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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혼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데이베드에 레오의 팔을 베고 누운 혜담은 자신의 배 위로 무심하게 척 올라온 그의 손길에 몸을 흠칫 굳혔다.
“저녁은 뭐 먹을래요? 여기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건 뭐든 해 볼게요.”
한 달여를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만난 것이 어제인데 저와 다르게 레오는 전혀 간극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방금 아점 먹었는데 무슨 저녁 메뉴를 벌써 생각해.”
혹여나 레오의 손이 아랫배로 향할까 봐, 혜담은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올려놓았다.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아침처럼 진미채볶음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요.”
“있는 거 먹을게. 그럼 되잖아. 그런데 넌 언제 가?”
“어딜요?”
“회사. 날씨가 안 좋아서 잠시 들른 거잖아. 지금 보니 날씨 완전 괜찮아진 것 같던데. 아무리 일이 바쁘고 많다고 해도 그렇지 그 폭풍우에 돌아다닌 건 진짜 아니잖아. 그나마 여기 잠깐 들러서 궂은 날씨 피할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레오는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혜담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대고 있다가 어이없는 그의 질문에 피식 웃어 버렸다.
목숨 걸고 비행하고 항해할 만큼 열정적으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출장 가는 놈이 왜 반지를 들고 다녀!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지를 모르겠네. 일단 내가 사랑하는 거 알죠? 옆에 꼭 붙어서 평생 안 떨어질 것도. 그건 확실하게 이해했어요?”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던 혜담이 제 손등을 손끝으로 문질거리며 “응.”이라는 대답을 했다.
“우리 결혼하는 것도 맞고?”
“……네 부모님이 허락하시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고. 다음으로 주택에 살고 싶어? 아파트에 살고 싶어?”
“음…….”
“그럼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결혼식 준비는 루나한테 의뢰하면 되고. 또 뭐가 있나?”
느릿느릿 주고받던 대화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혜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레오는 블랭킷을 끌어 올려 그의 어깨까지 잘 덮어 주었다.
“진짜 그걸 다 한다고?”
잠이 든 듯 얌전히 품에 안겨 있던 혜담이 벌떡 일어나 앉는 모습에 덩달아 놀란 레오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것만 있을까? 앞으로 함께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둘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해서 미적거리는 혜담의 태도를 지적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정말 평생 옆에 붙어서 제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좋아하는지 그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여 주면 될 테니까.
“그걸 꼭 지금 먹어야겠어?”
레오는 어깨에 블랭킷을 두르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혜담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침에 연탄불에 구운 곱창이 먹고 싶다며. 연탄은 없지만 장작은 있고, 바비큐 장비도 다 있으니 곱창이든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먹고 싶은 대로 뭐든 구워 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평상은 아니지만 데크엔 테이블이 있고, 환한 달빛과 함께 은은한 조명이 있으니 마치 예전의 그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날이 싸늘하니 들어가서 기다리라니까 그걸 왜 못 기다려요.”
“널 어떻게 믿어? 너 요리 못 하잖아.”
“한식은 잘 못 해도, 양식이나 바비큐는 좀 한다고요!”
“장작 너무 많이 넣은 거 아냐?”
혜담의 잔소리에 레오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제가 준비해 놓은 것들 훑어보고는 야채를 좀 더 씻을까? 밥은 좀 전에 했지? 아침에 안 먹은 된장찌개를 먹자는 말까지 죽 이어지고 있었다.
불이 완전히 붙으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의 곁으로 다가간 레오는 챙겨 온 작은 난로부터 켰다. 그러고는 여전히 돌아다니고 있는 혜담의 어깨를 잡아 푹신한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혔다.
“곱창부터 구울까요?”
“또 뭐 있는데?”
“티본도 있고, 삼겹살도 있고. 일단 있는 고기들 다 준비는 해 놨죠.”
“……다 맛있겠다.”
“그럼. 다 구우면 되지.”
“그걸 누가 다 먹어?”
한마디 할 때마다 톡톡 튀어나오는 혜담의 말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떻게든 자신과의 거리감을 만들려던 혜담이었다.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는 것 같으면 ‘팀장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존댓말을 하던 그가 편안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저도 모르게 제가 따박따박 말을 올리고 있다고나 할까?
“내가. 우리 못난이는 먹고 싶은 것만 먹으면 되고.”
그릴 위에 티본 스테이크부터 올리고 고기를 하나씩 올리자 “버섯, 양파, 마늘.”이라는 말이 쏙 들어왔다.
“이렇게 먹고 싶은 게 많은데 혼자 어떻게 지냈어요?”
“지금까진 별로 먹고 싶은 거 없었어.”
레오는 아름다운 노을을 등진 채 앉은 혜담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질 수가 있지? 이미 지나간 두 번의 인연은 덮어 놓고 지난 늦가을 그를 만난 이후만 떠올린다고 해도 그를 향하는 제 마음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를 불편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의 환심을 사고 싶고, 그의 눈길을 한 번이라도 더 받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싶고, 그의 곁에 있고 싶고, 모든 것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치근덕거렸고, 그렇게 그의 곁에 제 자리를 점차 늘려 가기 시작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그에게 여유를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서나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제 요구에 그가 응해 주는 것이었다면 현재 혜담은 본인 스스로의 선택으로 제 곁에 있는 것이었다. 대디의 말대로 새장을 크게 짓는 것이 아니라 코맘의 말대로 그가 언제든 쉬고 머물 수 있는 나무가 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새장도 크게 지어 놓긴 했지만 뭐든 대안은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지 않은가?
“혜담아.”
“내가 세 살 더 많거든!”
자신을 봐주지 않고, 먼 바다를 보고 있는 그를 부르자 불퉁한 말이 돌아왔다. 우리 못난이라고 부를 때는 가만히 있더니 이름 부르는 건 안 되나?
“못난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일단 자신을 봐 주기에 레오는 씩 웃어 보였다.
“너 고기 태웠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온 혜담의 말에 레오는 웃으며 살짝 뒤로 물러나 주었다.
고기를 태우다니 그럴 리가. 다른 건 몰라도 바비큐만은 확실하게 한다고.
“이거.”
고기를 죽 둘러보던 혜담의 한마디에 레오의 손이 냉큼 움직였다. 취향은 어쩔 수 없는지 혜담이 제일 먼저 선택한 구운 곱창을 접시에 담으려던 레오는 그가 조금 더 다가오자 살짝 거리를 더 만들었다.
접시에 담아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제가 집게로 집은 곱창을 쏙 먹은 혜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고기는 이렇게 구우면서 먹는 게 맛있어.”
된장찌개에 밥에 쌈 채소까지 다 준비해 놓고는 그릴 앞에 서서 집게로 구운 고기들을 나눠 먹는 둘의 얼굴엔 연신 미소가 걸려 있었다. 레오가 혜담에게 먹여 줄 듯하다 제 입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넣자 혜담이 온몸으로 제 몸을 툭 쳐 왔다.
“추워?”
“아니.”
추운 건 아니라면서 블랭킷을 왜 그렇게 꼭 두르고 있대.
바비큐 앞에 서서 아옹다옹하며 대충 배를 채우고 나서야 둘은 테이블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생각나?”
“응.”
막연한 레오의 질문 쉽게 대답한 혜담은 술 대신 탄산을 마시고는 입맛을 다셨다. 곱창엔 소주인데……. 그때는 소주, 맥주 다 마셨으니 폭탄이었고.
“달이 예뻤어.”
“지금이 더 예뻐. 여긴 별도 엄청 많잖아.”
“나는 우리 혜담이가 더 예쁜데.”
“미친…….”
진짜 시도 때도 없이 훅 들어오는 레오의 말에 혜담은 기겁하며 방금 제가 싼 쌈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물거리며 먹으면서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레오와 눈을 마주쳐 제발 말하지 말라는 뜻을 눈빛으로 전하던 혜담은 낯선 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워낙 방음이 잘되는 건물이라 헬기나 드론, 배가 오가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칠 때도 실내만큼은 아늑했으니까. 하지만 제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들리는 소리는 헬기 소리였다.
루나가 보낸 드론 택배는 오후에 받았고, 이곳은 레오의 가문이 소유한 섬이기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집안의 허가가 있어야 된다는 설명을 들은 상태였다.
같이 웃으며 고기를 먹던 레오 역시 후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온댔어?”
“로버트는 사흘 뒤에 오기로 했지.”
이곳에서 길게 머물고 싶긴 했지만 혜담의 병원 진료도 있고, 레오 역시 퇴사하기 전까진 제게 주어진 업무를 이행해야 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레오의 표정 변화에 혜담은 입에 고인 침을 꾹 삼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