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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담의 상황을 고려해 최대한 짧은 코스로 준비했다더니 결혼식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똑같은 흰색의 턱시도를 갖춰 입고, 마주 보고 선 레오와 시선을 맞추는 순간 울컥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저를 보고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혜담의 입꼬리도 덩달아 희미하게 올라갔다.
주례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레오의 ‘사랑해’라는 입 모양이 또렷이 혜담의 눈에 들어왔다. 레오가 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자신을 찾으러 온 이후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알콩이 달콩이와 셋이서 행복하게 살려던 자신의 계획은 모두 틀어졌지만 이제 혜담의 가족은 셋이 아닌 넷이 되었다. 넓게는 레오의 부모님까지 여섯.
혼자 지레짐작했던 것들은 모두 진실이 아니었다. 저를 싫어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부모님은 오히려 저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알콩이 달콩이도 건강히 잘 자라고 있었다. 레오가 가끔 철없이 굴어 난감한 것 빼고는 무엇 하나 불편하거나 힘든 것이 없었다.
저를 보자마자 청혼을 했던 꼬마와의 결혼식이라니. 세 번이나 엇갈리고서야 다시 만난 레오였다. 그리고 그와의 재회 장소에서의 결혼식이라…….
녹아들 것 같은 레오의 아름다운 눈동자에서 벗어난 혜담은 살짝 위를 바라보았다.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적당히 가리기 위해 머리 위로 드리워 놓은 얇은 천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은은하게 들리는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와 주례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천의 움직임에 따라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하기에 살짝 눈을 찌푸리자 레오가 살짝 자리를 옮겨 햇살을 가려 주었다.
“반지 교환이 있겠습니다.”
주례의 말에 천둥 번개 치던 날 얼렁뚱땅 제 왼손에 자리 잡았던 검은색 반지가 사라지고 어떤 무늬나 보석도 박혀 있지 않은 은색의 심플한 반지가 왼손 약지에 끼워졌다. 레오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던 혜담의 보조개가 깊어졌다.
”못난이 또 보조개 보인다.“
그 입 좀 다물라고. 혹여나 반지를 떨어뜨릴까, 아니면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잔뜩 긴장되어 있던 혜담은 능글맞게 속삭이는 레오의 목소리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걱정과 달리 반지를 떨어뜨리지 않고 레오의 손에 성공적으로 끼워 준 혜담의 입에서 작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지 교환에 이어 마지막으로 혼인 서약의 입맞춤을 하라는 주례의 말에 혜담은 황급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입맞춤이야. 입맞춤. 뽀뽀 쪽. 알지? 그러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밝은 야외에서 더 빛을 바라는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어리고 레오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혜담이 들은 건 사람들의 환호성 소리였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이 끝나고, 혜담은 레오에게 손을 꼭 붙들린 채, 방문해 준 이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씨처럼 부드러운 미소와 덕담에 저도 모르게 방긋방긋 미소를 띠고 있던 혜담은 잠시 사람들이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그것보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기억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닌데.”
“몰라도 돼. 나만 알면 됐지, 뭐.”
결혼식은 아니겠지만 어릴 때부터 파티를 즐겨 온 레오에게서 느껴지는 여유에 혜담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방금 인사를 나눈 이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그들이 레오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큰아버님, 큰어머님이었잖아.”
미리 언질해 주지 않은 원망을 담아 중얼거리며 혜담은 손에 힘을 줘 그의 손을 꽉 쥐었다.
“나만 알면 된다니까.”
제가 손을 꼭 쥐었다고 똑같이 제 손을 꽉 쥐었다가 얼른 놓는 레오의 장난에 혜담은 다른 손으로 그의 손등을 가볍게 때렸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쉴까?”
인사 거의 다 해 가는데 뭘 들어가, 겨우 두어 시간 밖에 있었다고 픽픽 쓰러질 만큼 나약한 체력 아니거든.
야외에 준비된 뷔페와 다과를 즐기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혜담은 자신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기를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낮춰 앉았다.
하얀색 드레스에 핑크색 리본과 장신구로 한껏 멋을 낸 꼬마 아가씨는 서툰 걸음으로 다다다다 뛰어오기에 혜담은 두 팔을 벌려 주었다.
“아찌.”
혜담은 알 수 없는 의성어와 함께 와락 안겨 오는 공주님을 안정적으로 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아, 오빠. 안지 마. 안지 마. 얘가 그래 보여도 13kg가 넘어.”
짧은 팔로 제 목을 감싸고는 찰싹 달라붙는 아기에게서 느껴지는 달콤한 우유 향에 덩달아 아기를 더 꼭 끌어안고 그 말랑뽀둥한 볼에 입을 맞추던 혜담은 기겁하는 루나의 목소리에 슬쩍 돌아섰다.
“하야…… 꼬…….”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기 역시 기분이 좋은지 하늘을 가리키며 종알종알 말을 하기에 혜담 “그래? 모? 뭐. 저거?”라고 대답해 주며 같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보안을 위해서 떠 있는 드론 외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 이거 본 적 있는데, 그러고 보니 살랑살랑 불던 바람이 조금 더 거세진 것 같았다.
“아기. 이리 와.”
아기와 함께 볼 때만 해도 멀리 있던 검은 먹구름이 너무 빨리 다가오기에 당황한 사이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레오의 품으로 넘어가 버렸다.
“저기 날씨가…….”
혜담은 빠르게 몰려오는 먹구름에 레오의 팔을 잡았다.
“오빠 결혼 축하해요.”
“고마워. 결혼식 준비도 고맙고, 정말 네 말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야.”
“다음은 우리 알콩이 달콩이 차례.”
루나의 말에 혜담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콩이 달콩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건 좋다만 낯간지럽게 무슨 베이비 샤워야. 그냥 조용히 넘어가 이러다가 결혼 100일 파티, 알콩이 달콩이 탄생 100일 이런 식으로 파티, 축제 같은 게 끝이 없을 것 같구나.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뭐?”
“예쁘다고.”
“네 입에서 나오는 예쁘다는 말은 전혀 좋게 들리지 않거든.”
만날 때마다 아옹다옹하는 루나와 레오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날씨 좋다며, 맑고 화창하고 오늘은 기준으로 앞뒤로 며칠간 비 소식 없었잖아. 아직 다들 하늘을 보지 못했는지 여유 있게 식사와 다과를 즐기는 이들을 바라보는 혜담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다들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실내에 뭘 준비해 뒀더라?
날씨가 워낙 좋아. 대부분의 준비를 야외에 해 두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폭풍우 치는데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라고 하기도 그렇고 폭풍우 끝날 동안엔 실내에 모두 있어야 했다.
“루나.”
“네, 오빠.”
“저기 구름…….”
루나에게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혜담은 제 코끝에 톡 떨어지는 물방울의 느낌에 손을 들어 코끝을 만져 보았다.
처음 코끝에서 느껴졌던 물방울이 이번엔 정수리에 톡 떨어졌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늘어났다. 아직 비구름이 몰려오지는 않았…… 멍청하게도 혜담은 제 등 뒤로 그리고 머리 위로 몰려온 먹구름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비구름은 저 앞 멀리서 오는 게 아니라 뒤에서 이미 잔뜩 몰려와 있었다.
“야아…… 아부야…….”
레오의 한 팔에 안겨 있던 아기도 비를 맞았는지 짧은 두 손으로 커다란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멈춰 선 채 하늘을 보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에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가 묻혔다.
“비 온다는 말 없었잖아. 오빠. 빨리 안으로…….”
레오의 품에서 아기를 받아 든 루나가 하는 말에도 혜담은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어서 들어…….”
처음엔 한두 방울이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고, 갑작스러운 소낙비에 혜담의 머리카락과 옷이 젖어 들었다. 저와 똑같이 비를 맞고 있는 레오를 보는 혜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사라지고 미소가 지어졌다.
뭐든 완벽한 것은 없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고 준비하지만 늘 알 수 없는 것에 휘둘리는 것이 사람이었다. 그건 인연일 수도 있고,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일 수도 있으며, 사소한 작은 감정일 때도 있다.
비가 오기 전까지 이 결혼식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실수도 없는 원활한 준비와 식의 진행. 음식, 음악, 초대된 사람들까지 뭐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먹구름이 나타남과 동시에 영화 속 한 장면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결혼식이 과연 망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혜담!”
혜담은 제가 꿈쩍도 하지 않자 자신의 머리 위를 큰 손으로 가려 주다, 결국 하얀 재킷을 벗어 제 머리 위로 비를 피할 공간을 마련해 주는 레오를 바라보았다.
얼른 들어가자니까 뭐 하고 있어? 라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자신을 달랑 들고 들어갔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직은 제게 시간적 여유를 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옆에서 종알거리던 루나도 아기 때문인지 먼저 들어가며 뭐라고 했지만 그런 건 혜담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혜담은 자신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오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먼저 가져다 대었다.
살다 보면 늘 행복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도 있고, 바람이 부는 날도 있겠지.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제 곁엔 레오와 아기들이 함께할 것이었다.
“레오 루이스.”
“응.”
입술을 맞닿은 채, 작게 이름을 부르자 레오는 얌전히 대답을 해 주었다.
“사랑해.”
진심을 담은 한마디에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닌 달콤한 키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