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일어나면 아침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 평소엔 눕기만 하면 곧바로 잠들어 최소 7, 8시간 정도는 자야 하루가 편안했는데, 요즘은 계속 잠을 별로 못 자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결국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거의 밤을 지새우고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유노을과 같은 방을 쓰고 있기 때문에 조심하며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여름이라 그런지 아직 새벽인데도 밖은 벌써 밝아 오고 있었다.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해야 애들이 좀 덜 속상해할까? 어제 그런 일도 있어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냥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기는 한데…….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의미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스팸 문자인가 싶어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미간을 구겼다.
문자가 온 건 정우진이었기 때문이다.
아직 6시도 안 됐는데 왜 이 시간에?
[선배님 주무세요?]
문자는 짧고 간결했다. 하지만 내용이 마치 새벽 두 시 전 남친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금 일어났는데 왜?]
문자를 보내니 금방 답장이 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문자가 온 걸 보니 답장을 뭐라고 보내야 할지 망설여졌다. 어제 속상한 일이 있어서 자는 둥 마는 둥 했다고 보내기도 뭐하고……. 그냥 일찍 일어났다고 쓰려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선배님 저랑 같이 프로그램 하는 거 정말 괜찮으신 거죠?]
“……?”
어제 이미 다 끝난 얘기 아니었나? 왜 또 이런 걸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의심이 많은 성격인가? 정말 괜찮다고 답장을 보내려는데 그사이를 못 참은 건지 정우진의 문자가 또 왔다.
[선배님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정말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하며 또 문자가 오기 전에 답장도 보내지 않고 그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한 번이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자다가 깬 건지 평소보다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다.
“어, 그래. 안녕. 전화는 왜?”
꼭두새벽부터 무슨 할 말이 있는 건지 궁금해서 묻는데 별안간 핸드폰 너머로 웃는 소리가 났다. 잘못 들었나 싶어 잠시 멈칫하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잘 주무셨어요?
“그냥, 뭐……. 넌?”
-저도요.
“아…….”
그리고 예고도 없이 침묵이 흘렀다.
분명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하자고 한 걸 텐데 정우진은 한참이나 별다른 말이 없었다. 결국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화는 왜?”
-네?
“전화는 왜 하자고 한 거야?”
-아……. 그냥…….
“뭐?”
-어, 그게……. 문자 보내기 팔 아파서요. 저 사실 문자 잘 안 보내서 글자 적는 거 엄청 느리거든요.
그 말에 나는 다시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느리다고? 그런 것치고 답장은 엄청 빨리 오던데?”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느리니까 문자는 엄청 짧게 보내잖아요. 막 빨리 보내고 싶은데 답답해서 쓰다가 생략하는 것도 많고…….
정우진이 통화를 할 때마다 폭탄처럼 쏟아 내던 질문을 떠올리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도 같았다.
“하긴, 네가 전화할 때 말하는 양을 생각하면 문자로 보내는 건 거의 묵언 수행이나 다름없긴 하다.”
내가 조용히 웃으며 말하자 핸드폰 너머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세요?
“아직 애들 자고 있어서. 지금 거실이야.”
-아……. 같은 방 쓰세요?
“어, 나랑 유노을이랑 같은 방 쓰고 진혁이랑 강이랑 같은 방 쓰고. 진혁이랑 강이 쓰는 방에 싱글 침대 두 개가 있어서 원래 내가 거기 쓰려고 했는데, 강이 덩치가 너무 커서 2층 침대에 누울 수가 없는 거야. 아, 내가 쓰는 방은 2층 침대 하나 있거든. 그래서 내가 아래층 쓰고 유노을이 위층 써.”
주절주절 떠들다가 문득 느낀 건데, 정우진에게 말 많이 하는 병을 옮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2층 침대요…….
“너 2층 침대 써 봤어?”
-아니요.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끼익, 끼익 소리가 좀 나거든? 근데 처음에 유노을이 그거 무섭다고 위에서 못 자겠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바꿔 줬는데 또 밑에 누워 있으니까 침대 무너지면 어떡하냐고 자꾸 징징거려. 그럼 바닥에 이불 깔고 자라고 하니까 그건 또 허리 아프다고 싫대. 그래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자리 바꾸고 있어.”
별것도 아닌 얘기를 길게 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던 정우진이 조금 전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불편하세요?
“불편하지. 근데 원래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면 불편한 게 당연한 거야. 서로서로 배려하면서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사는 거지.”
-그래도 많이 불편하시면 저희 집으로 오세요. 비는 방 많이 있어요.
“아, 월세도 안 받는다고 했지? 혹하네.”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오신다고 하면 가구도 새로 사 둘게요. 그리고 제가 데리러 갈게요. 선배님은 몸만 오세요.
1절만 해야 되는데 정우진은 항상 이게 문제였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어색하게 웃다가 말을 돌렸다.
“근데 전화는 진짜 왜 하자고 한 거야? 팔 아파서 그런 거 말고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새벽부터 연락이 온 거라면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 어제 대표님이랑 송철 피디님이랑 같이 이야기를 해 봤거든요.
“아……. 어제?”
-네, 선배님이랑 헤어지고 난 다음에 회사에 피디님이 오셔서 같이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선배님 얘기도 했거든요.
뭐지? 설마 게스트 출연도 안 된다는 건가? 아예 잘린 건가?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나서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선배님께 그런 중요한 얘기를 통보하는 방식으로 한 것도 너무 도리가 아닌 것 같고……. 생각해 보니까 포맷이 갑자기 변경된 거라 준비 시간도 촉박할 거 같다고 다시 원래대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거든요.
하지만 정우진이 말하는 내용은 내 걱정과는 무색한 이야기였다.
“…….”
-그래서……. 여보세요?
“어?”
-아, 아무 말도 없으셔서……. 듣고 계신 거 맞죠?
“어, 듣고 있어.”
원래대로 하자는 건 결국 다시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내가 고정으로 들어간다는 얘기인가? 물론 나한테 좋은 소식이기는 했지만 이게 이렇게……. 이렇게 되는 게 맞긴 한 건가?
너무 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방송인데 이렇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기분이 좋긴 한데…….
-그래서 선배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저는 다시 같이하는 쪽으로 하고 싶거든요. 제가 낯도 많이 가리고 이런 예능도 처음이고 해서……. 아무래도 친한 사람이랑 같이하는 게 심적으로 편하기도 하고.
“아……. 그건 그렇긴 하지…….”
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정우진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저랑 같이하는 거…….
“나야 당연히……. 근데…….”
-네.
“그…….”
당연히 좋았다. 좋긴 한데 말문이 막혔다. 뭔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어제의 일로 우리의 컴백 가능성이 다시 불투명해져서 더욱 간절했다.
사실 나는 꼭 정우진과 함께하는 송철 피디의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뭐든, 어딘가에 출연하고 활동을 하면서 우리 그룹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
-선배님?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내 침묵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정우진이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도 갑자기 이러는 건 너무 가혹한 거 같아서 원래 하던 대로 하자고 말씀드렸어요. 혹시 안 된다고 하실까 봐 조심스럽게 말씀드린 건데 다행히 제 말을 잘 들어 주시더라고요. 피디님도 이렇게 갑자기 통보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워낙 급하게 결정된 일이라 그러셨다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가 먼저 말을 했다고?”
-네? 아, 네……. 그냥 저도 선배님이랑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다른 사람은 좀 불편해서.
“…….”
-사실 제가 출연하기로 한 것도 선배님이랑 같이한다고 해서 알겠다고 한 거라…….
이건 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걸 들어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나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아……. 그럼 같이하는 거야? 게스트 없이?”
-네, 선배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난 좋아. 당연히 좋지.”
-…….
“여보세요?”
-저도 좋아요.
정우진의 목소리는 마치 염소 울음처럼 떨리고 있었지만 뒤늦게 흥분하기 시작한 나는 그런 걸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