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90)

26화

정우진의 행동이나 말투가 평범한 것 같지 않다고 확실하게 느낀 다음 날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3일 뒤에 미팅이 있으니 그때 만나서 얘기하자고 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침 일찍부터 문자를 보내서 아침은 뭘 먹는지, 오늘은 뭘 하는지 물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이 뚝 끊기니까 오히려 마음 한편에 스멀스멀 자라나던 작은 의문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역시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나 보다. 정우진은 그냥 도움은 받고 싶은데 너무 착하고 소심해서 고마운 마음을 과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

그렇게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드디어 미팅 날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여덟 시 삼십 분쯤 매니저 형이 데리러 와서 차에 탔다. 형은 백미러로 나를 보더니 어쩐 일로 답지 않게 물었다.

“어어, 어서 와. 별일 없지?”

사실 안부차 물어볼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한 번도 안 그랬던 사람이 이런 걸 물어보니까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싶어서 좀 당황하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

“……형은 별일 없으시죠?”

나도 어쨌든 예의상 물어보니 매니저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 서주야.”

“네?”

숨 쉴 틈도 없이 매니저 형이 나를 불렀다. 백미러로 눈이 마주치자 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형이 저렇게 내 눈치를 볼 사람이 아닌데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면 피디님이 대충 말씀하시긴 할 건데, 일단 그래도 너도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뭘요?”

설마 취소인가? 취소됐나? 아, 취소됐나 보다.

매니저 형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빠르게 결론을 내린 나는 최대한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차피 이렇게 섭외가 됐다가 취소되는 일은 그 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원래 세가온이랑 너랑 둘이 투 탑으로 진행하기로 했었는데 회의해 보니까 아무래도 좀 무리일 거 같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나 보더라고.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내가 얘기해 줬었지? 둘이 시골 가서 밥 해 먹고 그러면서 자급자족하는 힐링 예능인데…….”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들은 적이 없지만 일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매니저 형은 잠시 말을 하다 말고 다시 백미러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뭐,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맞기는 해. 톱스타가 나오면 화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 화제성을 시청률로 끌고 가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 둘 다 예능 초보고 단독 예능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는데 방송이 잘 나오겠어? 세가온은 그래도 일단 인지도가 있으니까 이슈 몰이라도 될 거고……. 다른 한 명은 어느 정도 예능을 해 본 사람이 하는 게 맞긴 하지.”

기분이 나쁜 거랑은 별개로 다 맞는 말인 거 같기는 한데, 갑자기 너무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인지도 때문인 거라면 처음에는 절 왜 섭외하셨대요?”

매니저 형이 말한 사유들은 전부 타당했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섭외 과정에서 제기되었어야 할 문제였다. 거의 확정이라고 들었고 미팅 날짜까지 잡혔는데 고작 며칠 사이에 이런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예능 초보들도 아니고 송철 피디면 그래도 이 바닥 베테랑인데 그런 문제점들은 당연히 다 알고 섭외했던 거 아니었나? 그것도 아니면 혹시 또 외압이 들어온 걸까? 백오식 때처럼?

“그거야, 뭐…….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 내가 관계자도 아닌데. 나도 어제 오전에 급하게 들은 거라 내막은 잘 몰라. 애초에 나한테 그런 걸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겠냐?”

“……어제 오전이요?”

내 물음에 매니저 형이 백미러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백미러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시선이 마주쳤다. 내 눈빛에서 근데 그걸 왜 지금 말하냐는 뜻을 읽기라도 한 건지 매니저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화난 건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나한테 이러는 거 그냥 화풀이야.”

“네?”

“내가 뭘 알겠냐고. 나도 피해자야.”

“…….”

뭔 소리를 하는 거지?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깜박거리고 있는데 매니저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지, 그럴 때마다 내가 그냥 가까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한테 화풀이할래? 너 인마, 그거 갑질이야. 알아?”

“저 화 안 냈는데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매니저 형이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그냥 말이 그렇다고! 내가 뭘 알아, 나도 그냥 일개 매니저인데!”

매니저 형을 보고 있으면 강수민이 떠올랐다. 왜 내 주변에는 저런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자들밖에 없을까? 어차피 이성적인 대화는 불가능할 거 같아서 그냥 네네, 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는데 매니저 형이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가 그냥 아주 봉이지. 이래서 담당 연예인을 잘 만나야 되는데, 에휴.”

“…….”

“이진혁이랑 김강 그 새끼 때문에 나까지 그냥 따라서 나락이야, 나락. 씨발, 그깟 한우가 뭐라고 거지새끼도 아니고…….”

귀를 닫고 최대한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보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눈앞에 불이 튀었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백미러로 매니저 형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매니저 형의 눈에도 불꽃이 튀었다.

“뭘 봐, 이 새끼야! 내가 틀린 말 했어!”

“가만히 있는 애들 얘기는 갑자기 왜 꺼냅니까? 그리고 그때 진혁이랑 강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거지새끼니 뭐니 그딴 소리를 하세요.”

“뭐, 이 새끼야? 그딴 소리?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딴 소리?”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욕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으려니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백오식이 속 좁았던 걸 왜 우리 애들한테 뭐라고 하시냐고요. 게임해서 상품 탄 게 죄예요? 처음 예능 나가서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해서 상품 탄 게 거지새끼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잘못한 일이에요? 다른 사람은 뭘 모르니까 그런 소리 할 수 있어도 다 아는 형이 그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냥 열 받으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뭘 그렇게 죽일 듯이 덤벼들어? 야, 거의 다 왔으니까 거울이나 한 번 더 봐.”

그 말에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도로 삼켰다. 정말 다 온 건지 차가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나는 속으로 몇 번 심호흡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형, 애들한테 그러지 마세요. 걔들이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고 안 그래도 그때 일 때문에 진혁인 약까지 먹었어요. 그냥 해 본 말이든 실수든 장난이든 뭐든 간에 그런 소리 쉽게 하지 마시라고요.”

말을 하다 보니까 또 열이 받기 시작했다.

당시에 데뷔하고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우리는 단체로 예능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그때 같이 출연했던 사람이 백오식이었다.

백오식은 아이돌이었다가 영화배우로 전향하고 처음 찍은 영화가 대박이 난 천만 배우였다. 그 뒤로 공공연하게 자신이 아이돌이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며 이야기도 잘 하지 않으려고 했고, 아이돌을 무시하는 발언을 많이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이 우리와 같은 명절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그때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두 명이 한 팀이 되어 영화와 음악 위주의 퀴즈 문제를 맞히면서 최종적으로 남은 사람이 상품을 타는 그런 프로였다. 나랑 유노을이 같은 팀이었고 이진혁과 김강이 같은 팀, 그리고 백오식을 포함한 다른 연예인들까지 제법 수가 많았다.

나랑 유노을은 초반에 떨어지고 이진혁과 김강은 백오식 팀과 결승까지 올라갔다. 최종적으로 이진혁과 김강이 우승하고 한우 세트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때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아니, 뭐 연장자에 대한 예우 같은 것도 없고 선배에 대한 공경도 모르고……. 나 때는 뭐 그런 거 받으면 당연히 선배님들부터 챙겼는데 요즘 애들은, 쯧.’

오늘은 숙소에 가서 한우 파티를 하자고 방방 뛰던 우리의 귀에도 다 들릴 만큼 제법 큰 소리였다.

‘아니, 내가 틀린 말 했어? 요즘 이게 문제야. 어린 애들이 뭣도 모르고 춤추고 노래만 부르다가 데뷔하니까 예의를 모르잖아. 사회생활도 한 번 안 해 보고 그저 주변에서 우쭈쭈 해주기만 하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어린놈의 새끼들이.’

방송이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스튜디오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연예인부터 스텝들까지, 당황해서 서로 눈치만 보다가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같이 출연했던 개그맨 중 한 명이었다.

‘에이, 선배님. 왜 그러세요.’

‘그렇잖아. 개그맨이면 더 잘 알지 않나? 개그 뭐 그쪽에는 아직도 기합 받고 그런다며? 물론 폭력이 나쁘긴 하지만 말로 하면 못 알아듣는 놈들도 있는 거야. 다 선배들이 잘 되라고 그러는 거지, 뭐 재밌자고 기합을 주겠냐고.’

‘…….’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스튜디오는 다시 싸늘해졌고, 그중에서 몇몇은 인사를 하고 먼저 가겠다며 나가기도 했다. 개그맨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억지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백오식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래서 내가 신인들이랑 같이 일을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애들이 예의를 모른다고, 예의를. 아득바득 이겨 먹으려고나 하고 뭐 받아도 예의상 말이라도 선배님 하면서 챙겨야지, 그저 좋다고 시끄럽게 누가 딴따라 새끼들 아니랄까 봐…….’

그 말에 이진혁과 김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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