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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얼렁뚱땅 만난 것처럼 이별 역시 흐지부지 맺고 끊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련이 남지 않도록 적어도 제 가슴에 쌓인 말들을 다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이런 말을 할걸. 이렇게 잘해 줄걸. 저렇게 할걸. 혹시 내가 잘못했나? 무슨 문제가 생겼나? 같은 꺼내지 못한 말과 궁금증을 평생 안고 살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있는 것도 말했고, 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도 말했으며 이젠 그를 향한 원망이나 미련, 아쉬움 같은 복잡함 감정들을 모두 사라졌다.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말하는 혜담의 얼굴은 평온했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말을 끝마친 혜담은 레오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레오의 왼손에 있는 반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 손에서 반지를 뺐던 것처럼 그의 손에서도 그 반지를 빼내야 하는데, 그의 손을 건들 수가 없었다. 느릿하게 그가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드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온기 가득한 큰 손을 잡고 그의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면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 동안 느꼈던 그의 감정들이 거짓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정말 레오는 저를 아껴 줬고, 사랑해 줬다.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과 다르게 보고 싶다. 좋아한다. 너와 함께하고 싶다. 그런 말들을 수도 없이 했다.
처음엔 그가 제게 하는 못생겼다는 말에 당황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지만 이젠 그 말까지 좋아졌다. ‘어쩜 이렇게 못생겼을까?’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 가득한 장난기라든가 제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손길에 담긴 감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난 시작인데, 우리 못난이는 왜 끝만 보고 있을까? 나랑 그렇게 지냈으면서도 아직 나 몰라요?”
레오의 움직임이 커졌고, 지금껏 보고 있던 왼손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 묵직한 느낌이 들자 혜담의 시선이 절로 그리 향했다.
오른쪽 다리에 턱을 괴고 저를 올려다보는 레오와 시선을 맞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환한 햇살 아래서 저를 보고 싱긋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혜담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햇살에 금빛으로 반짝이고 싱그런 초록색을 띠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이 났다.
“회사 복직하지 않는 건 나도 찬성. 우리 못난이는 이제 날 모시는 직원이 아니니까. 대신 내가 평생 우리 못난이 모시고 살 기회는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내가 있는데 왜 평생 혼자이고, 알콩이 달콩이도 같이 키워야지 왜 또 혼자 키울 생각을 해? 뭐든 다 혼자 하려고 하는 그 나쁜 버릇 좀 고쳐요.”
가시가 잔뜩 돋은 자신의 말에 돌아오는 건 그 가시를 모두 녹여 버리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레오의 손이 쏙 들어갔을 혜담의 보조개에 닿았다.
“내가 보조개 보이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레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담은 꼭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아, 좀 더 그러고 있지. 말하자마자 바로 없애 버리냐?” 보조개를 건들던 손끝이 이번엔 입술을 건들자 혜담은 흠칫 그의 손길을 피하려 상체를 뒤로 물렀다.
“이거 봐, 이거. 잘 때는 솔직하면서 왜 해만 뜨면 이래요? 어제도 가지 말라고 내 손 꼭 잡고 잔 사람이 누군데. 내가 올 때마다 손 안 놔줘서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데. 그러면서 눈에 보이면 싫으니 귀찮으니 이런 마음에 없는 못된 말만 하고.”
짐짓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건만 늘 그랬던 것처럼 당황스러운 말로 자신의 혼을 쏙 빼놓은 레오의 손가락이 유연하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힘겨운 마음으로 겨우 뺐던 반지가 다시금 혜담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못난이는 솔직하게 말하는 법은 좀 배워야 해.”
방금까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레오가 쓱 일어나 옆자리에 앉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핑거푸드 하나가 혜담의 입 안을 꽉 채웠다.
“배가 고프거나 마음이 불편하면 못된 말 할 수 있으니까, 일단 먹고 낮잠도 자고, 쉬고 나면 기분…….”
입에 들어온 핑거푸드를 겨우 다 먹은 혜담은 “야!”라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왜요.”
레오의 대답과 함께 입 안으로 들어온 생크림 찍은 딸기를 먹게 된 혜담의 눈꼬리가 위로 쭉 올라갔다. 누구는 지금 고민하고 고민하던 것을 겨우 말했는데, 이 분위기는 뭐며.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이놈 지금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어? 내가 기회를 줬잖아. 기회를!
“너! 아기 싫어하잖아. 거기다 너는 오메가도 싫어하고, 그리고 내가 베타인 거 알면서 네 아기 가졌다는데 왜 이상하게 생각도 안 해? 내가 악의 품고 이런 식으로 네 발목…….”
조금 전까지만 좋게 좋게 고등교육을 받은 인간으로서 둥글게 말하던 혜담의 입에서 원초적으로 직선적인 말이 쏟아져 나갔다. 돌려서 말했는데 못 알아들으면 직설화법밖에 답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마저 속 시원히 하지 못한 채 혜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지다 온전한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그랬듯이 능구렁이처럼 유들유들 웃으면서 분위기를 무마시켜 가던 레오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은 것이었다. 업무상 사람들을 대할 때면 나오는 무표정한 차가운 얼굴이 아니라 표정 너머 깊게 담긴 감정을 읽는 순간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
둘 사이 침묵이 찾아오자 그 공간을 채운 건 파도 소리였다.
하.
숨이 막힐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를 깬 것은 레오의 허탈한 한숨이었다.
“난 그냥 너면 돼.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너. 나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지금도 날 그렇게 생각해요?”
차분한 레오의 말에 혜담의 고개가 양옆으로 움직였다. 짧은 침묵이 혜담에게 가져다준 건 방금 자신이 그에게 갖고 있는 선입견에 관련된 진위였다. 그가 정말 오메가를 싫어하는지, 자신을 파트너 정도로만 생각했는지, 자신이 정말 베타 비서여서 고용했는지 등등 많은 것들이었다.
저 혼자 생각하고 저 혼자 추측하고 저 혼자 그는 그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가 엄청난 집안의 외동아들이라서, 이렇겠지. 저렇겠지. 일반적인 사람들이 재벌에 대해 품은 많은 선입견 같은 것 말이다.
“내가 둔하고 멍청해서 빨리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페어가 제 아이를 가졌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알파는 없어요. 블라인드를 씌운 것도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도 나중에 다 충분히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마요. 어떤 모진 말을 하든 또 도망가서 숨든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찾고 나 받아 줄 때까지 기다릴 테니 그건 확실히 기억하고요. 그리고 페어 된 이상 그러지도 못해.”
혜담은 자신의 왼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시선을 맞춘 채 찬찬히 말을 하는 그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각인한 적도 없잖아. 블라인드는 또 뭐고.”
오른손으로 제 목덜미를 만진 혜담은 싱긋 웃는 레오의 표정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또 그에게 홀린 것인지 불안정하게 날뛰던 감정들이 그와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면 모두 사라졌다.
“그런 게 있어요. 어쨌거나 우리 못난이 도망가면 나 죽는다는 것만 확실히 알아 둬요. 또 모난 말 하면 그땐 진짜 화낼 거니까. 그것도 참고해 주면 좋고.”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해도 네 집안에서…….”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과 다르게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풀어 버리는 레오의 모습에 혜담은 가슴에 묻고 있던 말 하나를 더 꺼냈다.
“……난 이제 죽었다.”
집안 이야기를 꺼내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절망이 서리고 깊은 한숨을 내뱉는 레오를 보는 순간 혜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래. 다른 건 다 어떻게 되더라도 그 부분만큼은 그가 장담할 수 없는 일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혜담은 그와 그의 가족을 끊어 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알콩이달콩이와 떠나면 떠났지. 부모 자식의 천운을 끊는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일이었다.
“그치? 아무래도…….”
“이 사실 다 말하면 코맘이나 대디가 나 진짜 죽일지도 모르거든요. 그게 아니더라고 호적은 파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우리 못난이는 나 버리면 안 돼. 알겠지?”
“날 내치면 내쳤지. 설마 자식인 널 그러시겠어? 좋으신 분이던데…….”
갑자기 자신의 두 손을 꼭 잡고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는 레오를 보며 혜담은 말을 얼버무렸다. 크리스마스 밤에 뵈었을 때, 좋은 분 같던데. 그리고 마치 저와 레오를 응원해 주시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의 지금 결정 하나도 그런 분들께 상처를 드릴 것을 생각하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죽든 살든 일단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쫓겨나도 난 우리 못난이랑 평생 함께 살면 되니까. 이제 뭐 할까요? 아! 결혼식은 최대한 빨리하는 게 좋겠죠?”
집안에서 허락을 해 줄지 안 해 줄지도 모르는데 결혼식을 한다고?
“어디서 하지? 초대할 사람 많아요? 여기 이 섬도 괜찮은데……. 결혼식은 여기서 하고 손님들은 근처 리조트에서 묶으면 되니까.”
“……그래서 우리 결혼하고 알콩이 달콩이랑 다 같이 산다고?”
혜담은 지금까지 그와 나눈 대화를 간단하게 정리해서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정리하고 찬찬히 나눠 볼까요?”
화사하게 웃는 레오를 보던 혜담의 입꼬리가 조금 위로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오의 입술이 혜담의 보조개 자리에 닿는 것에 이어 입술에 안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