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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190)

28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피디도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회의도 다시 해 보고 그러니까……. 원래 따로 뵙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시간도 촉박하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유선상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어요.”

“아, 네.”

“우리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최대한 끝까지 해 보려다가……. 나중에 세가온 씨 오시면 말씀드리겠지만 첫 화에서 게스트로 출연하는 쪽으로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파일럿이라 보장 화수가 많지 않거든요. 게스트라고 해 봤자 두셋 정도 나올 거라 분량만 생각하면 거의 고정이나 마찬가지예요. 자세한 건 다 모이면 그때 제가 말씀드릴게요.”

미안하다는 얼굴로 최대한 설명을 해 주려고 하는 피디를 보며 알겠다고 하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계자가 피디를 불렀다. 표정이 사색이 된 게 어쩐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왜?”

피디도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금세 깨달은 건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우리를 보며 회의실에서 기다려 주시라고 한 뒤 피디가 자리를 떠났다. 나와 매니저 형은 잠시 피디의 뒷모습을 보다가 같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매니저 형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핸드폰을 확인한 매니저 형의 표정이 조금 전 피디를 부르던 관계자의 표정과 똑같아졌다. 그걸 보니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왜, 또? 무슨 일인데?

“무슨 일 있어요?”

내 불길한 예감은 적중률이 상당했기 때문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매니저 형은 사색이 된 얼굴로 액정을 보다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세가온이 프로그램 안 한다고 했다는데?”

“……네?”

“갑자기 안 한다고 했대.”

“…….”

불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런 이유일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멀뚱멀뚱 매니저 형을 보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세가온이 안 한다고 했대. 이거. 이 프로그램.”

“…….”

그럴 리가 없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왜?

나는 반사적으로 내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그걸 꽉 쥐었다가 몸에 힘을 뺐다. 그동안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내 착각이었을까?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있지?

아니, 물론 나한테 허락을 받을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그래도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게다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기대하는 것 같았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긴 거라면 회사에서도 분명 알았을 텐데, 왜 나랑 매니저 형을 여기에 보냈지?

아니면 갑자기 결정된 일인가? 매니저 형이 세가온이 안 한다고 했다는 걸 보면 회사나 스케줄 때문이 아니라 그냥 순전히 본인의 생각이라는 건데……. 아니, 도대체 갑자기 왜?

핸드폰을 확인해 봤지만 정우진에게 연락이 온 건 없었다.

[네, 그러면 3일 뒤에 봬요. 오늘 미역국이랑 생선구이도 너무 맛있었고 선배님이랑 호두파이 같이 먹어서 너무 좋았어요. 다음에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영화 보여 드릴게요. 그땐 뭐 드시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밥도 제가 사 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미팅 가기 전에 조금 한가해지시면 연락해 주세요. 그냥 심심할 때 연락 주셔도 돼요. 잠이 안 오거나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이 없을 때 전화 주셔도 괜찮아요. 그럼 안녕히 주무시고 좋은 꿈, 꾸세요.]

“…….”

제일 마지막으로 왔었던 문자를 다시 봐도 기분 나쁜 기색이라든가 다른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니면 그냥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걸까? 그래서 매일 연락을 하다가 갑자기 끊은 걸 수도 있었다.

갑자기 한숨이 나와서 숨을 크게 내쉬는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피디님…….”

매니저 형이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아니,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혹시 뭐 들은 거 없어요? 이렇게 갑자기 안 한다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저희 지금 준비 다 끝났고, 이제 촬영만 하면 되는데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이 그냥 이렇게 통보만 하면 끝입니까?”

“피디님, 제가 MD엔터 직원이 맞긴 한데 저는 그냥 매니저예요. 저도 방금 들은 이야기라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셔 봤자…….”

식은땀을 흘리면서 말하는 매니저를 노려보던 피디가 휙 내 쪽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피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출연자 개인 사정으로 펑크가 나면 대체자 구하면 끝이에요. 근데 세가온 씨는 아니잖아요. 지금 세가온 씨 메인으로 프로그램 포맷 다 짜고 촬영지 예약, 촬영 날짜까지 다 잡아 놨는데 갑자기 이러면 안 되지요.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이게 별거 아닌 것 같겠지만 프로그램 하나 만드는데 시간이나 예산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압니까? 스태프들은 몇 명이나 붙는지 알아요? 이미 방송 스케줄 다 나와서 이거 이대로 취소하면 펑크예요. 기사 준비까지 다 해 놨는데.”

“그러니까 저한테 그렇게 말씀을 하셔 봤자…….”

“하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다시 회사랑 얘기해 보도록 할 테니까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이렇게 계셔 봤자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매니저님이랑 우리가 더 할 말도 없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한 피디가 휙 바람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등을 돌리더니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밖에서는 피디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내 옆에 서 있는 매니저 형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였다.

“…….”

갑자기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나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어쨌든 파토가 난 것 같으니까 빨리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듯싶었다.

“형, 일단 회사에 가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씨발…….”

“…….”

매니저 형은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화가 났을 때 평소에 나한테 하는 것처럼 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이 사람도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

매니저 형은 회의실에서 나와 자본주의자의 미소를 얼굴에 두르고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를 했다. 나도 덩달아 인사하고 같이 승강기를 타자마자 매니저 형이 주먹으로 벽을 쾅 쳤다.

“왜 나한테 지랄이야, 씨발 새끼들이!”

“…….”

“아아악!”

“…….”

익숙한 모습에 그냥 시선을 돌리고 못 들은 척하고 있자 승강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말없이 차에 타자 매니저 형이 자동차 타이어를 발로 몇 번 차더니 씩씩거리면서 운전석에 탔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핸드폰을 또 만지작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일단 숙소로 가 있으라고 하니까 그렇게 알아.”

“네.”

“씨발, 하여튼 연예계 쪽 인간들은 성격 파탄자들이 존나 많아. 세가온 그 새끼는 왜 갑자기 안 한다고 지랄이야? 아니, 그럴 거면 미리 말이나 해 주든가 그걸 왜 씨발, 지금 말하냐고. 피디 그 새끼는…….”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매니저 형도 연예계 사람 아닌가? 본인이 성격 파탄자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관자놀이부터 눈알까지 지끈지끈거려서 숙소에 가면 약부터 먹어야겠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컨디션이 최상이었는데 지금은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직 오전인데도 너무 피곤하고 몸이 축축 처져서 도착할 때까지 시트 깊숙이 등을 기대고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리며 말했지만 매니저 형은 별다른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차는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를 거칠게 내며 멀어졌고, 나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정우진이 떠올랐다.

일단 한 번 연락을 해 봐야겠지? 친하고 안 친하고 그런 걸 떠나서 같이 들어가기로 했던 프로그램에서 갑자기 말도 없이 하차했으니까…….

숙소로 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가며 핸드폰 액정만 쳐다보고 있는데 요 며칠 동안 정우진이랑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게 떠올랐다.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꽤 많이 했던 거 같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정우진은 성격이 좀 소심했고 쑥스러움도 잘 타는 섬세한 소년 같은 애였다. 이번에 같이할 프로그램도 부담을 정말 많이 느끼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아예 하차를 해 버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내가 좀 더 성심성의껏 온 마음을 다해서 정우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우진이 좀 말이 많고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을 궁금해해서 사실 좀 귀찮았는데 그게 티가 나기라도 했나 보다. 영화관에는 한 번도 안 가 봤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냥 일찍 데뷔해서 이런저런 게 궁금하고 해 보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거 같은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기나 하고.

“하아.”

숙소로 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갑자기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별일이 있어서 하차한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해서 전화를 하려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빌라 입구에서 갑자기 뭐가 빼꼼 나왔다.

“…….”

처음엔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비볐다.

그것도 그럴 게 정우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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