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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라는 지난 시간이 유유자적 천하태평 시계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은 삶이었다면 레오의 등장을 시작으로 혜담은 정신없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나타나신 그의 부모님과의 인사가 시작이었다.
시우가 방을 나가고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던 것이 바로 어젯밤 같은데 혜담은 제 앞에서 포트폴리오를 쫙 늘어놓고 있는 루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 진짜 간단하게 요약해서 왔거든요? 오빠는 선택만 하면 돼요. 생각하지 말고 손이 가는 대로 짚기만 해도 돼요.”
진짜 진짜 간단하게 요약했는데, 왜 네 뒤로 여전히 파일들이 잔뜩 쌓여 있는 거니? 거기다 나 선택 장애에 쇼핑과 관련된 것을 전혀 모른다는 걸 이제 넌 알잖아. 그런데 내가 이런 걸 다 해야 한다고?
“이게 간단하다고?”
“그럼요. 정 안 되면 메인 색만 골라봐요. 그럼 여기서 반이 줄 거야.”
혜담은 파일이 아닌 레모네이드 잔을 집어 들었다.
“어두운 색은 뺄게요.”
레모네이드 맛있네. 뱅쇼도 맛있더니, 어머님이 권해 준 것 치고 맛없는 건 없었지.
“너무 핑크핑크한 것도 싫죠?”
아, 오늘 디저트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은데 레모네이드에 약과가 어울릴 줄 누가 알았어.
“노란 계열은 햇살 받으면 잘 안 보이고.”
저녁은 뭘 먹을까? 곱창 먹는다 그러면 맨날 곱창이냐고 그러겠지? 불족발?
“블루? 그린?”
뭔가 시원하고 톡 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냉채? 아…… 냉채족발 좋다. 어디가 맛집이더라.
반을 베어 먹었던 약과를 한입에 다 집어넣은 혜담은 옆에 뒀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요즘 들어 왜 이렇게 먹고 싶은 게 많은지, 제 고집대로 섬에 더 있었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루나가 바로바로 보내 준다고 해도 몇 시간의 갭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검색창에 ‘냉채조’까지 쓴 혜담은 갑자기 제 품에 턱 하니 안기는 파일 때문에 검색어를 더 쓸 수가 없었다.
“오빠! 이거 내 결혼식 아니고, 오빠 결혼식이거든요!”
“응. 내 결혼식이기도 한데 레오 결혼식이기도 하잖아.”
“……그 시키는 오빠 말만 듣잖아요.”
이를 꽉 깨물고 하는 루나의 말에 혜담은 휴대전화를 슬그머니 놓고 제 눈앞에 있는 파일로 시선을 돌렸다. 시원한 느낌의 푸른색 계열로 장식된 야외 결혼식장 사진을 넘기던 혜담의 손이 한 곳에 멈췄다.
제가 머물던 섬 주위의 해변은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니 제가 있던 바다도 온통 초록색이었다. 색감이 단순한 자신은 초록색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다채롭던 색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시시각각 빛에 따라 온도에 따라 분위기나 주위 환경에 따라 바뀌는 바다색처럼 들여다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레오의 눈동자를 떠올린 혜담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슬쩍 올라갔다.
“선택 끝! 그런데 뭐 검색하고 있었어요?”
딱히 뭐라고 선택하지 않았지만 루나는 제가 들고 있던 파일을 쓱 들고 가 버렸다.
“냉채족발?”
“그건 또 뭐예요?”
“족발. 새콤하게 무친 거.”
“……한국 음식은 정말 놀랍다 놀라워. 뭐가 끝이 없네요.”
그래. 이것도 끝이 없네. 방금 선택 끝났다고 하더니 다시금 제 무릎 위에 올라온 파일을 본 혜담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냥 결혼식 안 하고 혼인신고만 하면 살면 안 되나? 난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이게 뭐야?”
고개를 젖혀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가 제대로 파일을 본 혜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갔다. 정말 당황스럽고 놀랍고,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몰려들었다.
“뭐긴 뭐예요. 아버님이 집 선물해 주시고, 어머님이 인테리어 해 주신댔잖아요. 그것도 빨리 끝나야 공사 들어가요.”
그때 그 말씀이 농담이 아니었어?
예전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던 집을 주신다는 말에 기겁했었다. 그 큰 집에 살라고? 그 새벽에 그 집을 몰래 나오면서 혼자 구시렁거렸던 것도 떠올랐었다. 컨디션 좋지 않을 때 물 한 잔 먹으러 부엌에 가다가 힘들어서 주저앉았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집에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정중히 거절을 했었다.
어머님이 “내가 말했지. 그렇게 큰 집은 파티할 때나 필요하고. 평범한 한국인들 기준으로는 방 4~5개 있는 2층집이 최대라고.”라는 말로 잘 말려 주지 않았다면 그 큰 집을 받을 뻔했다.
물론 “레오 덩치는 생각 안 해?”라는 말로 아버님이 반격 아닌 반격을 했지만 어머님은 코웃음 한 번으로 아버님의 의견을 묵살해 버리셨다.
“나. 그 집 안 받기로 했는데?”
잠시 그날 일을 떠올리던 혜담은 얼른 고개를 내젓고는 루나를 바라보았다.
“그 집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어서 보기나 해요. 로버트가 두 시간 뒤에 다른 미팅 있다고 그 전에 끝내 달라고 했거든요.”
“아…… 맞아. 그것도 있었어.”
잠시 얼른 힘내서 파일을 보고 끝내겠다고 다짐했던 것들이 무색하게 혜담은 소파에 몸을 더 깊게 파묻었다. 모두의 말대로 한 달만 고생하면 됐다. 제가 직접 다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레오의 집 거실에서 따뜻한 햇살 받으면서 선택만 하면 됐다.
문제는 제겐 이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루나는 아는 사람을 떠나 아주 친한 동생, 오빠 사이가 됐으니 이렇게 편하게 앉아 투덜거리기도 하고 일을 미루기도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겐 그럴 수도 없었다.
결혼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누가 알았냐고. 그냥 알아서 다 준비되어 있는 결혼식장에 결혼식 날 정장 갖춰 입고 들어가서 짧게 식 올리면서 동시 예식을 하든가 끝나고 나서 뷔페 먹는 코스 아니었어?
“힘들어?”
의지를 상실한 채, 제가 선택한 색을 중심으로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를 압축하고 있는 루나만 바라보던 혜담은 지금은 들어도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예의상 고개를 들어 문가를 바라봐 주었다.
“간단하게 하면 된다니까,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우리 못난이 힘들게.”
“장난해? 한 달 만에 결혼식 완벽하게 준비하라는 사람이 누군데. 그럼 네가 좀 하든가!”
역시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히 해 주는 루나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내던 혜담은 다가와 이마에 입 맞추는 레오의 볼을 한번 쓸어 주었다.
“왔으니까 이제 네가 하면 되겠다. 이거 인테리어 확인하랬거든.”
레오가 제 옆에 앉자마자 혜담은 형식적으로 제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파일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냥 1안으로 해.”
“야!”
역시 레오다.
한 장을 넘겨 보지도 않고 바로 1안을 선택해 버리는 레오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루나를 보는 혜담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걸렸다. 아무나 이겨라. 아니지. 오늘은 루나 이겨라.
“1안이 뭔지나 보고 말해.”
“전문가들이 뽑은 건데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어.”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지켜보며 혜담은 옆에 뒀던 레모네이드 잔을 들어 빨대를 쪽 빨아 마셨다.
“그러셔? 그럼. 네가 시킨 대로 한다. 후회하지 마.”
“난 우리 못난이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 읍.”
혜담은 레오의 뒷말이 무서워 손으로 턱 하니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못난이라고 하지를 않나. 요즘 들어 하는 말마다 닭살 돋는 것밖에 없어 위험한 말이 나올 것 같으면 이렇게 미리 막는 것이 상책이었다.
둘이 있을 때 그러면 듣는 이가 없으니 뭐 대충 털고 넘어간다 치지만 뜬금없이 닭살 돋는 말을 들어야 하는 타인을 위한 배려였다.
“내가 볼게. 보면 되잖아. 둘 다 그만 싸우고.”
레오를 향해 경고의 시선을 준 혜담은 레모네이드 잔을 레오에게 건넸다.
“미안.”
파일을 여는 것과 동시에 루나에게 사죄의 말을 건넨 혜담은 일단은 얌전히 있는 레오를 확인하고는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1안이 온통 핑크색인 줄 누가 알았나. 레오나 자신의 취향이 무채색인 걸 알 텐데, 결혼식이야 좀 화사한 것이 좋으니 다양한 색을 쓴다지만 온통 핑크핑크 꽃무늬 가득한 집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게 잘 보랬잖아요.”
“무채색으로 가면 안 될까?”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혜담은 진지하게 파일을 넘겨 보다 슬금슬금 움직이는 레오의 행동에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왜? 뭐?’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움직임을 딱 멈추고 시치미를 떼기에 혜담은 다시 파일로 시선을 옮겼다.
“애들 태어나는데 너무 무채색은 그렇지 않을까요? 참. 뒤쪽에 아기들 방도 있으니까 그것도 체크해 줘요. 제가 미리 말하지만 그거 선택 안 하면 어머님이 온통 핑크로 꾸밀지도 몰라요. 레오도 어릴 때 온통 핑크 천국에서 자랐거든요. 남자는 핑크라는 생각이 강하신 분이라.”
화이트과 그린을 메인으로 결혼식 포트폴리오를 압축하며 말하던 루나는 작게 아옹다옹하고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4인용 소파에 편히 앉아 있던 혜담이 레오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당장 내려 달라고 소리 없이 버럭거리는 혜담과 뭐 어떠냐고. 능글맞게 웃으며 그를 더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레오의 만행에 루나는 느릿하게 정리하던 파일을 덮었다.
“결혼 파일 정리해서 모레 약속한 시간에 올 테니까, 그때까지 인테리어도 잘 체크해 두세요. 그럼. 전 이만 갑니다.”
괜히 커플 사이에 끼여서 곤혹을 치르느니 그 자리를 떠나는 걸 선택한 루나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