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90)

24화

직원이 커다란 호두파이 한 판을 6조각으로 잘라서 가져왔다. 정우진에게 한 조각 주고 나도 한 조각 가져와 손으로 들고 먹는데, 포레스트의 담백하고 고소한 호두파이와는 다르게 이것도 너무 맛있었다.

평소에 단 걸 별로 안 먹긴 했지만 이 정도로 맛있으면 단것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나게 단 건 아니고 그냥 살짝 은은할 정도라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포레스트랑 호두 공장 호두파이는 내 안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막상막하였다.

한 입 크게 먹고 또 한 입 먹고 다시 한 입을 먹으니 한 조각도 다 끝이었다. 정우진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세 입 만에 호두파이 한 조각을 조지는 날 놀란 눈으로 보다가 자기도 손으로 들고 먹기 시작했다.

긴가민가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정우진은 내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왜 따라 하는 거지? 뭐 옷 입는 스타일이나 생활 방식이나 그런 걸 따라 하는 것도 아니고 호두파이 손에 들고 세 입 만에 조지기 이런 걸 도대체 왜 따라 하는 거야…….

기어이 한 조각을 세 입 만에 먹은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그건 안 쓰고 맛있니?”

“…….”

혹시라도 또 뿜을까 싶어서 슬쩍 의자 등받이에 등을 바짝 붙이고 묻자 정우진이 호두파이로 가득 찬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또 한 조각을 내 접시에 덜어 줬다.

정우진은 내가 두 번째 호두파이를 다 먹을 때까지도 아직 처음 입에 잔뜩 넣었던 호두파이를 씹고 있었다. 아까 밥 먹을 때도 조금씩 입에 넣어서 정말 꼭꼭 씹어 먹던데 그 큰 호두파이를 입에 욱여넣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햄스터처럼 부풀어 있던 볼이 좀 홀쭉해지긴 했다. 정우진은 세 번째 호두파이를 내 접시에 덜어 주더니 그제야 입 안에 있는 걸 전부 삼켰다. 그리고 고구마라테를 홀짝홀짝 마시는 정우진에게 혹시 턱에 쥐는 나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걸 참고 정상적인 질문을 했다.

“넌 무슨 빵 좋아해?”

“저 호두파이 좋아해요.”

“그거 말고 다른 건?”

내 물음에 정우진은 한참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입을 열었다.

“소금 빵이요.”

“아, 소금 빵? 그거 맛있지. 진혁이가 소금 빵 엄청 좋아해서 맛집 많이 알고 있던데 다음에 물어보고 알려 줄게.”

“…….”

정우진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할 때 정우진은 이런 식으로 꽤 자주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고는 했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고 그냥 시선을 내리기만 해서 당황스럽긴 했으나 그다음에 또 금방 다른 말을 하는 걸 보면 그냥 버릇인 것 같았다.

“선배님은 멤버들이랑 많이 친하세요?”

내리고 있던 시선을 슬쩍 올려 나를 보며 정우진이 물었다.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만큼 당황스러워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웃었다.

“당연히 친하지. 같은 그룹인데. 너는 안 친해?”

가끔 기자나 타 직종 사람들이 멤버들끼리 정말 다 친하냐고 물어보기는 했었는데 정우진이 이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표정이나 말투가 기자가 물었을 때처럼 너네끼리 왕따 시킨 적 없냐고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아무런 말도 하질 않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나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너는 별로 안 친해?”

“…….”

“…….”

또다시 침묵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좆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당황하다가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원래도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얼음만 입에 넣고 씹어 먹고 있는데 정우진이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내가 마실 걸 주문하려는 줄 알았는데 커피가 아니라 우유 한 잔을 주문했다.

우유만 따로 팔기도 하나? 고구마라테도 좀 남았는데 우유를 또 시키네. 그런 걸 보면 우유를 정말 좋아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이 가자 정우진이 내게 말했다.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우유 드세요.”

“……그게 내 거였어?”

“네, 호두파이 드실 때 흰 우유랑 먹어도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 말을 정우진한테 했었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 정우진에게 물었다.

“너희도 숙소에서 다 같이 지내?”

“아니요, 저랑 유한결은 나왔고 박이삭이랑 김지우는 아직 숙소에서 지내요.”

“…….”

활동명이 아니라 본명으로 들으니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표정을 숨기질 못했는지 가만히 나를 보던 정우진이 별말 없이 다시 말했다.

“저랑 사한결은 나왔고 일미르랑 이솔은 아직 숙소에서 지내요.”

“아…….”

이름만 바뀌고 내용은 그대로 다시 말하는 걸 들으며 그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혼자 살아?”

“네, 다음에 놀러 오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심심할 때 오셔도 돼요. 갑자기 잘 곳 없을 때 오셔도 되고 그냥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마음대로 오세요.”

또 급발진하는 정우진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다가 그걸 무시한 채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따로 살았어? 너희 데뷔하고 지금 2년 좀 넘었지? 같이 안 지내서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 아니야? 그리고 지금은 또 휴식기이기도 하고…….”

“선배님은 멤버들이랑 언제부터 숙소에서 같이 살았어요? 혹시 독립하실 계획은 없으세요?”

자기 얘기를 하기가 좀 부담스러운 건지 아니면 말해 놓고도 좀 아니다 싶었는지 갑자기 정우진이 대화의 주제를 내 쪽으로 돌려 버렸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난 독립할 생각 없지. 뭐 스케줄도 그렇고, 돈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좀…….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게 많아서.”

“스케줄은 왜요?”

“스케줄 다 같이 잡히면 매니저 형이 이 집 갔다 저 집 갔다 그래야 하잖아. 픽업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기도 하고……. 지금은 같이하는 스케줄이 없긴 한데 그래도 굳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보다 가장 큰 건 돈 때문이었다. 지금 집값이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도 굳이 멤버들이랑 따로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하겠다.

연습생 시절부터 계속 같이 있어서 그런가? 이젠 그냥 가족 같기도 하고…….

나는 직원이 가지고 온 우유를 마시면서 호두파이 한 조각을 더 먹었다. 정우진은 처음 한 조각을 먹은 다음부터는 호두파이에 손도 대고 있지 않았다.

그걸 보니 갑자기 정우진이 커피를 마시고 뿜었던 게 떠올라 불안해졌다. 얘 혹시 호두파이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먹으니까 따라 먹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정우진이 금방 내 시선을 피하면서 멋쩍은 표정으로 제 뺨을 만졌다. 그러더니 다시 힐끗 날 보고 배시시 웃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웃음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웃어?”

“선배님이 계속 쳐다봐서…….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그, 아무튼 나는 별로 독립할 생각은 없어.”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혹시 독립할 예정이거나 혼자 사는 걸 경험해 보고 싶으시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저희 집에 비는 방 많이 있어요.”

“…….”

뭔 소리지? 설마 같이 살자는 뜻인가? 근데 아무리 정우진 집에 비는 방이 많아도 내가 거길 들어가면 그게 독립인가? 그냥 멤버들이랑 같이 살다가 정우진이랑 같이 사는 걸로 바뀌는 거 아니야?

아까 놀러 오라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도 정우진은 화법이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떡볶이 먹을 때도 그러더니…….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표정이 진지했고, 진담이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해서 반응하기가 힘들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계속 그랬던 것처럼 그냥 대충 넘길 건 넘기면서 대답했다.

“그래, 갈 곳 없으면 월세방 하나 내줘.”

“월세 안 내도 되고 관리비랑 생활비도 안 내셔도 돼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생활비도?”

월세랑 관리비는 그렇다 쳐도 생활비는 그냥 내가 개인적으로 쓰는 돈인데?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떴다.

“제가 생활비 드릴게요.”

그 말에 그냥 별생각 없이 웃다가 문득 그건 스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하신 거 말씀해 주시면 제가 다 사 드릴게요.”

아니, 이 정도면 스폰이 아니라 그냥 노예인가? 진지하게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부처님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진이랑 나는 유머 코드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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