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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190)

18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난 딱히 가리는 거 없이 다 좋아해. 엄청 달거나 비리거나 그런 것만 아니면……. 대충 아무거나 잘 먹어. 너는 뭐 좋아하는데?”

-저는 선배님이 드시고 싶은 걸로 먹을게요. 그럼 비빔국수랑 또 뭐 좋아하세요?

“난 진짜 다 잘 먹으니까 네가 좋아하는 걸로 해. 근데 거기 가면 요리 재료는 다 있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구해서 먹어야 하나?”

-저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자급자족하면서 지내는 거라고 하던데……. 그래도 기본적인 재료들은 다 있을 거예요, 아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이런 대화가 너무 시기상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미팅도 한 번 안 하고 캐스팅이 확정된 것도 아닐 텐데 너무 이른 고민 아닌가? 파일럿이면 도중에 자잘한 것들은 변경될 확률도 높아 보이는데……. 정우진이 원래 평소에 준비성이 뛰어난 편인가?

-비빔국수랑 같이 먹을 건 뭐가 좋으세요?

“음……. 고기? 해산물도 괜찮고 그냥 야채만 있어도 되고……. 너는 뭐 좋아하는데? 나는 다 좋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었다. 그냥 유통 기한 안 지나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건 달고, 비리고, 누린 것만 빼면 그럭저럭 다 잘 먹었다. 못 먹는 건 아니지만 안 좋아하는 건 회나 육회처럼 날것은 잘 안 먹고, 그 외에 다른 건 딱히…….

내가 또 뭘 못 먹더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여보세요?”

-네?

“왜 말이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양이나 염소의 울음이 생각날 정도로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통신 상태가 안 좋아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는 건가 싶어 핸드폰 액정을 두어 번 탁탁 때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필기 중이라서…….

“필기? 무슨 필기?”

얘 혹시 학교 다니나? 사실 같은 소속사이기는 했지만 사적인 부분은 나도 아는 게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선배님 말씀하시는 거요.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 어떤 거 좋아하는지, 그리고 안 좋아하는 것도…….

“…….”

아니……. 아무리 내가 어렵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까? 세심? 세심한 건가? 아무튼 방송에서 보는 거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뭘…… 필기까지 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닌데…….”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럴 거면 그냥 녹음을 해, 차라리.”

내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자 정우진이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놀랐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다음에는 그럼 녹음할게요.

“…….”

목소리나 말투나 장난치는 것 같지 않고 정말 진지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리다가 그냥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녹음해. 녹음 좋지…….”

-네, 선배님. 아까도 비빔라면 드셨다고 했는데 그건 뭐랑 드셨어요?

“아까? 대패삼겹살이랑 먹었어.”

-그럼 저희도 가서 고기랑 같이 먹을까요?

“그래, 고기 있으면 그렇게 같이 먹자. 없으면 다른 거랑 그냥 아무렇게나 먹어도 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고기는 어떻게 먹는 거 좋아하세요? 구워 먹는 거, 아니면 삶아 먹는 거?

“난 둘 다 좋아해.”

-삼겹살로 할까요? 아니면 소고기도 괜찮은데. 닭고기도 괜찮고……. 저는 선배님이 드시는 거 아무거나 다 좋아요.

“나도 고기는 그냥 아무거나 다 좋아.”

-정말요?

“어? 어…….”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 보니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대화지? 거기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이런 걸 지금 정할 필요가 있나? 그냥 가서 재료 보고 대충 아무거나 먹는 거 아닌가?

-선배님 혹시 알레르기 있는 음식은 없으세요?

“알레르기? 딱히……. 아, 복숭아 먹으면 좀 간지럽고 그렇기는 하더라. 근데 막 엄청 심한 건 아니고.”

-네, 복숭아……. 저는 알레르기 있는 음식 없어요.

“아, 그래?”

-네.

정우진이 웃고 있는 건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근데 너 왜 선배님이라고 해?”

-네?

“인별에서는 형이라고 잘만 하더니.”

그냥 정우진이 편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또 이런 질문을 해 버렸다. 그것도 그럴 게 말투만 보면 엄청 깍듯한데 말하는 내용은 또 날 엄청 어려워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네…….

작고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 아무튼……. 너 저녁 안 먹었다고 했지? 저녁 먹고.”

-네.

“그래, 난 이제…….”

-선배님.

“어?”

-내일은 뭐 하세요?

“내일? 내일 연습실 가야지?”

딱히 정해진 건 없어서 그렇게 말하자 정우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럼 내일도 뵐 수 있을까요?

“내일 왜?”

-저희 뭐 먹을지 얘기도 해야 하고……. 제가 예능은 처음이라 너무 걱정이 많이 돼서 상담도 받고 싶고…….

예능은 나도 많이 나가 본 적이 없어서 초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런 리얼 버라이어티는 나도 처음이긴 한데……. 그래도 후배가 상담을 받고 싶다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몇 시쯤? 근데 너는 스케줄 없어?”

-오전에 잠깐 있긴 한데 오후에는 괜찮아요. 한두 시나 세 시쯤 어떠세요?

“괜찮아. 그럼 내일 연락해.”

-네, 감사합니다.

“어, 그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끊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정우진이 나를 불렀다.

-선배님!

“어?”

-…….

“왜? 여보세요?”

-그……. 내일 아침은 뭐 드세요?

“뭐? 아침?”

예상치 못한 질문에 좀 당황하다가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냥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먹지 않을까?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아침에는 보통 뭐 드세요? 밥 드세요, 아니면 빵 드세요? 아침에 선식만 먹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선배님도 바쁘거나 입맛 없을 땐 그렇게 간단하게 드세요?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 폭격에 나는 인터뷰하는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어, 나는 밥 먹지. 가끔 빵 먹을 때도 있고. 선식은 그냥 시간 없을 때 가끔 먹거나……. 자주 먹는 편은 아니야. 샐러드랑 닭 가슴살만 먹을 때도 있고…….”

-그럼 아침에 밥 먹을 때도 점심이나 저녁에 먹는 것처럼 그렇게 드세요? 아니면 간단하게 반찬 몇 가지만 놓고 드세요?

“그냥 평소에 밥 먹는 것처럼……. 고기 먹을 때도 있고, 라면 먹을 때도 있고.”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정우진이 추임새처럼 아, 그렇구나, 네, 같은 말들을 덧붙였다. 아침에 뭐 먹는지도 다 말했고 이제 더 할 말도 없어서 끊으려는데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선배님! 그럼 아침에 빵 드실 때는 어떤 빵 드세요?

“빵은 그냥……. 그것도 아무거나 먹어. 식빵 있으면 식빵 먹고 모닝빵 있으면 그거 그냥 먹고……. 야, 근데 이런 건 왜 자꾸 물어봐?”

이쯤 되니까 혹시 지금 내가 취조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평소에 뭐 드시는지 궁금해서……. 식빵 하나만 구워 드세요? 버터 발라서? 잼도 발라 드세요? 토스트 같은 것도 드세요?

“……어, 버터 있으면 버터에 굽고 마가린 있으면 마가린에 굽고…….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식빵만 구울 때도 있고…….”

-잼은요? 무슨 잼 제일 좋아하세요?

“…….”

핸드폰을 잡은 손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확인하니 배터리도 별로 없었다.

“난 그냥 아무 잼이나 다 좋아해. 너무 단것만 아니면……. 근데 잼보다는 그냥 먹는 걸 더 좋아하고, 토스트도 가끔 만들어 먹어. 안에 내용물은 그냥 그때 집에 있는 걸로 넣는데 얇은 슬라이스 햄이나 치즈 넣고 양배추 있으면 계란 구울 때 같이 넣어서 굽고, 소스는 케첩이나 마요네즈나 스리라차나……. 그냥 있는 걸로 마음대로 넣어. 모닝빵은 인스턴트 수프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냄비에 끓여서 찍어 먹고, 아니면 냉동실에 있는 너비아니 구워서 같이 먹거나 그래.”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빠르게 구구절절 말하자 정우진이 잠시 당황한 것처럼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이상 정우진이 뭘 물어볼 수 없게 모든 걸 완벽하게 답변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더 궁금한 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알았지?”

-네…….

“그래, 나 이제 배터리 없어서…….

-선배님!

“…….”

그때 정우진이 또 나를 다급한 목소리로 간절히 불렀다. 그 부름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혹시 이번에는 내일 점심 뭐 먹을지 물어보는 거 아니야?

-안녕히 주무세요…….

미련이 철철 흘러넘치는 목소리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혹시 할 말이 있는데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서 자꾸 밥 얘기나 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순간 내가 너무 전화 끊고 싶어 하는 티를 많이 낸 건가 싶어서 머쓱한 목소리로 물었다.

“야,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그러고 보니까 오늘 만났을 때도 강수민 그 새끼 때문에 얘기도 제대로 못했던 걸 떠올리니 갑자기 너무 미안해졌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근데 우진이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그래, 우진아. 별일 있는 거 아니면 내일 만나서 얘기하자. 나 진짜 배터리가 없어서 그래.”

-네……. 근데 충전기 꽂고 통화할 수도 있지 않아요?

“…….”

-농담이에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제가 연락드릴게요.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소리에 말문이 막혀 있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그래. 너도 잘 자.”

-네…….

“어어, 끊는다.”

-좋은 꿈꾸세요, 형.

“…….”

끊어진 전화를 계속 귀에 대고 있다가 천천히 팔을 내렸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손을 보니 솜털이 곤두서 있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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