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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관리된 고성에는 넓은 호수도 있고, 아름다운 정원도 있으며 동물들과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잔디밭이 있다고 했다. 마구간도 있고, 실내 화원도 있으며, 클래식한 차들이 잔뜩 모여 있는 차고에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발코니까지. 말 그대로 중세시대로 타임 워프한 기분을 물씬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말을 타면서 사냥도 즐길 수 있고, 호수에 배를 띄워 놓고 꽃놀이도 할 수 있으며……. 어쨌거나 고성에서는 즐길 것도 많고, 쉴 것도 많으며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마주한 느낌일 거라고 했는데…….
혜담은 살짝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흰 커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연인들처럼 노천카페에서 한가롭게 티타임을 가지고, 아름다운 강을 따라 손을 잡고 걸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노닥거리고 웃다가 근처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도 즐겼다. 와인까지 곁들인 만족스러운 식사 후…….
시작은 차 안에서의 사소한 대화였다.
[정말 총을 쏴 봤다고?]
[너 지금 대한민국 육군 만기 전역 병장을 무시하는 거야?]
[안 어울려서…….]
[처음 나타나서 멧돼지 잡는다고 사냥총 달라고 하던 너보다는 현실적인 말이지. 군인이 총 못 쏘는 게 말이 돼?]
[조준 사격이랑 플라잉 사격 또는 사냥이랑은 달라서 쉽지 않을 텐데?]
작은 자존심 대결이 결국은 야간 플라잉 사격이 되었다. 늦은 밤 야간 플라잉 사격을 준비한 고용인이 호수 위로 빛나는 원반을 쏘아 올리기 무섭게 원반은 허공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처음엔 사이좋게 한 번씩 번갈아 사격을 했지만 명중률은 30%를 넘지 못했다. 스테이크를 먹으며 함께 즐긴 와인 탓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서 깨는 레오의 명중률이 높아지는 것과 반대로 더 취해 가는 혜담의 명중률은 아래로 떨어지기만 했다.
[이거 무효야!]
[왜, 무효예요. 내기는 내기지.]
[이게 말이 돼? 넌 밥 먹듯이 총을 잡았고, 나는 전역하고 제대로 총도 안 잡아 봤는데!]
격차가 벌어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혜담은 총을 내려놓고 괜한 트집을 잡았다.
[아니야. 나도 한국 들어가고 거의 2년 넘게 총 잡아 본 적 없어.]
[2년이랑 10년이랑 같아? 어? 넌 그게 같아?]
내기 조건이 다른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이처럼 우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과 직결될 만한 내기 조건에 혜담은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 내에서 백발백중 명사수로 불리던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것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그럼, 이쯤에서 그만할까요? 벌써 차이가 6점이나 나는데.]
[무효라고.]
[싫어요. 누구 맘대로 무효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총을 내려놓는 레오를 본 혜담은 슬쩍 몸을 돌려 본성으로 향했다. 일단 거리를 두자. 그리고 빨리 잠들면 되잖아. 시간도 늦었고, 알딸딸하게 취기도 오르고, 오늘 하루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체력 소진도 많이 했으니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이대로 잠들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본성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걷던 혜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말 그대로 자연의 한가운데 제가 있는 것 같았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도시와 다르게 이곳은 시간이 멈춰 있는 곳 같았다. 작위적인 냄새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싱그런 자연의 냄새 사이로 눈치 없는 커피향이 불쑥 끼어들었다.
넌 너 좋아하고, 네가 잘하는 플라잉 사격이나 더 즐기라고!
[그런다고 내가 못 잡을까 봐?]
저보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뻔한 레오에게서 벗어나려 뜀박질을 하는 건 머리만 이불 속에 집어넣고 자신이 다 숨은 줄 아는 꼬미와 별다른 바 없는 짓이었다. 느린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던 혜담은 레오의 큰 손이 덥석 자신을 잡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 집요한 알파를 건드는 게 아닌데. 레오의 성격을 뻔히 알면서 거기 맞붙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을 탓하며 혜담은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레오야.]
[그래도 안 봐줘요.]
[나…….]
[안 들려.]
[오늘 비행도 길었고, 하루 종일 밖에, 윽.]
주절주절 늘어놓던 변명은 레오의 큰 몸짓 한 번에 쑥 들어가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어깨에 날 둘러메는 건 아니지!
[야!]
[내기에서 내가 이긴 거 인정해요.]
레오의 넓은 등을 퍽퍽 때리던 혜담은 자신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레오의 만행에 두 팔로 그의 등을 짚으며 상체를 최대한 세웠다.
[인정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한 번 정도 빼 줄지 누가 알아요?]
[그거나 그거나.]
자신을 둘러메고도 성큼성큼 걷는 레오 때문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버티기 힘들어진 혜담은 팔에 힘을 쭉 빼고 그의 어깨에 편안하게 제 몸을 의탁했다.
한참을 걷더니 계단을 오르고, 어딘가로 들어가 혜담을 테이블 위에 앉히는 레오의 행동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제 약속 이행해 줘요.]
혜담은 테이블 양옆을 손으로 짚고 상체를 숙여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레오의 말에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넌 가능하지만 난 불가능하다고, 솔직히 내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비슷한 실력이거나 한두 번 정도 제가 밀릴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도 여섯 번은 무리잖아. 어떻게 된 인간이 하룻밤에 여섯 번을 해! 하룻밤에 한두 번이면 딱 좋잖아. 그렇지 않아?
[좋다. 아까 말한 대로 한 번은 빼 줄게요.]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이나. 이미 과한 건 마찬가지야.
혜담은 다가오는 레오의 입술에 장난스럽게 입술을 쪽 맞추고 슬쩍 몸을 뒤로 물렀다.
[지금 뭐 하자는 거?]
이렇게 야한 페로몬 흘리면서 그렇게 눈 가늘게 뜨면 안 되지. 까딱하면 섹시한 그 얼굴에 넘어갈 뻔한 혜담은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그리곤 최대한 그에게 애처롭게 보일 만한 표정을 짓고는 두 손으로 레오의 볼을 감쌌다.
[딱 다섯 번이야.]
[…….]
대답 없는 레오에게 혜담은 정확히 다섯 번 담백한 뽀뽀를 해 주었다. 우리 아가들과 즐기는 그런 뽀뽀. 볼에 입술 도장을 꾹 찍을 때마다 매번 달이는 까르르 웃었고, 별이는 매번 새침하게 네가 정 하고 싶어 하니 그냥 받아 준다 같은 표정을 짓는 베이비 키스였다.
[됐…….]
역시 적당히 얼렁뚱땅 눈 가리고 아웅 같은 건 레오에게 통하지 않았다. 자신의 뒷머리를 감싼 채, 짙은 커피향으로 자신을 적셔 버리는 레오 앞에 혜담은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담백한 베이비 키스가 아닌 농염한 입맞춤과 함께 둘의 페로몬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하룻밤에 다섯 번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준 레오는 지금도 자신의 허리를 감싼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솔직히 하룻밤에 다섯 번은 아니지 하루 반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거 아닌가? 이른 아침의 어스름한 빛이 아닌 점차 짙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혜담은 레오의 팔뚝에 손을 댔다.
“……아……니…….”
단단히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팔을 풀어내려고 하자 불만 가득한 소리와 함께 더 꼭 끌어안는 레오 때문에 혜담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놔 봐. 숨도 못 쉬겠어.”
한껏 잠긴 목소리로 레오의 팔뚝을 토닥거려 겨우 빠져나올 틈을 만든 혜담은 느릿하게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레오는 커다란 몸을 꾸물거려 자신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굿모닝.”
“굿이브닝.”
레오의 인사를 정정하며 혜담은 옆에 있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뭐 하려고.”
“애들 잘 있는지 전화하게.”
혜담은 자신의 복부에 얼굴을 묻고 잠을 더 청하려는 레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 “맨날 애들만 생각해.”라는 레오의 말은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 아부빠빠-
여보세요, 라는 정상적인 말 대신 별이의 우렁찬 소리를 들은 혜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눈을 감고 있던 레오 역시 별이의 소리에 슬쩍 눈을 떴다.
― 잘 놀고 있어? 별이 달이는 잘 지내니까 우린 걱정하지 말고.
멀리서 들리는 시우의 목소리에 혜담은 “네. 저희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라고 대답했다.
― 우리가 힘들게 뭐 있어.
― 빠아…….
제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시우와 대화하는 걸 알아챈 별이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안녕. 별이. 뭐 하고 있었어?”
정말 제 말을 다 알아듣기라도 한 듯 별이는 제가 인형처럼 꼭 끌어안고 있던 것을 보여 주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의 꼬미가 별이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게 뭐 맛있는 것이라도 되는 듯 별이가 꼬미의 귀를 아프지 않게 물자 꼬미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달이는 뭐 해?”
이제 몸을 완전히 틀어 혜담과 휴대전화 화면을 같이 보던 레오의 말에 별이가 사라지고 한가하게 커다란 베어를 베고 누워 한 손으로 턱하니 젖병을 잡고 스스로 먹고 있는 달이가 보였다.
“……베어가 좀 편하긴 편하지.”
저보다 곱절은 아니. 어린아이들이 타고 다녀도 무방할 만큼 큰 강아지를 베고 누운 달이는 그 어느 때보다 편해 보였다. 베어 역시 소리가 나는 쪽을 보긴 했지만 큰 몸을 함부로 움직이진 않았다.
잠시 달이를 보여 주는 듯했지만 이내 별이 얼굴이 화면을 또 가득 채우자 혜담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별이,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달이도 잘 챙기고. 엄마, 아빠 갈 때까지 잘 지낼 수 있지?”
정말 말을 알아듣는 건지 고개를 끄덕거리던 별이의 얼굴이 갑자기 사라지고 화면엔 통화 종료 문구가 떠 있었다.
“……별이가 껐겠지?”
“아마도. 그런데 애들이 그렇게 좋아? 나보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시작된 페어의 질투에 혜담은 혀를 내둘렀다. 비교 대상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데 뭘 비교해.
“밥 먹을까?”
“아니. 빵…….”
이불 속에서 슬금슬금 움직이던 레오가 슬쩍 제 다리를 벌리며 하는 말에 혜담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뭐?”
“빠앙.”
말꼬리를 늘리며 레오가 이불속으로 파고들었고, 재빨리 몸을 피하지 못한 혜담은 이불을 황급히 움켜쥐었다.
“…….”
다급하게 레오를 말리고 침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다르게 혜담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밤새 그의 손길과 입술에 몸짓이 시달린 몸은 아직 그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레오는 곧바로 혜담이 잘 느끼는 곳만 입술로 건드리고 있었다.
가족들과의 담백한 통화로 평온하던 침실이 야살스러운 페로몬과 둘의 거친 몸짓과 숨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못난아.”
혜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움직이면서 말 걸면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잖아.
계속되는 쾌감에 감기는 눈을 겨우 뜬 혜담이 마주한 건 한껏 어두워진 초록 눈동자였다.
“우리 셋째 만들까?”
분명 안 돼, 라는 말을 해야 했지만 싱긋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강하게 파고드는 행동에 혜담이 할 수 있는 건 한껏 그를 품은 채 우는 것이 전부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