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90)

31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만약에요.”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무리 만약이라도 해도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라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하는 행동은 마치 어린애가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도망 안 갈게.”

애초에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하면 될 일인데 도망을 왜 간단 말인가?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는 정우진을 보며 단호하게 말하자 그제야 불안했던 얼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정우진은 어린 나이도 아니고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데, 하는 행동들은 김강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나는 살면서 다 큰 남자가 이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다 큰 남자라고 울지 말라는 법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은 이러지 않지 않나? 초상이 난 것도 아니고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며칠 전에 친해진 아는 형이 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어린애처럼 불안해하는 모습들이 고맙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여리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서 도대체 어떻게 연예계 생활을 했던 걸까? 처음부터 유명해져서 나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어 보지는 않았으려나? 그래서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낸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다행이긴 하다만.

“아무튼 갔다 올게.”

내 말에 정우진이 잠시 나를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는 5분 안에 안 오면 데리러 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계산도 해야 하고……. 5분은 좀 부족할 거 같은데 10분 어때?”

정우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날 찾으러 편의점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말에 정우진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별안간 웃었다.

“알았어요, 그럼 10분 있다가 안 오면 데리러 갈게요.”

“…….”

그리고 나는 그제야 이건 진짜가 아니라 그냥 해 본 말이었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정우진이 하는 말 중에 뭐가 진짜고 뭐가 장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아까보다는 기분이 좀 나아진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긴 했다.

“마실 건 그냥 물 사 오면 돼?”

“네, 그냥 생수요.”

“알았어.”

대답을 하고 차에서 내리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도 오전인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까 일어나서 한 끼도 안 먹기는 했다. 정우진은 뭘 먹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으로 들어가 생수 500ml 두 개를 꺼내고 물티슈를 찾았다. 물티슈는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아용 물티슈에 가장 먼저 손이 갔다. 계산대 근처에서 새콤달콤 딸기 맛도 보이기에 그것도 하나 샀다.

계산을 하고 시간을 확인하자 5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조금 걷자 비싸 보이는 외제차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저기에 주차하면 안 되는데…….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나를 반겼다.

나는 일회용 봉지를 통째로 정우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너 근데 밥 먹었어?”

“아니요, 선배님은요?”

“나도 아직 안 먹었는데……. 바로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면 밥이나 먹으러 갈래? 여기 주차 금지 구역이라 나가긴 해야 돼.”

“네, 좋아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밥까지 먹여서 보내면 지금보다 한결 더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어쨌든 나 때문에 울기도 했으니까…….

뭘 먹을까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곳이 있어서 물었다.

“너 라면 좋아해?”

“네, 엄청 좋아해요. 선배님은요?”

“나도 좋아해. 그럼 내 친구가 하는 가게 있는데 거기 가자.”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있는 사이 정우진은 내가 사 온 물을 마시고 물티슈도 꺼내 보았다. 그리고 봉지 안에 있는 새콤달콤을 꺼내며 물었다.

“이건 뭐예요?”

“아, 너 먹으라고…….”

“저요?”

정우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걸 만지작거리다가 곧 껍질을 까서 하나 입에 넣었다. 좀 단단하고 찐득찐득해서 그런지 이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 갑자기 그게 웃겨서 바람 빠지듯이 웃자 정우진이 물었다.

“왜 웃으세요?”

“아니, 여기로 가면 돼. 아직 오픈 전이라 사람도 없을 거야.”

“오픈 전인데 가도 돼요?”

“어어, 친구라서 괜찮아. 재료 준비하는 것 때문에 출근은 일찍 하거든.”

그렇게 우리는 숙소에서 별로 멀지 않은 라면집에 도착했다. 꽤 외진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지만 맛있다고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제법 유명한 곳이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입구에 ‘갑멘’이라고 크게 한글로 써진 입간판이 보였다. 정우진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저희 아직 오픈……. 어, 뭐야. 이 시간에 웬일이야?”

한창 준비 중이었는지 검은색 앞치마를 한 김갑진이 놀란 얼굴로 나타났다. 라면 좀 먹으려고 왔다고 하려는데 김갑진의 표정이 내 쪽에서 내 뒤로 옮겨지면서 실시간으로 변하는 걸 목격했다.

“지금 되지? 두 개.”

“어? 어어, 되지. 앉아, 앉아.”

정말 연예인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김갑진은 나를 보지도 않고 더듬더듬 의자를 찾아 빼면서 말했다. 나는 힐끗 뒤를 보면서 정우진에게 말했다.

“앉아. 쟤는 내 친구 김갑진이고……. 얘는…….”

그래도 어쨌든 인사를 시켜 줘야 할 것 같아서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정우진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내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자 정우진도 김갑진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얘는 같은 소속사 후배인 정우진.”

“…….”

“…….”

“그, 배틀 브라더스…… 세가온……. 알지?”

당최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더듬더듬 말하자 김갑진이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갑자기 슈퍼스타를 만났으니 과한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왜 이렇게 내가 다 쪽팔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하하 웃는 얼굴로 김갑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갑돌아.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난……. 아, 넌 뭐 먹을래? 여기 다 맛있어.”

정우진은 자리에 앉아서 메뉴판을 보다가 말했다.

“저는 선배님이랑 같은 걸로 먹을게요.”

“아, 그럼…….”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김갑진이 갑자기 내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혹시 저번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그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돌아봤다.

“너 여기 온 적 있어?”

“아…….”

“맞는 거 같은데? 그쵸? 데뷔하기 전에……. 오셨던 거 같은데.”

그것도 데뷔 전에? 그럼 몇 년 전이야? 2년도 넘었는데 김갑진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 거야?

“그때 모자 쓰고 오셔서……. 돈코츠 라멘에 차슈 추가하고 숙주 많이 드셨잖아요. 강서주 너 데뷔하고 네 팬들이 너 여기 단골인 거 알고 찾아오시고 그랬잖아. 그래서 네가 뭐 먹었는지 많이 물어보고 그래서 내가 아예 원 정식 해 가지고 팔았는데 그때 그 정식 드셨지 않아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하지만 정우진은 당황한 듯 입만 달싹거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김갑진은 옛일을 떠올리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 뭔가를 생각하다가 아, 하고 말했다.

“그때 얘가 사인해 놓은 거 사진도 찍으셨잖아요! 아, 여기! 여기서 그때, 그…….”

김갑진은 액자에 넣어 벽에 걸린 내 사인을 가리키며 크게 말하다가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것도 그럴 게 정우진이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였기 때문이다. 그냥 숙인 것도 아니고 진짜, 거의 턱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

“…….”

“…….”

갑작스럽게 시작된 어색한 침묵에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너무 숙이고 있어서 정우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양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게 선명히 보였다.

김갑진은 당황한 얼굴로 나와 정우진을 번갈아 보다가 로봇처럼 뚝딱거리며 말했다.

“그, 돈코츠 두 개 줄까?”

“어? 어, 어. 차슈 추가하고 숙주 많이…….”

사실 난 먹는 취향이 좀 바뀌어서 지금은 다른 걸로 먹지만, 정우진이 그렇게 먹었다고 하니 나도 똑같은 걸로 먹기로 했다.

김갑진이 알겠다고 한 뒤 주방으로 들어갔으나 정우진은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과 숟가락을 놔주며 말했다.

“너 내 팬이었다더니 진짜였구나…….”

“…….”

정우진은 말이 없었지만 입을 가리고 있는 벌겋게 달아 오른 손등이 대신 대답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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