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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190)

15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려는데 문자가 왔다. 들고 있던 커피를 컵 홀더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확인하자마자 좋았던 기분이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300만 보내 봐]

“…….”

번호를 저장해 놓지 않아서 이름도 없이 그냥 핸드폰 번호만 뜬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옆에서 정우진이 말했다.

“어디 가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래서 잘 다니지는 못하고 가끔 드라이브하거든요. 좋은 드라이브 코스 많이 알고 있으니까 선배님도 심심하시거나 답답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그럼 제가 바로 갈게요.”

“…….”

“가는 길에 뭐 간단하게 먹어도 되고, 아니면 오늘처럼 드시고 싶으신 거 사서 차 안에서 먹어도 되고…….”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정우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이곳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온 사방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연락을 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두 달도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그 돈을 다 썼다는 건가. 화내고 욕하면서 일한다고 하더니 또 하다가 금방 관뒀거나 아예 시작도 안 한 것 같았다. 안 봐도 뻔했다.

[계산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보내]

[씨발 쪽팔리게]

[보내라고]

[빨리]

[빨리보내라]

연달아 울리는 진동에 정우진이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입을 열었다.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는데 다음에 봐도 될까?”

“…….”

소풍을 가는 아이 같던 표정이 점점 당혹감으로 물들어 가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우진은 잠깐 나를 보다가 말없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러더니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급한 일이 생겨서.”

“혹시 회사 일이에요? 저번에 저희 사진 찍힌 거 때문에 한 소리 들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거 때문에 그런 거면…….”

다급하게 말하는 정우진의 말을 끊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야.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미안하다. 내가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 사 줄게.”

정말 미안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있는데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자꾸 진동했다. 내가 아무런 답이 없어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다음에 보면 되죠.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숙소로 갈까요?”

“아니야, 그냥 내려서 택시 타고 갈게. 미안하다, 진짜.”

“저도 정말 괜찮으니까 근처까지라도 데려다 드릴게요. 택시 타고 가는 것보다 훨씬 빠를 거예요.”

“진짜 괜찮아.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고 금방이야.”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팔을 뻗어 한 손으로 내 무릎을 꽉 잡았다.

“심각한 일은 아닌 거죠?”

“…….”

아픈 건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워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손을 뻗어 정우진의 손을 떨쳐 내며 말했다.

“어, 그냥……. 집안일이야. 이건 네가 들고 가서 먹어. 너 호두파이 좋아한다며.”

호두파이와 크럼블을 다시 종이봉투 안에 넣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득 정우진이 사 온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나 마시라고 사 온 거니까 들고 가야 할 것 같아 커피를 잡으며 물었다.

“커피 잘 마실게.”

“…….”

정우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살짝 돌리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가 않아서 의아한 표정으로 잠시 정우진의 뒤통수를 보다가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나중에 연락할게.”

내 말에 그제야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내 착각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조금 전보다 창백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계속 데려다준다고 해서 좀 곤란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중에 연락 주세요. 조심히 가세요.”

“어, 어……. 그……. 아무튼 미안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괜찮아요. 안녕히 가세요.”

“으응.”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문을 닫기 전에 다시 한번 정우진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별말이 없어서 입을 열었다.

“너도 조심히 가.”

“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차는 가 버렸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에는 없어져 버린 곳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도 핸드폰은 계속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정우진이 사 준 커피를 빨대로 죽죽 빨아 마시면서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꼴도 보기 싫은 전화번호를 가만히 응시하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이, 씨발 새끼가. 전화를 왜 지금 받아! 너 내 문자 못 봤어? 봤잖아! 봤는데 왜 씹어, 개 같은 새끼야!

전화를 받자마자 폭격처럼 쏟아지는 육두문자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떼고 커피를 빨다가 답답해서 뚜껑을 열어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돈 보내라고!

“카드는?”

얼음을 씹으면서 묻자 다시 큰 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돈부터 보내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겠어? 내가 분명 지금 계산 기다리고 있다고 했냐, 안 했냐? 어? 씨발, 쪽팔리게 그 앞에 서서 핸드폰만 보고 있어야 돼, 내가?

“카드 긁으면 되잖아. 현금으로밖에 계산이 안 돼?”

-말 존나 많아, 씨발! 일단 돈부터 보내. 어? 돈부터 보내고 얘기……. 네? 아, 지금 통화 중이잖아요. 계산한다고요, 한다고. 왜 이렇게 재촉이야. 누가 안 산대? 아, 씨발. 사람을 존나 들들 볶네. 야, 너 여기 직원이야? 일한 지 얼마 안 됐지? 씨발, 매니저 불러와.

“…….”

-매니저 안 불러? 매니저 부르라고, 씨발!

“지금 어디…….”

점점 커지는 소리에 듣다못해 물었지만 그사이 이미 전화는 끊어져 있었다. 이걸 다시 걸어야 돼, 말아야 돼. 한참 고민하다가 그래도 뭔 일 생기면 결국 뒷수습은 다 내가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전화했지만 신호음이 다 갈 때까지 받질 않았다.

“하아.”

아주 잠깐 사이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커피는 어느새 다 마시고 얼음도 다 씹어 먹어서 빈 플라스틱 컵만 손에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뭉게구름과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날씨도 좋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찐득찐득한 오물이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있다가 멀리서 빈 택시가 오는 게 보여 팔을 들었다. 그리고 차에 타서 또 한숨을 내쉬며 지긋지긋한 곳으로 출발했다.

***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리자 낡은 아파트가 보였다. 그 앞에 서서 아파트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피곤한 얼굴로 나도 인사를 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가질 않고 내 옆에서 머뭇거렸다. 나는 속으로 나오려는 욕을 삼키고 물었다.

“형이 또 새벽에 시끄럽게 하던가요?”

“아, 뭐……. 그것도 그렇고 자꾸 화장실이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서 민원이 많이 들어오네요.”

“제가 한 번 말해 볼게요.”

“그래요. 저희가 몇 번 찾아갔는데도 알겠다고만 하고 듣지를 않으시네. 윗집이 얼마 전에 이사를 왔는데 화장실에서 담배 냄새가 너무 난다고 살 수가 없대요.”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하는 경비 아저씨를 보면서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말해 볼게요.”

“어휴, 학생도 정말 고생이 많겠어……. 진짜.”

경비 아저씨랑 살갑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릴 때 이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 뒤부터 오랫동안 오며가며 인사를 했다. 강수민 그 개망나니 새끼 때문에 나도 경비 아저씨도 고생한 게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를 전우처럼 대했다.

“아, 맞다. 이제 학생 아니라고 했지. 내가 자꾸 깜빡하네.”

“괜찮아요. 편하신 대로 불러 주세요. 다음에 올 때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 와서 드려야지 했는데 오늘 급하게 온다고 저도 깜빡했네요.”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하자 경비 아저씨가 고개를 흔들면서 손사래 쳤다.

“마음만으로도 고맙지. 괜찮으니까 그런 거 사 오지 마요.”

그 뒤로 몇 마디 더 안부를 묻다가 나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고 경비 아저씨는 다시 순찰을 가셨다.

어릴 때부터 우리를 봐 왔고 사정도 다 알고 있는 사람이랑 대화를 해서 그런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화를 내면 뭐 하나. 나만 손해다. 더는 그 인간 때문에 내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에 9층으로 올라갔다. 낡고 해진 우유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내 안으로 들어가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집에 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고 불을 켜니 이게 사람이 사는 집인지 돼지우리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진짜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너무 지저분하고 더러워서 내가 그냥 치울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치워 봤자 며칠만 지나면 또 돼지우리가 될 게 뻔했으니까.

“하.”

머리가 지끈거려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바나 하는 쓰레기 새끼가 사람을 무시하고 있어.”

“…….”

강수민은 내가 집에 와 있는데 놀라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털썩 널브러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넌 눈깔이 그게 뭐냐? 누가 보면 네가 형인 줄 알겠다, 씹새끼야.”

그러더니 대낮에 술 처먹은 주정뱅이처럼 내게 시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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