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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32/190)

32화

근데 이게 이렇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가? 고맙다고 하려 해도 정우진이 너무 쑥스러워하니까 괜히 나까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면 그냥 보통 팬도 아니고 좋아하는 가수의 단골 라면집까지 와서 같은 메뉴를 먹었다는 걸 당사자에게 들켜서 더 부끄러운 걸까?

그래, 그건 좀 그럴 수도 있다.

팬이라거나 존경하는 선배라는 것도 당연히 그냥 인사치레 같은 말인 줄 알고 신경도 안 썼는데…….

“…….”

“…….”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고개를 들 생각이 없는 듯한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계속 그러고 있어?”

“…….”

“야,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민망해해. 네가 그러니까 나도 기분 이상해지잖아.”

손을 뻗어 푹 숙이고 있는 동그란 머리통을 가볍게 밀어내며 말하자 그제야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귀 끝이 피가 날 것처럼 붉어진 것에 비해 얼굴은 살짝 홍조만 떠오른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졌는데 맞은편 집 김밥도 먹어 봤어? 그때 여기서 라면 먹고 거기서 김밥 같이 먹는 게 세트 같은, 그런 거였잖아.”

“땡참 김밥이요? 저 그거 먹다가 매워서 기침 엄청 했어요.”

곧장 나오는 말에 나는 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그것도 아네?”

“네, 근데 라면 먹고 바로 먹긴 배불러서 집으로 가지고 가서 저녁에 먹었어요.”

“그거 바로 먹어야 맛있는데.”

“라면도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못 먹었어요.”

땡참 김밥은 캔 참치에 매운 고추 다진 것과 마요네즈를 잔뜩 넣어서 만든 김밥이었다. 한때 미쳐서 애들이랑 같이 스무 줄도 더 먹었던 기억이 났다. 김밥 말아 주시던 이모가 힘드니까 넷이 같이 오지 말고 둘씩 나눠서 오라고 했던 게 떠오르자 웃음이 지어졌다.

“왜 웃으세요?”

“아니, 그 김밥 집 이모가 생각나서……. 데뷔하기 전부터 라면 먹으러 여기 오면 매번 들렀거든. 나 군대 다녀오니까 가게 없어져서 많이 아쉬웠는데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네.”

“저도 그거 먹어 봐서 대충 재료 뭐 들어가는지 기억하는데 다음에 제가 해 드릴게요.”

수줍게 웃으면서 말하는 정우진을 보니 이젠 희한하다는 느낌보다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냥 후배와 내 팬의 차이인 걸까? 예전부터 좋아해 줬다고 하니 정우진이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든 그냥 흐뭇하기만 했다.

“아, 김밥을 내가 만들어 줘야 되는데……. 그럼 넌 매운 거 못 먹으니까 나는 그냥 참치 김밥 만들어 줄게.”

“정말요?”

놀란 토끼 같은 눈으로 묻는 걸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 김밥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내가 대출받아서라도 사 줄게.”

“대출을 저한테 받으실래요? 제가 빌려 드릴게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이랑 대화하다 보면 이렇게 가끔 핀트가 어긋날 때가 있었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꽤 많이……. 아무튼 맞장구는 쳐 줘야 할 것 같아서 일단 물었다.

“이율이 얼만데?”

“이자는 안 주셔도 돼요.”

“이자를 안 받는다고? 그럼 왜 빌려 줘?”

“원금도 안 갚아도 돼요. 대신 1년에 백 원씩 줄어드니까 다 갚을 때까지 계속 저랑 같이 밥 먹어 줘야 해요.”

정우진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갑자기 드라마 남자 주인공 같은 대사를 하고 있었다. 근데 1년에 백 원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백만 원도 아니고.

“그럼 만 원만 빌려도 백 년이네?”

“네, 말 나온 김에 지금 빌리실래요? 라면 값 한 이만 원 정도 나올 것 같은데.”

“그럼 이백 년? 야, 장수해야겠다. 너한테 돈 다 갚으려면.”

“제가 선배님 건강도 책임질게요.”

이쯤 되니 내가 지금 라면을 먹으러 온 건지, 팬 사인회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에 팬 사인회를 할 때도 정말 재미있고 신기한 주접 멘트들을 들었는데 이런 얘기는 또 처음이었다. 요즘에는 또 이런 말들을 자주 하는가 보다.

“그래, 돈 다 받으려면 너도 건강해야 되니까 네 건강도 신경 잘 써.”

“네, 건강 잘 챙겨야 하니까 같이 운동하실래요? 평소에 어떤 운동 하세요?”

“운동? 주기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안무 연습하면서 하기도 하고, 가끔 강이 따라 헬스장 가기는 하는데……. 난 실내에서 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냥 가끔 조깅하는 정도? 자주 하지는 않고.”

사실 운동은 재미도 없고 그냥 정말 살기 위해서 아주 가끔 하는 정도였다. 안무 연습만 해도 되지 않나? 평소에도 땀 흘릴 정도로 춤추니까…….

“저도 실내에서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조깅은 어디서 하세요?”

“딱히 정해져 있지는 않고 그냥 동네 한 바퀴 돌아. 새벽에 일찍 일어나면……. 한 다섯 시나 여섯 시쯤? 해 뜨기 전에 나갈 때도 있고 아니면 밤에 아홉 시나 열 시쯤 나갈 때도 있고.”

한참 어나더에 대해 안 좋은 기사가 많이 뜰 때에는 생각이 많아져서 새벽에 무작정 나가 뛰기만 하던 때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술을 마시면 더 괴롭기만 하고 계속 잠만 자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아예 그런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잠깐이라도 멀리 떠나자니 돈도 없고 그래서 정말 힘들었는데…….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물었다.

“새벽에 자주 깨세요?”

“아니? 나 잠 많아서 잘 안 깨. 그래서 사실 조깅도 1년에 몇 번 안 해.”

사실을 실토하자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다가 웃었다.

“그럼 가끔 조깅하실 때 저도 불러 주세요. 새벽에 깨서 아무 예정도 없이 갑자기 나가야 할 때도 좋아요.”

“새벽에 아무 때나?”

“네, 24시간 중 어느 때라도 괜찮아요.”

“오…….”

진지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괜히 민망해져서 감동받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마움과 민망함이 점점 높아져 정점에 다다르려고 할 때 다행히 김갑진이 라면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차슈랑 숙주 추가한 거에서 좀 더 넣었어요. 혹시 모자란 거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네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라면을 받으며 말하자 정우진도 인사를 했다. 김갑진은 그런 우리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너무 재수 없어서 한마디 하려다가 정우진도 있어서 그냥 관뒀다.

그나저나 라면 양이 정말 많았다. 이 정도면 그냥 2인분을 한 그릇에 담은 거 아닌가? 정우진은 저번에 왔을 때도 한 그릇을 다 못 먹었다고 했는데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젓가락으로 라면을 뒤적거리다가 슬쩍 시선을 올려 보자 정우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릇 위를 빼곡히 덮고 있는 차슈를 한 장, 한 장 치우고 있는 게 보였다. 이불처럼 덮인 차슈를 치워 내자 이번에는 숙주 지옥이 나왔다.

“…….”

면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그런 표정으로 라면을 바라보고 있는 정우진에게 말했다.

“양 많으면 남겨. 네가 다시 와서 반가운 마음에 엄청 많이 줬나 보다.”

“괜찮아요. 다 먹을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정우진이 산더미처럼 쌓인 숙주를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걸 보다가 나도 한 입 먹었다.

여기 라면은 차슈가 얇고 면적이 커서 면이나 숙주에 싸 먹기 좋았다. 김에 밥을 싸듯이 젓가락으로 면과 숙주를 조금씩 차슈에 싸서 먹자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정말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이미 이 맛에 길들여져 다른 곳에선 절대 일본식 라면을 사 먹지 못한다.

정우진은 어느새 내가 먹는 방법을 따라 하며 라면을 먹었다. 정우진이 먹는 속도가 느려서 나도 원래 내가 먹는 속도보다 좀 늦게 먹었다.

“이건 서비스예요.”

그때 김갑진이 고로케 네 개와 닭튀김 네 조각, 빨간 단무지를 추가로 가지고 왔다.

“고로케는 이번에 새로 만든 건데 감자랑 치즈랑 건새우 빻은 거 같이 넣었거든. 아직 파는 건 아닌데 먹고 얘기 좀 해 줘. 닭튀김은 기존에 팔던 거랑 똑같은 건데 소스 새로 만들어서 이거하고 단무지는 매운 고추 가루랑 같이 무친 거.”

가끔 이렇게 판매하기 전에 먹어 보라고 주기도 해서 별생각 없이 단무지를 먹어 봤는데 생각보다 엄청 매웠다. 나는 정우진이 매운 단무지를 먹으려는 걸 말렸다.

“야, 그거 엄청 매워. 넌 못 먹겠는데?”

“아, 매운 거 못 드셔? 잠시만요.”

김갑진이 다시 주방으로 급히 뛰어가서 락앤락 통을 통째로 가지고 와 새 접시에 집게로 오이 피클 같은 걸 꺼냈다.

“이건 오이 필러로 얇게 깎아서 레몬이랑 건고추 넣고 피클처럼 만든 건데 일반 피클보다 덜 달고 레몬 향도 많이 나서 상큼하게 먹기 좋을 거예요. 건고추도 들어가긴 했는데 먹어 보니까 별로 맵지는 않아요.”

“아……. 감사합니다.”

“아, 무로 만든 것도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김갑진이 다시 주방으로 가는 걸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결국 터져 버렸다. 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계속 웃자 다시 새로운 락앤락 통을 가져온 김갑진이 내게 물었다.

“왜 웃어?”

“아니. 야, 애 먹다가 체하겠다.”

“이건 무로 만든 건데 이것도 드셔 보세요. 오이가 향이 강해 라면이랑은 잘 안 어울릴 수도 있어서 무로도 만들어 봤거든요. 단무지랑 식감은 비슷한데 맛은 아예 달라요. 차슈랑 같이 먹어도 맛있을 거예요.”

이젠 아예 내 말은 무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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