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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소유의 섬을 그 누구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사람.
레오처럼 우연히 지나는 길에 들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린 혜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기 엔진이 멈추는 소리와 함께 심장도 함께 멈추는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레오와 단둘이서 바비큐를 즐기고, 결혼과 앞으로 살 집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모두 제겐 꿈같은 일이었다.
레오는 계속해서 확신을 주었지만, 그를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모두 자신의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서 나타난 환영 같은 것 말이다.
두 손으로 두르고 있던 블랭킷을 꼭 쥔 채 후원을 바라보고 있던 혜담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잠시 레오를 바라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진행될 것 같은데?”
대놓고 묻진 않았지만 레오 역시 혜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은 현실로 바뀌었다. 편안한 면바지에 셔츠, 그 위로 그에겐 큰 카디건을 걸친 한 남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에반, 오늘 누가 여기 온댔어? 고기 냄새나.”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이거 지금 다 옮겨 줘?”
“어? 응. 거기 내 옷 가방부터. 여기 왜 이렇게 추워? 따뜻하다며!”
냐아앙.
그 둘의 대화를 끊은 건 카디건을 걸친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작은 고양이였다.
“꼬미, 너도 추워?”
가까워지는 둘을 확인한 혜담은 황급히 걸치고 있던 블랭킷을 벗으려고 하다 제 어깨에 팔을 두른 레오가 방해가 되자 얼른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안, 안녕하세요.”
블랭킷을 제대로 내려놓지도 못한 채 혜담은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혜담 씨랑 레오 언제 왔어? 자기야. 여기 애들 와 있어!”
서로 갖춰 입고 만났던 파티 날에도 저를 편하게 대해 줬던 시우였다.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반갑게 이름을 불러 주고 다가온 그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여기 오실 줄 알았다면, 제가 피했을 텐데 결례를…….”
“무슨 결례. 너희 있는 줄 알았으면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갔지. 레오 넌 이 추운데 혜담이 밖에 둔 거야?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너나 에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해!”
블랭킷을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던 혜담은 갑자기 제게 고양이를 안겨 주더니 블랭킷을 잡아 제대로 걸쳐 주는 시우의 행동에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방 먹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안녕하세요.”
레오와 시우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던 혜담은 시우 뒤로 다가오는 에반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추울 텐데, 같이 들어가지.”
혜담은 제게 미소를 보이곤 자신의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려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는 뜻을 전하는 에반의 행동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래. 혜담 씨는 우리랑 들어가고, 양갈비 있어?”
“램 스테이크 드시게요?”
“응. 부탁해.”
순식간에 번개처럼 지나가 버린 인사가 남긴 것은 숄에 붙은 솔을 가지고 장난치는 하얀 고양이와 “못난이도 램 스테이크 먹을래?”라는 레오의 속삭임이었다.
“아니. 저기. 나는…….”
지금 분위기를 봐서는 레오의 부모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혜담의 흔들리는 시선은 머쓱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레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오, 헬기에 짐 있으니 그것도 좀 갖다 주고.”
앞서가던 시우가 돌아보면서 하는 말에 혜담은 안고 있던 고양이를 더 꼭 끌어안았다.
“나 혼자 들어가?”
“짐 챙겨 올 테니 같이 들어가자.”
그래. 고맙다 고마워.
정식으로 날짜 잡고 인사를 가는 거면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선물도 좀 사고. 격식이라는 것을 갖춰서 지금 상황을 잘 말씀드렸을 것이다.
두 분께는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서로 어느 정도 알고 만나는 것과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폭탄 같은 이야기를 듣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내가 오늘 씻고 난 뒤 머리를 만졌던가? 옷은?
그런 게 어딨어. 낮잠 자고 일어나 제대로 거울도 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몸에 딱 맞는 옷이 불편했다. 평소보다 살이 찐 것도 아닌데도 갑갑한 옷들이 싫어서 이곳에 지내는 동안 최대한 헐렁하고 큰 면 소재의 옷만 입고 있었다.
지금도 제 사이즈보다 한 사이즈 큰, 폭 넓은 트레이닝 바지에 오버핏의 면 티셔츠였다.
“지금 내 꼴이…….”
“외모, 배경, 재력 이런 것들 신경 안 쓰셔. 우리 못난이 존재만으로도 아주 행복해하시지.”
“그건 네 생각…….”
눈을 부라리며 레오가 실랑이하던 혜담은 제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냐아-’ 하며 솔을 가지고 놀던 고양이가 휘청하자 다급하게 고양이를 감싸 안았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아.”
그것도 네 생각이고. 더는 머뭇거릴 수 없기에 혜담은 미적거리다 헬기에서 캐리어를 가져오는 레오를 기다렸다가 그와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저, 괜찮으시면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말을 꺼낸 혜담은 고양이를 살짝 내려놓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아랫배를 감싼 혜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설프게나마 시간을 벌긴 했지만 여기 오래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양치도 하고, 차가운 물에 세수를 끝낸 혜담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잠시 바라보았다. 레오 말대로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모진 말을 들을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제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욕실을 나간 혜담은 자신을 확 감싸는 커피 향에 발걸음을 멈췄다.
“많이 놀랐지.”
앞으로 다가온 레오가 저를 감싸 안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혜담은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둘이서 속닥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것과 누군가가 아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것도 타인이 그의 부모님이라면.
“불편하거나 그러면 언제든지 말해.”
잘도 말하겠다. 나름 자신을 배려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신경이 날카로워진 혜담은 속으로 계속해서 삐뚜름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아까 너 양고기 굽는다며, 가서 고기나 구워. 사람 대하는 거 나 잘해. 그게 내 일이었는데 둘 다 이러고 있는 게 더 이상하겠다.”
마지못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레오의 등을 몇 번 토닥거린 혜담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옷장을 열었지만 놀러 오는 사람이 정장을 가져왔을 리도 없고, 그나마 제일 단정해 보이는 베이지색 면바지와 니트를 꺼냈다.
“부모님 우리 관계에 대해 아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시지. 그게 우리 못난이인 것도.”
레오의 대답과 함께 혜담은 들고 있던 옷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혹시 그럼…… 크리스마스 때도 알고 계셨나? 그래서 제게 그런 말을 해 주신 거?
복잡한 머릿속에 나오는 건 한숨뿐인 혜담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꺼낸 옷을 옆에 있는 의자에 툭 던졌다.
“뭐라고 안 하셨어?”
“빨리 보고 싶어 하긴 하셨지.”
입술을 꾹 깨문 채, 티셔츠를 벗던 혜담은 이상함을 느끼고는 끌어 올리던 옷을 다시 내렸다.
“그런데 너 왜 안 나가?”
“응? 왜? 같이…… 아! 갈아입는 거 도와줘?”
능청스럽게 다가와 옷 벗는 걸 도와준다는 레오에게 잡히는 대로 쿠션을 던져 방에서 내쫓은 혜담의 입에선 또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로 좋은 마음이 있어서 결혼을 할까 합니다.”
창밖으로는 별빛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따뜻한 벽난로가 온기를 주는 아름다운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상황 설명을 끝낸 레오만 덤덤한 표정이었고, 혜담은 고개를 숙인 채 들 수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기 고양이만 신나서 거실 카펫을 가지고 놀 뿐이었다.
“에반, 내일 변호사 좀 불러 봐.”
짧은 침묵을 깬 건 시우였다.
“어느 쪽 변호사?”
“저 시키. 호적에서 파 버리게. 아빠나 아들이나 진짜! 할까? 합니다? 하면 하는 거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두루뭉술해. 너 혜담이에게 프러포즈는 제대로 했어?”
갑작스러운 시우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든 혜담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왜 자신까지 들어가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반이었다.
레오가 호적에서 파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긴 했는데, 진짜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혜담 씨…… 아니지. 새아가…… 마음에 안 드는데, 아가라고 불러도 될까?”
딸꾹.
다리를 꼰 채, 발끝에 걸린 슬리퍼를 흔들고 있던 시우가 밝은 표정으로 아가라고 불러도 되냐는 말을 함과 동시에 혜담의 입에 딸꾹질이 터졌다.
“아니. 저기…… 전…… 어. 딸꾹.”
아가라니. 저기…… 제 나이가 절대 적지 않은 데다……. 아가는 진짜 제 배 속에…… 혜담은 그 사실을 아직 말하지 않은 레오를 바라보다 다시금 딸꾹질이 나오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