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ouble Shot(더블 샷)-85화 (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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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머리카락을 날리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혜담은 살짝 손을 옆으로 뻗었다. 싱그런 바람이 손바닥을 가득 채우고,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붐비지 않는 이차선 도로 양옆으로 높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이 시작되는 계절, 모든 것들이 생동감으로 넘쳤다.

“안 추워?”

“응.”

“닫을까?”

“아니.”

“추울 것…….”

쓰읍.

혜담은 당장이라도 버튼을 눌러 오픈카 지붕을 덮을 것 같은 손을 보고서야 옆 좌석에 있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돼. 돼. 감기 좀 걸린다고 안 죽어.”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말이 좋아 전폭적인 지지이지 실상은 그에게 쫓겨난 상황이었다. 별이, 달이는 생각지도 말고 일단 나가서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라는 그의 배려가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단둘이 있는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늘 혼자였다가, 결혼 후엔 항상 제 곁엔 레오가 있었다. 그와 단둘이 지내는 것이 익숙해질 때쯤 별이, 달이가 태어났고, 그 후로는 늘 대가족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관리인 몇 명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매일 관리인들이 방문하고 유모 두 명은 항상 같이 지냈다. 거기다 아이를 좋아하는 부모님까지 수시로 오시니 말 그대도 둘의 신혼집은 사람 사는 소리로 늘 왁자지껄했다.

씩씩한 알파 딸 별이와 조용하지만 섬세한 오메가 아들 달이는 성격도 취향도 정반대였다. 어린아이가 무슨 성격이 있겠어, 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둘은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도 또렷했다.

정식 이름은 올리비아 루이스, 올리버 루이스이지만 모두 별이, 달이라고 불렀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뽀얀 피부인 올리비아는 시우를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성격은 에반이나 레오와 똑같았다. 배 속에서는 어떻게 그 페로몬을 꼭꼭 잘 숨긴 건지 태어나는 순간 수술실에 가득 퍼지는 진한 체리향에 모두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성격도 자기주장도 어찌나 강한지 자신의 기분을 가득 담은 페로몬을 폴폴 풍기며 우렁차게 울어 대는 별이를 달랠 수 있는 건 시우와 혜담뿐이었다. 오직 시우와 혜담의 손에서만 얌전하고 착하며 귀여운 딸이 되는 별이와 달리 달이는 그저 순둥순둥한 아기였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영롱한 초록 눈동자, 포동포동한 귀여운 몸으로 잘 먹고 잘 자고 늘 방싯거리는 달이의 애칭은 천사였다. 생긴 건 에반과 레오를 꼭 닮았지만 성격은 천사 같은 시우와 혜담을 닮았다고나 할까.

이래도 좋아. 저래도 좋아. 별이보다 늦게 안아 줘도 괜찮고, 젖병을 늦게 줘도 괜찮으며 기저귀를 조금 늦게 갈아 준대도 달이는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아빠 품이든 유모 품이든 저를 안아 주고 돌봐 주는 모두에게 늘 해맑은 미소를 보여 주는 달이의 페로몬은 그와 꼭 닮은 달콤한 코튼향이었다.

그나마도 항상 붙어 지내는 별이의 체리향과 아이들 세제에서 나는 코튼향, 늘 먹는 분유에서 나는 우유향에 숨어 있었다.

모두에게 까탈스럽게 구는 별이도 달이에게만은 천사였다. 오히려 제 몫을 잘 못 챙기는 것 같은 달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끔은 제가 물고 있던 쪽쪽이도 선뜻 달이에게 내주기도 했다.

육아 중에도 혜담은 가끔 시간을 내 레오와 단둘이 영화를 보거나 외식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건 하루 중 몇 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을 떠나온 지 열두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자유를 만끽하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들 생각에 혜담은 손끝으로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안 돼.”

“뭐가?”

“지금 집에 연락하고 싶잖아.”

자신의 마음을 읽은 레오의 말에 혜담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두 아이 모두 옹알이도 잘하고 뒤집기도 잘하며, 별이는 벌써 혼자 앉기까지 하는데…….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여행 와서 계속 아기들만 생각하면 섭섭해.”

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혜담은 자신의 손을 슬그머니 잡는 레오의 손길에 피식 웃었다. 하다 하다 이제 애들한테도 질투하는 이 어린 남편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아닌데 네 생각 제일 많이 하거든.”

“거짓말.”

크고 따스한 손가락과 자신의 손가락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얽히고, 손을 꼭 잡았다가 놓는 장난을 치는 레오를 그제야 봐준 혜담은 “레오.”라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응.”

“우리 카페 들를까?”

지금 커피 한잔 마시면 좋겠는데 따뜻한 커피로 말이야. 솔직한 말을 덧붙이던 혜담은 레오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보고는 얼른 손을 털어 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내가 무슨 생각 했다고!”

“커피 마시고 싶다고. 커피!”

“응……. 커피.”

커피라고 말하면서 왜 손끝으로 본인을 가리키는 건데, 거기다 은밀하게 짙어지는 커피향에 혜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시우가 추천해 준 카페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유럽의 노천카페에 앉은 혜담은 카푸치노를 마시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1년 전만 해도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여행이라고 해 봐야 겨우 제주도나 꿈꾸던 제가 지금은 전용기를 타고 유럽 한복판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코맘이랑 대디가 여행을 왜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혜담은 카푸치노를 즐기는 자신과 다르게 아직 제가 감당할 영역이 아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아이 같고, 때로는 친구 같으며 때로는 제 옆을 지켜 주는 잘생긴 페어의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출근할 때처럼 관리한 모습이 아닌 지금처럼 편안한 모습이 더 좋았다.

바람에 제멋대로 머리카락이 날리도록 두고, 사람을 가두는 것 같은 정장이 아닌 편안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선글라스까지.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꼭 한 번 이상 레오에게 닿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은 사람들이 많은 곳은 피하셨잖아.”

“그거야 사람들 시선이 불편해서 그런 거지. 코맘이 쇼핑을 생각보다 좋아하시거든. 알지?”

웃음기 스민 레오의 말에 혜담은 작게 웃고 말았다. 집에 있는 별이 달이 물건들은 모두 코맘의 선물이었다. 이 집안 내력인지 레오도 어릴 적엔 핑크색 옷을 즐겨 입었다더니 코맘이 사 온 모든 핑크색 계열의 물건들은 고스란히 달이의 것들이 되고 있었다.

자기주장 강한 별이는 핑크색만 봐도 고개를 가로젓고, 그녀의 선택은 늘 블루나 그린이었다. 오려 핑크를 즐기는 건 달이었다. 모든 것에 순둥한 달이가 유일하게 탐내는 것이 핑크색 물건이라고나 할까.

어쨌거나 루나와 코맘의 도움으로 쇼핑을 늪에서 탈출한 혜담은 늘 그 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엔 우리도 자연으로 가 볼까?”

“사자, 코끼리, 기린이 보고 싶어? 아니면 오로라 캠핑?”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된 것 같지만 레오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둘의 기준은 너무나도 달랐다. 혜담이 떠올린 건 대부분이 영상으로 접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오의 기준은 직접 자기가 해 온 일이었다.

“동물 보는 건 아기들이랑 같이.”

“그럼 오로라 캠핑부터. 그런데 지금은 오로라 시즌이 아닐걸?”

곧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검색하는 레오의 행동력에 혀를 내두르며 혜담은 케이크를 조금 먹었다.

“또 하고 싶은 거 말해 봐.”

검색에 집중하는 것 같기에 레오에게 말을 걸지 않고 여유를 즐기던 혜담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의 시선에 못 이겨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바보온달에서 요술램프 지니가 되려고?”

“난 세 번이 아니라 무한하게 쓸 수 있어. 그게 더 좋잖아.”

“달 따다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달을 따지는 못하지만 갈 순 있잖아.”

말이나 못 하면, 진짜 말만 하면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레오이기에 혜담은 그의 입을 막으려 제가 먹던 포크로 케이크를 듬뿍 떴다. 단 것이 싫은 것인지, 먹기 싫은 것인지 작게 고개를 돌리던 레오의 입 안으로 성공적으로 케이크를 밀어 넣은 혜담은 때를 노려 말을 꺼냈다.

“넌 뭐가 하고 싶어?”

입 안에 가득 든 케이크 때문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아, 없다고. 지금이 충분히 만족스럽다는거지?”라는 말로 그의 대답까지 막아 버렸다. 짐짓 근엄해 보이는 표정과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제가 틀렸다는 의사를 전하는 레오를 보며 싱긋 웃고는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 밤엔 커피 실컷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꼬고 있던 다리를 슬쩍 움직여 레오의 다리를 톡 건들자, 앓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케이크를 좀 많이 밀어 넣긴 했지, 열심히 케이크를 먹은 레오가 작은 에스프레소 잔을 단번에 비워 냈다.

“내가 원하는 빵 원 없이 먹게 해 주면.”

자신의 제안에 오히려 역제안을 거는 레오를 보며 혜담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레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도대체 왜 내 보조개만 보면 그러는 거야? 그냥 흔한 보조개잖아.”

매번 의문을 가졌지만 질문할 타이밍을 놓쳐 번번이 묻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보조개 보일 때, 표정 거울로라도 제대로 본 적 있어?”

레오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엄지로 입가를 쓸어 주며 하는 말에 혜담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항상 거울을 보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솔직히 혜담이 자기 관리에 관심이 많거나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럼 오늘 밤에 실컷 보게 해 줄게.”

윙크와 함께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 레오를 본 혜담은 본능적으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밖에서 많이 놀고, 오래 놀고, 밥도 먹고 최대한 레오의 체력을 소진시키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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