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90)

9화

뭔가 좀 이상한 거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전화를 한 목적은 달성했으니 그거면 됐다.

“어, 그래. 그럼…….”

-선배님.

“어?”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오늘 저 때문에 죄송해요.

“…….”

주어를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풀이 팍 죽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음에는 매워서 죽을 것 같아도 절대 안 울게요.

그 말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좀 맵기는 했지. 나도 울 뻔했어.”

-차라리 선배님이 울어서 제가 기합 줬다는 말이 나왔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그래, 다음에는 내가 울어 볼게. 아무튼 네가 잘못한 거 없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떡볶이 먹다가 매워서 그런 거라고 말도 했으니까 그냥 그러다가 말겠지, 뭐.”

말하고 보니까 웃겼다. 떡볶이 먹다가 매워서 울었는데 그게 사진 찍혀서 기합 줘서 후배 울린 짤로 둔갑하다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우진은 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쭉 이어지는 침묵에 뭐라고 하려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매니저 형의 전화였다.

“나 전화 들어와서 이제 끊어야 돼. 아무튼 진짜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네, 문자 보낼게요.

문자를 왜 보내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더 물어볼 시간이 없어서 대충 알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받자 매니저 형이 다짜고짜 한숨을 내쉬었다.

-너 오늘 우진이랑 같이 있었어?

“네.”

-걔 운 거 진짜야?

“네, 떡볶이 배달이 잘못 와서…….”

아까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했는데 매니저 형이 내 말을 끊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주야, 일 더 커지기 전에 빨리 사과를 하든 뭘 해서 마무리 짓자.

“네? 무슨 사과요?”

-너 이러다가 전에 있었던 일까지 끌려 나오면 또 어쩌려고?

“아니,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무슨 사과를 해요? 떡볶이 먹다가 매워서 운 건데.”

떡볶이를 먹여서 대단히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하나? 황당해서 한 말에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

아, 씨발.

할 말은 많았지만 속으로 욕을 삼키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 형이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 새끼야,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뭐? 잘못한 게 없는데 무슨 사과를 해? 내가 지금 너한테 그딴 소리 들으려고 전화한 줄 알아? 지금 논란 나고 있는 게 사실이 아니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니야! 그냥 그렇게 가만히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 끝이야?!

낮고 조용했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지막에는 폭탄처럼 터졌다. 나는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떼고 있다가 말이 다 끝난 것 같아 다시 귀에 붙이고 입을 열었다.

“네, 그러면 제가 글 써서 올리겠습니다.”

-이 새끼는 꼭 소리를 질러야 말을 들어, 씨발. 야, 너 대표님이 너한테 전화하려는 거 내가 중간에서 막아 줬더니, 그런 건 고마운 줄도 모르고……. 하, 이런 일 터지면 과거에 있었던 일까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딸려 올라오는 거 몰라?

“압니다.”

-그러니까 좀! 괜한 소리 안 나오게! 잘 좀! 하라고! 어?!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 형은 우리가 데뷔할 때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인데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좋을 땐 잘 대해 주다가도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욕도 하고 때리기도 해서 이럴 땐 그냥 네네 얌전히 대답하는 게 최고였다.

-자필 편지로 쓰고 내용 다 쓰면 캡처해서 보내. 네 마음대로 써서 올렸다가 또 말 나오게 만들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하……. 서주야, 이 바닥은 그냥 뭐 하나 잘못해서 눈 밖에 나면 끝인 거야. 상대가 대중이든 연예계 관계자든. 너도 알잖아. 백오식 잘못 건드려서 너희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났으면서도 그걸 몰라? 그때 씨발…….

매니저 형은 벌써 이천 번도 더 들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자필 편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필 편지는 개에바 아닌가? 매운 떡볶이 먹어서 울었다는 얘기를 무슨 자필 편지까지 써서 해……. 하여튼 이 인간도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조용히 있으라고. 조용히 연습하고 있으면 대표님이 어련히 알아서 너희 안 챙겨 줄까.

“네, 알겠습니다.”

근데 편지라는 말도 웃기지 않나? 그냥 자필 입장문 정도가 맞지 않나? 뭐라고 써야 할까?

배달 미스로 보통 맛 떡볶이가 불지옥 맛 떡볶이로 잘못 왔는데 저희는 그걸 모르고 한 입 먹어 버렸습니다. 너무 매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세가온은 울면서 쿨피스 한 통을 다 마셨고, 저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너갱이가 나간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울면서 먹었는데, 그게 사진으로 찍힌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히 죄송합니다.

-야, 너 듣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뭐?

“네, 듣고 있어요.”

뭘 쓸지 생각하면서 기계적으로 대답하다가 하마터면 매니저 형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는 걸 들킬 뻔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하게 대답하자 매니저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좀 하자. 제발.

“네.”

-이 새끼는 끝까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를 안 하네. 내가 앓느니 죽어야지. 어휴, 끊어!

“넵.”

공손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그제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별의별 거지 같은 일을 다 겪었는데, 매운 떡볶이 먹어서 울었다고 사과하는 일까지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어차피 해야 될 거 빨리 끝내 버리자는 생각에 종이와 연필을 찾으려고 하는 그때, 현관문이 열리면서 유노을과 김강이 나타났다.

“뭐야? 왜 벌써 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유노을이 신발을 벗으며 검은 봉지를 흔들었다.

“일정 변경됐음.”

“진혁이 형 오면 하자. 라디오 끝나고 집에 오면 여덟 시쯤 된대.”

“…….”

아니, 나 지금 자필 입장문 써야 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어떤 말도 못 하고 있다가 검은 봉지 안을 확인하니 잘 익은 샛노란 레몬 4개가 들어 있었다.

“레몬 씹어 먹는 걸 진짜 하게?”

내가 황당한 얼굴로 묻자 유노을이 소파에 봉지를 던지면서 말했다.

“어우, 나 일단 좀 씻을게. 너무 덥다.”

“나 먼저 씻을래. 난 운동하고 왔잖아.”

“거기서 씻고 오지, 왜 그냥 와?”

“형이 빨리 나오라고 난리난리 굿을 치니까 그랬지.”

화장실 앞에서 또 둘이 옥신각신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소파 위에 널브러진 검은 봉지를 가만히 보다가 그걸 다시 들었다. 상큼한 레몬 향을 맡으며 가만히 있는데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언쟁을 하던 유노을과 김강이 화장실 앞에 서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보니 얘들이 오늘 왜 이렇게 낮술 먹고 취한 주정뱅이들처럼 굴었는지, 굳이 레몬 씹어 먹기 같은 이상한 짓거리를 하자고 하면서 일찍 집에 들어온 건지 깨달아 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혹시라도 그런 댓글들 때문에 혼자 속상해하고 있을까 봐 그랬던 것이다.

댓글은 좀 놀라고 황당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을 쓴 것도 아니라 괜찮았는데, 조금 전 매니저 형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진 건 맞아서 어찌 됐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는 했다.

“그냥 둘이 같이 들어가서 씻어.”

들고 있던 봉지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유노을이 칠색 팔색을 하면서 진저리쳤다.

“아, 싫어! 얘 등치 산만 해서 완전 깔려 죽어!”

“아니, 내가 뭐 형을 밟고 서서 씻어? 깔려 죽긴 뭘 깔려 죽어? 그리고 내가 큰 게 아니라 형이 작은 거 아니야?”

“뭐? 작아? 야! 너 키 좀 크다고 형을 그렇게 무시해? 키만 크면 다야? 네가 형 해, 그럼!”

“어, 그래. 앞으로 형이라고 해, 석삼아.”

김강은 마지막으로 키를 쟀을 때 189cm쯤 됐는데 아직도 크는 중이었다. 지금은 더 크지 않았을까? 그리고 유노을은 176cm였나? 따지고 보면 작은 건 아니었는데 김강 옆에 서면 꼬마처럼 보이기는 했다.

아무튼 별 유치한 걸로 싸우고 있는 애들을 보고 있자니 억울하고 황당했던 마음도 조금씩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누가 먼저 씻을 건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둘을 지나쳐 주방으로 간 나는 레몬을 꺼내 물로 겉을 씻었다. 4등분해서 씹는 게 나으려나, 껍질을 다 벗기고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는 게 나으려나…….

“야! 하지 마!”

또 시끄러워서 고개를 돌리니 김강이 졌는지 화장실 밖에서 불을 껐다 켰다 하고 있었다. 등치는 산만 한 게 화장실 앞에서 자기 손바닥보다 작은 스위치를 똑딱똑딱하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걸 보고 있는데 문득 김강이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액정을 보던 그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아서 나는 젖은 손으로 레몬을 들고 다가가며 물었다.

“왜?”

“아니……. 세가온 라방 한다는데?”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그거 때문인가? 그거 때문에 라방을 하는 건가? 떡볶이 먹고 운 것 때문에?

“뭐? 세가온 라방 한다고?!”

그때 씻으러 들어갔던 유노을이 알몸으로 뛰쳐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더럽게 뭐 하는 짓이냐고 욕이라도 퍼부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유노을은 알몸으로 핸드폰을 찾아 라이브 방송에 들어갔다. 공식 계정이 아니라 평소에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그쪽으로 쓰는 개인적인 계정이었다.

벌거벗은 유노을과 등치 산만 한 김강, 그리고 한 손에 레몬을 든 나는 나란히 서서 핸드폰 액정만 쳐다봤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