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전화를 끊자 조금 안정이 됐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어서 지금 내 상태를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에 설레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그냥 의미도 없이 거실을 빙빙 돌았다.
“뭐 해?”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이진혁이 안경을 쓰며 거실로 나오는 게 보였다.
“왜 벌써 일어났어?”
아직 이른 새벽이라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이진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기분은 좀 괜찮아?”
“기분?”
지금 너무 좋은데?
하지만 지금은 뭔가 그런 걸 묻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갑자기 왜?”
“아니, 형 어제 기분 별로 안 좋아 보이길래. 오늘은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
어제는 진짜……. 이런저런 일들이 전부 겹쳐서 정말 힘들긴 했었다. 숨긴다고 했는데도 다 숨겨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제의 일을 이진혁에게 전부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매니저 형이 미팅하러 가는 길에 내게 했던 말과 회의실에서 피디에게 들었던 말부터 시작해, 어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전부 보고하듯 말했다.
그리고 방금 정우진이 내게 했던 말까지.
모든 걸 다 듣게 된 이진혁은 내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날 보더니, 결국 물었다.
“그게 형 잘못도 아닌데 왜 비밀로 해?”
“비밀로 한 게 아니라 그냥 말할 타이밍이 좀 애매했던 거야.”
“타이밍이라고 할 게 뭐가 있어. 만약 오늘 세가온이 그런 말 안 했으면 언제 말하려고 했는데?”
뭔가 잔소리를 시작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이진혁이 더 뭐라고 하기 전에 양손을 공손하게 모아 아랫배에 대고 굽실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리더 님. 앞으로는 절대 비밀 따위 만들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하지 마.”
내가 계속 굽실거리자 이진혁이 주먹으로 내 어깨를 퍽 때렸다. 잘못 때린 건지 뼈에 맞아서 제법 아팠던 터라 엄살이라도 부릴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아무튼 개인적인 거 말고 일에 관련된 건 안 좋은 일 있으면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다 말해. 안 그러면 나도 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안 할 거니까.”
또 놀이터 가서 깡소주 나발 불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것도 그냥 관뒀다.
“알았어. 그냥 어제는 좀 다들 힘들어 보여서 그랬어.”
“어차피 오늘 힘들면 내일도 힘든 건 마찬가지니까 그냥 오늘 말해.”
“네, 형. 고마워요.”
“아, 좀. 하지 말라고!”
듬직한 리더 같은 모습에 감동 받은 표정으로 말하자 이진혁이 질색을 하면서 싫어했다. 그걸 보며 웃고 있는데 그늘진 어두운 곳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 씨. 깜짝이야.”
내가 화들짝 놀라자 이진혁도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유노을과 김강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무슨 작당을 부리고 있어?”
유노을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고 김강도 거들었다.
“왜 우리만 빼고 둘이 비밀 얘기 해?”
유치함이 폭발하는 질문이었지만 이참에 다 말해야겠다 싶어 나는 결국 거실에 애들 셋을 나란히 앉혀 두고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좀 전에 정우진이랑 통화했고.”
“아니, 진짜 짜증 나게 왜 자꾸 이랬다 저랬다야?”
유노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말했다. 김강은 내 말이 좀 충격이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나는 애들의 얼굴 한 번씩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시 하기로 했으니까 됐어. 이 일은 더 생각하지도 마.”
“이러다가 또 뭔 사정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말 바꾸는 거 아니야?”
“설마, 한 번은 그렇다 쳐도 두 번이나 그러면 완전 개놈 새끼들인데.”
유노을의 말에 김강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 말도 사실이긴 해서 나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 비비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비비랑 친한 게 아니라 정우진이랑 친한 거지.”
사실 다른 비비 멤버들이랑은 제대로 인사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니…….
“정우진은 같이 다녀보니까 진짜 괜찮은 애야. 오해하고 있었던 것도 있고.”
“무슨 오해?”
그 물음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를 향해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애들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착해.”
“착하다고?”
“어, 그리고 감수성도 풍부하고 엄청 섬세하고 좀 소심하기도 한데 예의도 바르고 엄청 깍듯해. 좀 애처럼 순수한 면도 있는 것 같고…….”
주절주절 떠들다 보니 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애들에게 정우진이 울었다는 얘기와 내가 정우진에게 했던 낯간지러운 말들은 따로 해 주지 않았다.
“아무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우진이 그렇게 말을 해 줘서 다시 할 수 있게 된 거야. 대표님이랑 피디님한테 그런 말하기 분명 힘들었을 텐데.”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했다.
“그건 그렇지……. 괜찮은 애가 맞긴 한가 봐.”
“오해가 있었네.”
“하긴, 제대로 얘기해 본 적은 없으니까…….”
그 말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꼭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고, 그 전에도 몇 번 만나서 밥도 먹고 카페도 가서 얘기하고 그랬는데 진짜 괜찮았어.”
“아……. 영화는 안 봤어?”
그때 김강이 어째서인지 머뭇거리듯,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왜 영화가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영화는 무슨 영화?”
“아니, 보통 코스가 그렇잖아.”
“코스?”
“데이트…….”
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김강의 어깨에 주먹을 퍽 소리 나게 날렸다. 김강은 주먹을 맞자마자 요란 법석을 떨면서 갑자기 거실 바닥에 낙법을 치고 한 바퀴 구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왜 저래…….”
“염병을 떨고 있네.”
이진혁과 유노을이 못 볼꼴을 본 것처럼 질색을 하길래 갑자기 김강이 불쌍해져서 혼자 짝짝 박수를 쳐 줬다.
***
네 명 다 스케줄이 없어서 같이 아침을 먹고 연습실로 갔다.
사실 딱히 숙제처럼 해야 할 일도 없고 굳이 매일 연습실에 나오지 않아도 됐지만 우리는 별일이 없으면 항상 이곳에 왔다. 기존에 있던 노래에서 안무를 창작해서 춤을 춰 보기도 하고 유노을은 요즘 이진혁에게 배워 작사 작곡도 하고 있었다.
오늘은 개인 연습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밥도 먹고 다 같이 군무에 맞춰 춤 연습도 한참 하다가 잠깐 쉬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막 노래가 끝난 참이라 숨을 헐떡거리면서 연습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정우진이 보낸 문자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제가 아까 전화하다가 잠들었나 봐요. 지금 일어났어요. 아침은 드셨어요? 점심은요? 오늘 괜찮으면 같이 영화 보러 가실래요? 저번부터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오늘 개봉했대요.]
“…….”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애들 눈치를 살폈다. 다들 초주검이 돼서 바닥에 엎어져 좀비처럼 으어어, 하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평소라면 별생각 없이 당연히 알겠다고 했을 텐데, 아침에 하필 김강이 그런 소리를 해서…….
근데 또 뭐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꼭 데이트하는 사람만 영화 볼 수 있나?
아니잖아.
꼭 데이트하는 사람만 밥 먹고 카페 갈 수 있어?
혼자 괜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선배님 전화해도 될까요?]
하여튼 얘는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한지 모르겠다. 문자 답장 조금만 늦으면……. 그래도 혹시 급하게 할 얘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늘 그랬던 것처럼 신호음 한 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왜?”
-뭐 하세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슬쩍 애들을 둘러봤다. 다들 기진맥진해서 내가 전화를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 지금 연습실. 영화는 어떤 거?”
연습실 문을 닫으며 묻자 정우진이 한껏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개봉한 건데 <새벽 아침>이라는 영화예요. 혹시 아세요?
“아니? 나 영화는 잘 안 봐서……. 그게 무슨 내용인데?”
제목만 듣고는 어떤 장르인지 알 수가 없어 물은 건데 갑자기 정우진이 조용해졌다.
“여보세요?”
-네? 아……. 어, 그게……. 혹시 스포 당할까 봐……. 자세히 찾아보지는 않았어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하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어차피 정우진이 이상했던 게 한두 번도 아니니 그냥 넘겨 버렸다.
“그래? 오늘 보러 갈 거야?”
-네! 지금 제가 데리러 갈까요?
조금 전 당황했던 건 온데간데없이 정우진은 마치 산책 나가자는 말을 들은 개처럼 활기 도는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