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90)

33화

정우진은 식탁 위에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착하게도 김갑진이 주는 걸 군말 없이 하나씩 먹었다.

나는 매운 단무지가 제일 내 입에 맞는 거 같은데 정우진은 오이가 맛있는지 그걸 많이 먹었다.

그 와중에 김갑진이 또 뭘 가지고 오려고 해서 결국 내가 나서서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안 줘도 돼. 얘는 양도 별로 안 돼서 지금 이것도 너무 많아.”

“아휴, 양 많으면 남기세요. 남겨도 돼요.”

김갑진이 웃으면서 말하는 걸 보니 왜 이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사인 받고 싶어서 저러는 거 같은데, 이러다가 진짜 아까운 음식만 남길 것 같아 결국 나는 김갑진이 주방으로 간 사이에 정우진에게 작게 말했다.

“너한테 사인 받고 싶어서 저러나 봐.”

“사인이요? 혹시 벽에 걸어 두려고요?”

“그렇지 않을까?”

내 말에 정우진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김갑진이 다시 왔을 때 다짜고짜 그에게 물었다.

“사인해 드릴까요?”

“네! 액자에 걸어 놔도 되는 거죠?”

김갑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크게 대답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정우진이 아이돌 웃음으로 무장한 채 말했다.

“돼요. 그럼 제 사인 선배님 옆에 걸어 주실 수 있으세요?”

“강서주 사인 옆에요? 그럼요, 그럼요. 아주 딱 붙여서 걸어 드릴게요. 아니면 아예 액자 큰 걸 하나 사서 두 개를 같이 넣어서 걸어 드릴까요? 아, 저 사인이 예전에 박병우 배우님이랑 김희은 배우님 오셔서 해 주신 건데……. 두 분 부부시라서 제가 저렇게 같은 액자에 넣어서 걸어 드렸었거든요. 이번에도 저렇게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해 드릴까요?”

말을 하는 게 왜 이렇게 사기꾼 같은지 모르겠지만 정우진은 벽에 걸린 두 부부 배우들의 사인 액자를 보더니 흡족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 몇 장 필요하세요?”

“어쩜 이렇게 마음씨도 착하신지…….”

“…….”

김갑진이 감동 받은 표정으로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 속물적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니, 근데 왜 아무도 내 의견은 안 물어보는 건데…….

***

라면을 다 먹고 김갑진은 정우진에게 사인을 열 장이나 받았다. 벽에 걸 사인은 특별히 크게 했는데 내 사인이랑 크기가 맞지도 않고, 기존에 있던 건 좀 오래된 거라 나도 덩달아 다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저렇게 액자에 같이 넣어서 거는 건 좀 이상하지 않냐? 아니, 저분들은 부부라서 그렇다 쳐도 우리는…….”

“세가온 씨, 정말 감사합니다. 데뷔하시기 전에 오셨을 때도 엄청 잘생기셔서 제가 기억을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데뷔하셔서 혼자 엄청 반가웠었는데…….”

“아, 네. 선배님이랑 같이 자주 올게요.”

“어휴, 그럼 너무 감사하죠. 제가 안 매운 단무지도 개발해 놓고 있겠습니다. 액자는 제가 맞춤 제작해서 아주 멋들어지게 한 번 만들어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

둘 다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냥 사인 좀 걸어 두는 게 뭔 대수인가 싶어서 그냥 나도 더 이상 말을 얹지는 않았다.

갑멘에서 나와 다시 차에 타 이제 돌아가려고 하는데 정우진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왜?”

“네?”

“아니,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여서.”

“아…….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정우진이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아까 너무 많이 먹는 것 같더니……. 배가 불러 보여서 차슈 몇 개는 내가 대신 먹어 줬는데도 과식을 했나 보다.

나는 정우진을 차에 두고 약국에 가서 소화제를 사 왔다.

“집에 가서 이거 먹고 나중에 회사에 연락도 하고……. 나도 안 좋은 일 있으면 연락 받기 싫고 아무랑도 말하기 싫고 그렇긴 한데 그래도 회사에 연락은 해 줘야 돼.”

“네, 바로 연락할게요. 그리고 아까 선배님이랑 매니저 통화한 것도 아는 척 안 할게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갈게.”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정우진이 나를 붙잡았다.

“선배님, 근데 혹시 향수 뿌리세요?”

“뭐?”

갑자기 향수는 무슨 향수? 혹시 무슨 냄새가 나나 싶어서 배 쪽의 옷을 들어 코에 대 봤지만 나는 거라고는 라면 냄새밖에 없었다.

“라면이랑 튀김 냄새밖에 안 나는데?”

“아니, 지금 말고 아까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만났을 때면……. 오늘 숍에 들른 것도 아니라 그냥 집에서 씻고 나왔는데. 그리고 평소에 나는 향수를 뿌리지도 않았다.

“샴푸 냄새인가? 나 향수 안 쓰는데.”

“샴푸 뭐 쓰세요?”

“몰라? 그냥 애들이 사 온 거 아무거나 써서……. 오늘 들어가서 한 번 뭔지 봐 볼게.”

“아……. 그럼 문자 주세요. 전화해 주셔도 돼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알았어, 들어가.”

문을 닫자 창문이 내려가면서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우진이 숙소 바로 아래까지 데려다줘서 딱히 조심히 들어가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조심히 들어가.”

인사를 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너무 조용해서 슬쩍 돌아봤더니 차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혹시 바로 회사에 연락하고 있는 건가? 선팅 때문에 차 안은 잘 보이지가 않아서 힐끔힐끔 보다가 그냥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숙소로 돌아오니 애들이 거실에 다 같이 앉아 있었다. 근데 분위기가 초상이라도 난 것처럼 어두워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 형. 왔어?”

“형.”

“…….”

유노을은 아예 거실 한복판에 대자로 뻗어서 아무 말도 하질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거실 바닥에 앉으며 물었다.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었어?”

“형.”

“어?”

이진혁이 굳은 얼굴로 날 불렀다. 그러자 누워 있던 유노을이 부스스 일어났고, 김강도 우리를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키는데 이진혁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저번에 들려줬던 곡 기억나?”

“네가 만든 거? 어, 그거 대표님이 들어 보고 말씀해 주신다고…….”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숙소 분위기가 왜 이렇게 안 좋은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하시던데?”

내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이진혁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좀 더 기다려 보라고 하는데 도대체 뭐가,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준비가 부족하다고 하는 건지 말도 제대로 안 해 주고.”

“그래서 아까 노래 컨셉에 맞춰서 패션이나 스타일도 ppt로 만들어서 보여 드리겠다고 했는데 연락도 안 와.”

“…….”

유노을의 말까지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내가 군대에 갈 당시에만 해도 이진혁은 솔로를 준비 중이었는데 그것도 무산이 됐고, 결국 내가 제대할 때까지 애들은 이렇다 할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간간이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거나 연예인들의 개인 너튜브 콘텐츠에 출연하고 라디오 정도밖에는 스케줄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동안 이진혁이 만든 노래를 가지고 다 같이 찾아간 적도 많았는데 결과는 항상 좋지 않았다. 이렇게 컴백도 없이 방치당하기만 할 바에 차라리 해체를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회사에 묶여서 당장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계속 허송세월만 보내느니 다들 하고 싶은 거 하는 게…….

“근데 형은 미팅 간 거 어떻게 됐어? 얘기는 잘 됐어? 뭐 하는 거래?”

“…….”

산만 한 덩치로 잔뜩 구겨져 있던 김강이 나를 보며 아, 하고 물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별로 안 좋은데 내 얘기까지 해 버리면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맞아, 그거 어떻게 됐어?”

“촬영은 언제 한대?”

시무룩하고 힘없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지만 사실 아무도 기운이 나서 이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이러고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서 최대한 털어 내려고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하자 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서.

“어……. 아직 결정 난 건 아니고…….”

“촬영 날짜?”

“어? 어어.”

꼭 고정이 아니라 게스트로 나가는 것도 나쁜 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매니저 형한테 들었던 말들도 그렇고, 송철 피디가 했던 말도 그렇고, 그냥 그런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떠올라 눈앞이 캄캄해졌다.

평소라면 그냥 고정 아니고 게스트래, 그렇게만 말해도 애들은 그냥 아쉬워하기만 하고 말았을 텐데 오늘은…….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내일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황급히 씻는다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왜 항상 안 좋은 일은 겹쳐서 일어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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