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다행이라는 생각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혹시 애들이 깰까 봐 도로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다시 미팅 날짜 잡아서 연락 주신다고 했으니까 곧 연락 올 거예요. 그날은 저랑 같이 가요.
“아, 그래. 같이 갈 수 있으면 같이 가도 되지.”
같이 가는 게 뭐 어렵다고, 백 번도 더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사정이 있어서 그만둔다고 했는데 못 들으셨죠?
“어? 매니저? 누구 매니저? 우리 매니저 형? 경우 형?”
이것도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그만뒀다고?
“무슨 사정? 아니, 이렇게 갑자기?”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어제 회사에 있다가 들었어요.
“우리한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급한 사정이 생겼다고 말릴 새도 없이 그냥 관둬 버렸대요.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안 좋은 일도 많았고 재수가 없던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데뷔할 때부터 같이 일했던 형인데 이렇게 말도 없이 갑자기 그만두다니.
나중에 점심때쯤에 연락이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 구할 때까지 우선 저희 매니저가 같이 움직일 거예요. 최대한 선배님 불편하시지 않게 잘 챙겨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혹시라도 뭐 거슬리는 거 있으면 저한테 꼭 말씀해 주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그냥 매니저 시키시고 매니저한테 말하기 어렵거나 곤란하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돼요.
“…….”
어나더 매니저 얘기를 왜 정우진이 해 주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말하는 게 꼭 기다렸다는 것처럼 술술 나와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정우진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어제 대표님이랑 피디님 계시는 자리에서 나온 얘기라 저도 들은 거예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린 건데……. 아마 자세한 얘기는 오늘 다른 분이 해 주실 거예요. 그때 좀 시간이 늦어서 아마 바로 전달이 안 됐던 거 같아요.
뭔가 변명하듯 하는 말에 여전히 의문점이 있었지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그렇구나 했다.
-아, 피디님은 프로그램 이야기만 하다가 먼저 일어나셔서 이런 개인적인 일은 모르실 거예요. 어제 미팅 가실 때 그 매니저랑 같이 가셨죠?
“어, 경우 형이랑 같이 갔었지.”
-다음에 가실 땐 저희 매니저랑 가시면 될 거예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우진이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사실 결정 난 건 어젯밤 열한 시쯤이었는데…….
“열한 시? 너 그 시간까지 회사에 있었어? 피디님이랑 대표님이랑 같이?”
-네, 빨리 말해 드리고 싶어서 계속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
작고 떨리는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고마운 마음인 건지, 아니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감성적인 대사 때문에 당황한 건지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밤새 기다리다가 해가 떴는데도 시간이 너무 이른 것 같아서 또 기다렸는데…….
“…….”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선배님께 문자 보냈는데 바로 답장해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아…….”
손등에 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갑자기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손톱을 세워 벅벅 긁으며 얘는 도대체 말투가 왜 이럴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다가 놀라서 물었다.
“너 설마 밤 샜어?”
-잠깐 자기는 했어요.
들뜬 목소리가 평소보다는 확실히 잠겨 있었다. 막 일어나서 그런 줄 알았는데 밤을 새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잠깐 자기는 했다는 말이 어째서인지 거짓말 같다는 확신이 들어 온갖 감정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정우진은 내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인간 유형이었다. 내 주변에는 이렇게까지 살갑고 섬세하고 소심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 없었다. 만약 정우진이 여자였다면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단지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나에게 호의적일 수가 있는 걸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호감을 가지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저 좋아해 주는 관계라는 게 정말 있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2년 넘게 컴백도 하지 않고 활동도 없는 가수를 아직도 좋아해 주고 기다려 주는 클래스가 떠올라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진짜…….”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모를 만큼 고마움이 너무 컸다. 정우진은 쉽게 말했지만 이 모든 과정들이 쉽게 이루어졌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나는 알고 있다. 특히 일을 하면서, 나와 상대방이 동등한 위치가 아닐 땐 더욱 힘들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만약 얘기가 잘 풀리지 않았거나 잘못됐다면 분명 자기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는 일이었는데 고작 만난 지 별로 되지도 않은……. 좋아하는 가수, 팬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해 주다니.
-선배님?
내가 한참 말이 없자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가슴속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속에 있는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마운 걸 고맙다고 제대로 말하지 않고 그냥 넘기기는 싫었다.
부끄럽고 민망하지만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애써 준 사람이었다.
“고마워.”
-별것도 아닌데요, 뭘.
“아니야, 진짜 고마워.”
내 진심 어린 말에 정우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수줍게 웃고 있을 얼굴이 눈앞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만약…….”
-네?
“만약 나중에 너한테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땐 내가 꼭 네 편이 돼 줄게.”
-……네?
살면서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도 없고, 대사는 삼류 소설에서나 나올 법했지만 이게 정말 내 진심이었다. 말하고 나니까 너무 민망해서 얼굴 쪽으로 열이 올랐다.
당장 창문을 열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나는 정신을 놔 버린 채 꿋꿋이 말을 이었다.
“아니……. 진짜 존나 오글거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냥 지금 내 마음이 그래……. 너무 고맙다, 진짜.”
-…….
“……진심이야, 진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너한테도 힘든 일이 생기면 꼭 도와줄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되는 게 하나쯤 있기는 할 거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정신이 없다 보니 자꾸만 말도 더듬더듬 나왔다.
한참이 지나도 정우진은 딱히 어떤 반응도, 말도 없어서 뭔가 급한 마음에 또 덧붙였다.
“맛있는 것도 사 줄게.”
-…….
“비싼 걸로…….”
고맙다는 말로만 때우는 건 아무래도 양심이 없는 것 같아서 말했지만 정우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혹시 전화가 끊겼나 싶어 핸드폰 액정을 확인해 봤지만 통화 시간은 1초씩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정우진?”
-…….
“우진아?”
정우진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내가 이름을 부를 때마다 떨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머쓱해져서 뒷목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그……. 아무튼……. 저거, 뭐야. 그, 미팅 날짜 다시 잡히면 그땐 같이 가자. 같이 가자고 했으니까…….”
-…….
“그래, 끊는다. 잠도 별로 못 잤을 텐데 쉬어.”
그렇게 말하고 끊으려는데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
지나가는 어린애가 들어도 우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우느라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걸 보니 울어도 보통 울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설마 울어?”
-아니요.
“너 목소리 지금 엄청 심각한데?”
-안 운다고요.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울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네가 울어?”
-선배님이 왜 울어요?
“아니, 감동 받아서 지금 울어야 할 사람은 난데 왜 네가 우냐고.”
-선배님이 안 우시니까, 흑……. 제가 대신 우는 거잖아요.
“…….”
이제는 울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통곡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나는 마치 정우진이 내 앞에 있는 것처럼 손을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토닥거렸다.
“왜 울어. 울지 마.”
-왜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뭘.”
-왜……. 그렇게,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뭐라고 웅얼거리고 있기는 한데 너무 울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시 물어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서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알았어. 일단 너 지금 잠을 못 자서 그래. 사람이 잠이 부족하면 얼마나 예민해지는 줄 알아?”
-저 지금 예민한 거 아니에요.
“알았어. 너 안 예민해. 일단 침대에 좀 누워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더니 잠시 후에 작게 말했다.
-누웠어요.
“침대에 누웠어?”
-네.
“이불 끝까지 덮고 제일 편한 자세로 누워. 그리고 눈 감고 가만히 있어 봐. 핸드폰도 내려 두고. 몸에 힘을 쭉 빼고 천천히 심호흡 열 번만 해.”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작게 대답하더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이 이불에 스치는 소리인가? 스피커폰으로 돌렸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귀를 기울이니 작게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
-…….
설마 진짜 자나?
내가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금방 잠이 든다고? 아니, 그래도 나한테 뭐라고 말은 하고 잠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황당한 얼굴로 핸드폰을 계속 귀에 대고 있다가 혹시나 싶어 5분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정우진이 완전히 잠이 든 걸 확신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