리자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고개를 돌리자 골목 바깥쪽에서 정우진이 혼자 발광하고 있는 것 같은 외제 차의 창문을 내리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모습에 잠시 주춤하다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조수석에 타며 물었다.

“왜 여기에…….”

하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머리 다 안 말리고 나오셨어요?”

“…….”

정우진의 몰골이……. 아니, 자태가…… 너무 연예인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연예인이 맞긴 한데, 이건 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꾸몄는지 혼자 연말 시상식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얘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그럴 게 ‘나 비비 센터 세가온인데 지금부터 영화관 가서 영화 볼 거다.’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선배님?”

내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순진무구함이 가득한 목소리에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혀서 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너……. 그러고 갈 거야?”

“네?”

“이러고 영화 보러 갈 거야?”

내 말에 정우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곧 말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순식간에 풀이 팍 죽었다.

“왜요? 이상해요?”

“아니……. 너무, 좀……. 너무…….”

당연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상한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멀쩡해 보이지도 않는 게 문제였다. 옷도 멋있고 머리도 멋있긴 한데……. 이 새끼 넥타까지 했잖아…….

나는 정우진의 엄청난 모습을 위아래로 훑다가 장기를 팔아도 못 살 것처럼 비싸 보이는 재킷의 끄트머리를 살짝 잡으며 물었다.

“이건 혹시 협찬 받았니?”

“아니요, 제 건데……. 많이 튀어요?”

“…….”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묻는 불쌍한 모습에 나도 어지간해서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 까만 공작새 같아.”

“선배님, 공작새 좋아하세요?”

“…….”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으며 묻는 정우진을 보자 나는 다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작새가 아니라…….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내 말은…….

하, 말을 말아야지.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좋긴 하지?”

사실 공작새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실제로 본 적도 없어서 더 그랬지만, 정우진은 내가 공작새를 좋아한다는 말이 마음에 들기라도 했는지 꽃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처럼 웃는 것이었다.

“저도 좋아해요.”

“……아, 그래.”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차게 식은 표정으로 대답하다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아니, 난 지금 정우진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면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저도 선배님처럼 가볍게 입고 나올 걸 그랬어요.”

그 말에 혹시나 싶어 물었다.

“스케줄 있었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팔을 뻗더니 내 안전벨트를 해 주며 짧게 대답했다.

“아니요?”

“…….”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멈췄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다더니,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야.”

“우진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우진아.”

“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안전벨트를 해 준 다음 자세를 똑바로 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안전을 중시하는 건 알겠는데 나도 안전벨트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아……. 저는 혹시 선배님이 깜빡하셨을까 봐…….”

“앞으로 네 차에 타면 찍소리도 안 하고 제일 먼저 안전벨트부터 할게. 됐지?”

“……네.”

시무룩한 목소리였지만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뒤늦게 잔뜩 찌그러져 있던 몸을 펴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영화는 몇 시 걸로 예매했어?”

“오후 열 시요.”

“아, 열 시……. 뭐? 밤? 밤 열 시?”

내가 놀라서 되묻자 정우진이 순진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왜냐고 묻는 내가 이상해 보일 정도로 정우진은 우리가 밤 열 시에 영화를 보는 건 아주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뭐가요?”

“아니, 왜 그렇게 늦은 시간에 예매를 했냐고. 혹시 다 매진 떴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정우진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근데 왜?”

“저희 밥도 먹어야 하고……. 저번에 선배님 호두파이 맛있게 드신 것 같아서 거기서 또 그것도 먹어야 하고……. 또 드라이브 좋아하신다고 하셔서 잠깐 바람도 쐬고…….”

구구절절 말하는 정우진의 말을 듣다가 나는 천천히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

“…….”

앞으로 영화 시작하기까지 6시간 30분이나 남았다.

밥 먹고 카페를 가도 2시간이면 충분한데……. 남은 시간 동안 도대체 어디서 뭘 한단 말인가.

“선배님,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면 아까 애들이랑 밥을 먹어서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연습실에서 애들이랑 돈가스 시켜 먹어서……. 너 혹시 아직 점심 안 먹었어?”

시간이 시간인지라 당연히 점심은 먹은 줄 알았다. 정우진은 내 말에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근데 아직 생각이 없어요. 그럼 호두파이랑 커피 테이크아웃해서 드라이브라도 할까요?”

“…….”

또다시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도대체 드라이브는 뭔 드라이브지……. 애들이 자꾸만 데이트 어쩌고 장난을 치던 게 떠올라 눈앞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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