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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22/190)

22화

우리가 밥을 먹는 사이에 비가 그쳤는지 해가 쨍쨍했다. 선글라스를 다시 쓸까 하다가 들고 다니기가 귀찮아서 그냥 대충 자동차 안의 사이드포켓을 열어 그 안에 넣었다.

“선배님, 호두 공장 가실래요? 오늘은 제가 예약도 해 놨어요.”

“예약을 했다고? 진짜?”

내가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거기 호두파이를 얼마나 좋아하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제 샀던 호두파이가 떠올라서 물었다.

“포레스트에서 산 건 먹었어? 그건 별로야?”

“아니요, 그것도 맛있었어요. 다음에 또 사러 가요. 이번에는 제가 사 드릴게요.”

“그래, 거기 사장님도 친절하시고 다른 것도 다 맛있어.”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보는데 문득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역국도 맛있었고 옥돔도 맛있었는데, 직원인지 사장인지 모를 그 사람 때문에 다시 가기도 애매해졌다.

“우리 미팅 언제쯤 한대? 들은 거 있어?”

다시 고개를 돌려 묻자 운전을 하던 정우진이 힐끗 나를 보더니 말했다.

“조만간 하지 않을까요? 저도 정확한 날짜는 못 들었어요.”

“매니저 형이 일단 그렇게 알고 준비하고 있으라고만 했는데……. 근데 너는……. 아니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할 말이 뭐냐고 물으려다가 운전하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말을 하다 말았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별말 없이 조용히 가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얼굴을 봤다. 조금 전보다는 부기가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좀 부어 있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많이 가라앉아서 다행이었다.

고개를 돌려 운전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니 쟤라도 선글라스를 끼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써도 가려질 얼굴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마스크만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나는 조금 전 사이드포켓에 넣어 뒀던 선글라스를 꺼내며 말했다.

“이거 네가 쓰고 나가.”

“제가요?”

“응, 사람들이 알아보면 편하게 못 있잖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랑 어딜 같이 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최대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만 하면 되는 건가? 적당히 유명한 것도 아니고 정우진은 거의 뭐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내가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조용히 가다가 띄엄띄엄 한두 마디씩 얘기도 하는 사이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선글라스를 가져갔다.

쓰려고 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내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워 주며 말했다.

“선배님이 쓰세요.”

슈퍼스타가 직접 씌워 준 걸 도로 벗기도 애매해서 그냥 어어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다행히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정우진이 예약했다고 말하자 직원이 가장 안쪽에 외진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정우진이 입구 쪽에서 등을 지고 있을 수 있는 자리에 앉히고 내가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이 하나도 없네. 여기 올 때마다 엄청 붐볐는데. 신기하다.”

혹시 방금 문을 연 건가? 신기한 마음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메뉴판을 보고 있는 정우진에게 물었다.

“호두파이 먹을 거야?”

“네, 선배님은요? 다른 거 더 드시고 싶으시면 드세요. 마실 건 어떤 걸로 시킬까요? 아이스아메리카노 드실 거예요?”

“어,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추가해서. 호두파이랑 다른 것도 먹어 볼래? 넌 호두파이 말고 또 뭐 좋아해?”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선배님 드시고 싶으신 걸로 드세요.”

그 말을 들으니 떡볶이 먹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처럼 정우진이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줬다.

“호두파이 두 개 시키고, 다른 건……. 음, 슈 먹을래, 브라우니 먹을래?”

“전 둘 다 괜찮은데…….”

“둘 중에 하나 선택해 봐. 네가 더 먹고 싶은 걸로.”

“그럼 두 개 다 시킬까요?”

결국 고르지 않고 두 개를 다 시키자고 한다. 정말 대단한 결정 장애가 아닐 수 없었다. 나도 점심 뭐 먹을지 고를 때 결정을 잘 못 하는 편이긴 했지만 정우진은 나보다 훨씬 더 심했다.

“그래, 그럼. 두 개 다 시켜. 마실 건?”

“저도 선배님이랑 같은 걸로요.”

“너도 샷 추가해서 먹어? 세 번?”

“네.”

고개를 끄덕이고 벨을 누르자 직원이 왔다.

“호두파이 두 개랑 슈랑 브라우니 하나씩 주시고, 아이스아메리카노 샷 추가 세 번 해서 두 잔 주세요.”

“샷 세 번 추가요? 저희 이미 샷 두 잔 들어가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총 다섯 번인데…….”

“네, 괜찮아요. 그렇게 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문을 받던 직원이 정우진을 힐끗 보더니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모습을 그냥 별 의미 없이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전 예능 한 번도 안 나가 봐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꼭 풀이 죽은 개 같았다. 나도 예능은 별로 나가 보지 않아서 초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정우진보다는 경험이 있으니 최대한 그때의 기억을 살려 말했다.

“막 뭘 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냥 몸을 맡기는 게 낫긴 하더라.”

“몸을 어떻게 맡겨요?”

“의욕 있게 하는 것도 좋기는 한데 그냥 편하게? 긴장하고 있으면 보는 사람도 그걸 다 느껴서 오히려 좀 불편해하더라고.”

나도 처음 예능 할 땐 의욕만 앞서서 실수를 많이 했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고, 평소에 입담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지라 계속 버벅거리고 혼잣말처럼 중얼중얼하다가 결국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같은 프로그램에 나왔던 선배가 좋은 말도 많이 해 주고 편하게 하라고 말해 준 뒤로 조금씩 괜찮아졌었다. 그 뒤로 고정 예능도 생기고 여러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자주 나가긴 했었는데 백오식이…….

“무슨 생각 하세요?”

오랜만에 떠올린 옛 생각에 빠져서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잠시 잊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우진에게 말했다.

“나도 엄청 많이 해 본 건 아닌데 그래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너랑 같이해서 다행이다. 혼자였으면 진짜 엄청 걱정했을 텐데.”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물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좋아요.”

“뭐라고?”

“저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선배님이랑 같이해서 너무 좋아요.”

목소리의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 정도면 거의 인간 염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당황해서 잠시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웃었다.

“너 근데 원래 좀 소심한 성격이야?”

내 물음에 정우진이 살짝 시선을 올려 나를 봤다. 어쩐지 불만스러운 눈빛에 나는 다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안 소심해요.”

“아, 그래?”

“…….”

정우진의 입술이 점점 앞으로 나오는 걸 보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웃다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안 웃은 척하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또 터졌다.

“지금 재미있으니까 그냥 이대로 하면 될 것 같은데?”

내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요?”

“예능 나가서. 지금 그냥 네 성격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지만 정우진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실 정우진 정도면 굳이 막 웃기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청률은 보장이 될 텐데,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국내에서는 더 받을 상도 없을 만큼 유명해졌는데 예능 프로그램 때문에 이렇게 고민한다는 게……. 나도 그렇고 우리 멤버들도 그렇고 BB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BB가 아니라 정우진만 예외인 건가?

“제가 낯선 사람이랑 있으면 말을 잘 못 해서…….”

그때 정우진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그게 소심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우진의 말을 경청했다.

“낯도 많이 가리고……. 프로그램 시작하기 전에 미팅도 하겠지만 스태프 분들이랑은 대부분 다 초면일 거고…….”

“그렇지, 그렇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아무런 말도 못 하면 어쩌나 싶고……. 선배님이랑 같이 나가는 건데 그러면 제가 폐를 끼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고…….”

“아니…….”

말하려다가 직원이 트레이를 끌고 오는 게 보여서 입을 다물었다. 커피와 디저트를 탁자 위에 놓고 직원이 돌아가자마자 나는 선글라스를 벗고 빨대로 커피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막 주눅 들어 있지 말고, 그냥 같이 힘을 모아서 역경을 헤쳐 나간다는 생각으로 하자. 나도 지금 예능 안 나간 지 2년도 넘었어. 네가 아니라 내가 폐를 끼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말하다가 갈증이 좀 나서 빨대를 빼고 유리잔을 들고 커피를 마셨다. 카페인이 몸에 들어가자 마치 생명수라도 마신 것처럼 갑자기 활력이 돌기 시작하면서 정신이 또렷해졌다.

벌컥벌컥 마시고 유리잔을 내려놓는데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정우진은 빨대를 들고 멍하게 나를 보다가 자기도 유리잔을 들었다. 그러더니 그걸 입에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 그렇게 마시는 건지, 그냥 날 따라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풉!”

“…….”

어떻게 피할 틈도 없이 얼굴로 시커먼 액체가 분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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