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서 갑자기 튀어나온 정우진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하마터면 들고 있던 핸드폰까지 떨어뜨릴 뻔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정우진의 등장에 나는 많이 놀란 상태였다.
“선배님…….”
정우진은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얼굴로 나를 불렀다. 작은 목소리가 귀에 닿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숍에 들르기라도 한 건지 머리도, 메이크업도 전부 끝마친 상태였다. 이대로 그냥 카메라가 나와서 무슨 방송이든 시작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순간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설마 몰래 카메라인가? 그런 건가? 갑자기 정우진이 하차하겠다고 하고 내 반응을 보는 그런 몰래 카메라? 아니, 그럼 매니저 형이 욕한 것도 설마 다 들은 거 아니야? 어떡하지? 아니, 나만 속은 게 아니라 매니저 형도 속은 거야? 매니저 형은 도대체 왜 속인 건데?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정우진이 내 앞에 서서 우물쭈물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는 순간 이게 몰래 카메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주변을 살피면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카메라와 사람을 찾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몰래 카메라 아니지?”
“네? 몰래 카메라요?”
“아니……. 여긴 어떻게 왔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여전히 비 맞은 개 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차 타고…….”
“무슨 차?”
“제 차요. 저번에 선배님이랑 같이 탔던 거…….”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자 낯익은 외제차가 보였다. 저 비싸 보이는 차를 왜 지금 봤을까? 나는 황당한 얼굴로 잠시 숨을 쉬다가 정우진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단 차에 타서 얘기하자.”
내 말에 정우진이 얌전히 내게 끌려왔다. 그리고 차에 타서 한숨을 돌린 뒤 정우진에게 뭐라고 하려는데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혹시 미팅 다녀오셨어요?”
“어? 어, 방금……. 방금 갔다가 연락받고 다시 온 건데…….”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정우진의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눈에 보일 만큼 급격한 변화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거고, 갑자기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울고 싶은 건 정작 난데…….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뭐?”
“제가 뭐 잘못한 거나…… 선배님 마음에 안 들었던 점이나……. 제가 통화할 때 너무 길게 하고, 사실 저도 선배님이 빨리 전화 끊고 싶어 했던 거 느끼기는 했는데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던 게 많았고, 또 언제 통화할 수 있을지도 몰라서 계속 모르는 척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번에 호두 공장 갔을 때도 제가 너무 더럽게 커피 뱉고…….”
“잠깐만. 잠깐만, 정우진.”
두서없이 쏟아 내는 말을 듣고 있자니 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들어 정우진의 말을 막고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
하지만 정우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마치 애들이 울기 직전에나 하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니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이러다가 진짜 우는 거 아닐까?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아서…….”
“아니, 사과하지 말고 왜 이러는 건지 말을 좀 해 봐. 네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자꾸 사과를 해?”
“…….”
“어?”
다시 입이 다물리는 걸 보며 재촉하자 정우진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눈가는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붉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물에 잠긴 것처럼 촉촉해 보였다.
“왜…….”
“…….”
“왜 갑자기 안 한다고 하신 건지…….”
“뭘 안 해?”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다시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저한테는 안 한다고 말씀하신 적 없잖아요…….”
목소리에 섞인 울음에 나는 기름칠이 안 된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 말했다.
“혹시 우리 예능 말하는 거야? 오늘 미팅 갔다 온 거?”
“…….”
“나 안 한다고 한 적 없는데? 그거 말하는 거야?”
내 말에 시종일관 슬픈 강아지 같던 정우진의 표정이 바뀌었다. 우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건 정우진이었다.
“부담스럽다고 안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질문에 갑자기 뒷목이 싸늘해졌다.
설마 정우진이랑 나한테 말을 다르게 전한 건가? 그렇다면 누가? 회사에서 그런 건지, 제작진이 그런 건지, 아니면 둘 다 말을 맞춘 건지……. 매니저 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심각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적막한 차 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매니저 형이었다.
“잠시만, 나 전화 좀.”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 혹시 세가온이랑 같이 있어?
“네?”
-세가온이랑 같이 있냐고. 아니면 연락 돼?
차 안이 워낙 조용해서 핸드폰 너머로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정우진에게도 분명 들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말했다.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내 말에 정우진이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아……. 그래, 숙소에는 잘 들어갔고?
매니저 형의 상냥한 목소리에 손등 위로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아깐 그렇게 욕을 하고 화를 내더니 또 기분이 나아지기라도 했나 보다.
“이제 들어가려고요.”
-그래? 아, 그것보다 나도 회사에 와서 들은 건데.
“네.”
매니저 형이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또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근데 정우진도 같이 있는데 여기에서 통화를 해도 되나 의문이었다. 잠깐 나가서 받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매니저 형이 말했다.
-세가온한테 너 예능 출연하는 거 네가 고사했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더라고.
“……네?”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온도가 한 2도는 떨어진 것처럼 추워졌다. 이쪽 상황을 당연히 알 리가 없는 매니저 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걔가 그렇게 보여도 마음이 여려서 혹시 신경 쓸까 봐 그랬다고 하네. 안 그래도 첫 예능이라 얼마나 떨리겠어. 그래서 회사에서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둘러서 얘기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너도 말 좀 맞춰 주면 좋을 것 같다고.
“…….”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입을 다무는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시베리아 우랄산맥에서 얼음 폭풍이 휘몰아치는 환각이 보였다. 정우진은 그 차갑고 험난한 곳에 사는 무자비한 전설의 식인 늑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깽깽거리는 강아지 같았는데 그런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가 않았다. 정우진이 이렇게 누굴 죽일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서 당황하고 있는데 매니저 형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계속 주절주절 말했다.
-서주야, 네가 선배니까 이해를 해 줘야 하지 않겠냐? 세가온이 원래 그런 거 출연 절대 안 하는데 이번에 스케줄 잡히고 피디님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다 얼마나 좋아했는데. 비비 멤버들도 엄청 좋아했다고 하더라. 세가온도 엄청 기대하는 눈치였고……. 그러니까 네가 이해를 좀 해 주자. 선배잖아. 알았지?
매니저가 사람 좋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드리우는 짙은 살기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그야말로 칼날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은 싸늘하고 급박한 분위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대표님이 너한테 맛있는 거 사 주라고 용돈도 주셨어. 그러니까 내가 술 한 잔 살게. 알았지? 혹시라도 세가온이 물어보면 말 좀 맞추자. 어? 이미 그렇게 말했는데 네가 다르게 말하면 대표님 입장이 어떻게 되겠냐? 알았지?
사건의 전말도 대충 알 것 같고 자꾸만 재촉해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네,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풀렸다.
-그래, 지금 세가온 연락 안 받는다고 하니까 혹시라도 소식 알게 되면 연락 좀 주고.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끊는다. 들어가.
“네…….”
그렇게 전화를 끊었는데 정우진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정우진의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있다가 넌지시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하지만 정우진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고민하다가 얼굴을 확인하려고 슬쩍 정우진 옆으로 붙어서 똑같이 고개를 숙이는데, 문득 보이는 허벅지 쪽이 뭔가 이상했다.
불규칙적으로 색이 짙어져 있는 게 꼭 젖은 것처럼…….
툭, 투툭.
“……?”
그때 또 허벅지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자 내 손바닥 위로 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나는 넋이 나가서 손바닥으로 계속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너 설마 울어?”
그러자 귓가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