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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190)

20화

왜 또 선배님이라고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제 나지막하고 떨리는 숨소리로 형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솜털이 곤두섰던 걸 생각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래, 그럼 생각해 볼게. 나중에 끝나면 연락해.”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는데 유노을이 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물었다.

“형, 나중에 어디 가?”

“어, 왜?”

“나갈 때 선크림 발라.”

그 말에 나는 양손을 공손하게 아랫배에 대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예, 선생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혹시 일찍 들어오면 클렌징 오일로 꼭 씻고.”

“예, 예. 들어오자마자 클렌징 오일로 꼼꼼하게 씻겠습니다.”

내가 계속 허리를 숙이자 그걸 보고 있던 김강이 내 옆으로 오더니 똑같이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예, 예. 마마. 얼굴에 기름칠 꼼꼼히 하겠습니다.”

“넌 뭔데, 갑자기.”

“왜 나만 차별해? 난 씻을 때 기름칠도 하지 말라고?”

“기름칠은 뭔 기름칠이야, 진짜. 이 촌스러운 거인아, 식용유로 씻든가.”

또 슬슬 서로 시동을 걸고 있는 유노을과 김강의 틈에서 벗어나 목을 풀고 있는 이진혁에게 다가갔다. 나도 따라 목을 풀고 이진혁이 만든 자작곡도 들어 보고 연습도 했다.

사실 우리는 컴백할 곡도 없고 나온 노래라고 해 봤자 싱글 두 개가 전부였기 때문에 연습을 따로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이대로 끝날 것 같아서 매일 연습실에 나와 함께 이것저것 하고 있었다.

이진혁이 작사, 작곡한 노래를 대표님께 들려준 적도 많았지만 결과는 다 좋지 않았다. 노래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고 아직 좀 더 기다려 보라는 말만 2년째 듣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컴백도 못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해체할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지만 나도 멤버들도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번에 나가는 예능에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뭘 시키든 무조건 열심히 해야지.

“형, 근데 부기가 안 빠지는데?”

점심시간이 돼서 애들은 밥을 시켜 먹고 나는 옆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는데 이진혁이 말했다. 거울을 보니 아침과 별다를 게 없었다.

“나중에 숙소 가서 찬물로 세수 좀 해 봐야지.”

“선글라스라도 끼고 가. 화장대 서랍 안에 있어.”

유노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김강이 새우튀김 하나를 내게 주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 먹어.”

안 먹으려고 했는데 주니까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큼지막한 새우튀김을 한입에 넣어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진혁이 돈가스 한 조각을 내 입가에 댔다.

“이거도 먹을래?”

물어보면서 입 안으로 돈가를 밀어 넣었다. 또 하는 수 없이 받아먹고 유노을이 주는 김치볶음밥도 한 숟가락 얻어먹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모이 받아먹는 새가 될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서 나와 숙소로 걸어가는데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숙소에 도착하자 갑자기 먹구름이 가시더니 해가 쨍쨍 빛났다. 뭔가 이상해서 핸드폰으로 일기 예보를 확인했지만 딱히 비 소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비였나?

옷을 벗고 샤워를 하면서 정우진이랑 뭘 먹으러 가야 할지 고민했다. 평소라면 그냥 아무 데나 가서 먹었을 테지만 정우진을 데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룸에 들어가서 우리끼리만 먹을 수 있는 곳에 가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 얘기도 나올 것 같으니 최대한 조용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씻는 동안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와서 정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 미역국 좋아해?]

일하는 중이라 금방 못 읽을 줄 알았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아서 답장이 왔다.

[네, 엄청 좋아해요. 미역국 드시고 싶으세요?]

[얼마 전에 친구가 전복 미역국 맛있게 먹었다고 한 가게 있거든. 거기 갈래? 반찬도 잘 나온대.]

[좋아요. 지금 숙소예요? 제가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에 계세요.]

[괜찮아. 그냥 가게 앞에서 보자. 주소 보내 줄게.]

위치를 검색해서 문자로 주소를 보내자 전화가 왔다. 정우진이었다.

“어, 왜.”

-선배님, 저 이제 곧 끝날 것 같은데 제가 데리러 갈게요.

“아니, 여기서 별로 안 멀어서 괜찮아. 버스 두 정거장 거리밖에 안 돼.”

-그래도…….

“주소 보내 준 거 받았지?”

물었지만 정우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조금 더 기다리다가 혹시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액정을 확인했다. 통화 시간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걸 보면 전화가 끊긴 건 아니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내 목소리 안 들려?”

-아니요, 들려요.

“나 언제쯤 나갈까?”

-한 삼십 분 뒤에 나오시면 될 것 같아요.

“알았어. 나중에 봐.”

-네.

전화를 끊고 머리도 말리고 유노을이 신신당부했던 대로 선크림도 잔뜩 바르고 옷도 입으니 시간이 남았다. 그냥 좀 빨리 가서 기다리자는 생각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아직도 눈이 땡땡 부어 있는 게 보였다.

좀 적당히 부었으면 그냥 나가겠는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한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결국 선글라스를 챙겼다. 평소에 잘 쓰질 않아서 어색하긴 했지만 들고 다니면 언젠가 쓸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쓰고 나왔다.

분명 나올 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길에 거짓말처럼 하늘이 흐려졌다. 조금 전에도 이래서 설마 비가 오는 건 아닌가 했는데 정말 빗방울이 떨어졌다.

최대한 빨리 정류장까지 가려고 했는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물이 바닥에 물안개가 생길 정도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자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가게 앞 차양 막 안으로 비를 피하며 황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도 이렇게 비가 오다가 금방 그쳤으니까 이번에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비가 멎을 줄 알았는데 10분이 지나도 빗줄기는 줄어들질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도로에 택시도 보이질 않았고 근처에 편의점도 없어서 우산을 살 만한 곳도 마땅히 없었다.

그냥 뛰어가자니 비가 너무 내려서 옷이 다 젖을 것 같아 곤란해하고 있는데, 정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지금……. 혹시 밖이세요?

“어? 어, 나 지금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지금 어디세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아까 오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나는 괜히 택시가 없나 도로를 몇 번이나 더 훑어본 다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럴래, 그럼? 우산도 없고 근처에 편의점도 없고 택시도 안 보여서 안 그래도 계속 가게 앞에서 서 있기만 했거든.”

-어떤 가게요? 위치가 어디예요?

“여기……. 그, 우리 숙소에서 버스 정류장 가는 길에……. 여기가 군이네 식당 앞이거든?”

-잠시만요, 지금 가고 있어요. 숙소에서 별로 멀지는 않죠?

그 말에 그렇다고 하려다가 뭔가 이상해서 혹시나 하고 물었다.

“너 지금 우리 숙소 앞이야?”

-네.

“뭐? 왜? 거긴 왜 갔는데? 가게 앞에서 보자고 했잖아.”

-선배님, 혹시 제 차 보이세요?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자동차가 천천히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어어, 지금 바로 갈게.”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은 다음에 세차게 내리는 비를 뚫고 가볍게 뛰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걸로 닦으세요.”

“어, 고마워.”

“저기에 오래 계셨어요?”

“한 십 분 정도? 너한테 전화 오기 전까지 그냥 비 맞고 가야 할지 엄청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손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으며 말하는데 좋은 냄새가 났다. 손수건에서 나는 건가 싶어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대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저한테 전화하시지…….”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다음에는 갑자기 비 오거나 눈이 오거나 너무 덥거나 추워서 걷기 힘드시면 저한테 전화해 주세요. 제가 바로 갈게요.”

그 말에 내가 웃자 정우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짠데…….”

“이거.”

물기를 다 닦고 손수건을 건네자 정우진이 그걸 받아 잠시 보다가 내게 물었다.

“선배님, 근데 선글라스는 왜 쓰고 계세요?”

그 말에 나는 정우진을 멀뚱멀뚱 보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아까 너무 갑자기 비가 와서 순간 내가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는 것도 깜빡했다. 벗고 보니 선글라스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게 보였다. 비 오는 날 물방울 맺힌 선글라스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 만약 누가 날 봤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아니, 눈이 부어서…….”

“눈이요? 눈이 왜요?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니,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영화를 보는데 엄청 슬픈 거야. 그래서 좀 울다가 잤더니……. 이것도 좀 가라앉은 거야. 아침에는 진짜 못 봐 줄 정도였어.”

“영화 어떤 거요? 영화 보는 거 좋아하세요? 저도 좋아하는데 다음에 같이 영화 보러 가실래요? 어떤 장르 좋아하세요? 저는 전부 다 좋아해요.”

또 시작된 질문 폭격에 나는 대답하기 전에 일단 심호흡을 몇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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