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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가 남기고 간 맛있는 커피 향과 침대 안의 온기를 만끽하며 늘어지게 한잠을 더 자고 일어난 혜담의 얼굴엔 평온함이 가득했다. 임신 중엔 알파의 페로몬이 꼭 필요하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레오의 곁에서 잔 것만으로도 이렇게 컨디션이 좋을 수가 있다니……. 그런데 아기가 있다는 말은 어떻게 하지?
“아빠가 필요해? 나로는 부족해?”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혜담은 아랫배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편평했던 자신의 아랫배는 이제 만지면 느껴지고, 옆으로 보면 조금 나온 것이 확실히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더 나올 테고,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숨기거나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레오와 친밀하게 지내다 보면, 아니 오늘 안에 들킬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그의 청혼에 대한 대답보다 아이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먼저인 것 같았다.
혀를 차며 거울 앞에 서서 제 몸을 보던 혜담은 편안하고 헐렁한 옷을 입고 1층으로 향했다.
쿨럭.
방 밖으로 나올 때까지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계단을 내려가던 혜담의 입에서 기침이 튀어나왔다. 집 안을 채운 탁한 연기와 탄 냄새.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비슷한 일을 겪었던 혜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온달!”
“……내려오지…… 아-. 빨리 나가요.”
매캐한 냄새와 연기를 뚫고 나온 레오의 손발이 그의 말보다 먼저 움직였다. 뭐라 말리거나 대꾸할 겨를도 없이 그의 품에 안긴 혜담은 어느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너…… 뭐야!”
“고추장이…… 이렇게 빨리 탈 줄은, 창문 다 열고 불 껐는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내려와요! 계속 자고 있지.”
지난밤 그가 그렇게 헤매던 휴식처에 있는 흔들의자에 자신을 내려놓고는 변명을 하는 레오를 쳐다보던 혜담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흠잡을 곳 하나 없다며. 엄청 잘났다며. 못 하는 것도 없고. 웬만한 일에 당황하지도 않으며, 늘 침착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며.
“진미채가 없는데 뭐 만들려고 고추장을 볶아?”
“반건조 오징어 잘게 찢었어요.”
“된장은?”
“그건 끓였죠.”
끓였다라……. 끓였지. 레시피대로 물 넣고 안에 있는 재료 다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된장찌개 밀키트를 실패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럼, 된장에 밥 먹자. 된장에 밥 비벼 먹으면 돼.”
연기가 빠질 동안 집엔 들어가지 못할 것 같고, 간단하게 들고 나와서 늦은 아점을 먹으면 될 것 같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던 혜담은 당황한 표정의 레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밥 안 했어?”
혜담은 밀키트에 즉석밥을 즐겨 먹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것보다 편한 음식이 어딨을까.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로 식사는 최대한 자연식을 찾고 있었다. 조금 더 좋은 식재료를 찾고, 재료가 갖고 있는 본연의 맛을 즐기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음식들이 레토르트 음식보다 잘 먹히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레토르트 식품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된장찌개 밀키트는 있어도 즉석밥은 없었다. 혼자지만 먹고 싶을 때 바로바로 지어 먹을 수 있는 전기밥솥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준비하면 10분 안에 전기밥솥은 고슬고슬 맛있는 밥을 만들어 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혜담은 평소의 유들유들한 모습은 어디 가고 경직되어 있는 레오의 팔뚝을 두어 번 툭툭 쳐 주었다.
괜찮아. 살다 보면 다 그런 거지.
“여기 잠시만 앉아 있어요.”
“온달아.”
“…….”
“요거트랑 시리얼 가지고 와. 냉장고 야채칸에 베리 종류 씻어서 먹기 좋게 팩으로 담겨 있거든? 그것도 챙겨 오구. 그럼, 이해해 줄게. 밥은 못 해도 이런 심부름은 잘할 수 있지?”
요거트에 베리와 시리얼을 넣어 한입 크게 먹은 혜담은 뭉게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즐기는 것도 잠시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오는지 빤히 저만 쳐다보는 레오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혜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봐 주었다.
“왜.”
“너무 못생겨서요.”
“참나. 못생긴 사람이랑 왜 결혼하려고 하는데? 그것보다 폭풍우 치는데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여길 와?”
“혼자 있었잖아요.”
“나 여기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거든? 새삼스럽게 지금까지 찾지도 않다가 이제 와서? 거기다 내가 왜 혼자야? 나 혼자 아니야.”
혜담은 푸르름이 가득한 레오의 눈을 보며 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알아채면 계속 말하는 것이고, 이래도 모르면 어쩔 수 없고.
“바로 알지 못해서 미안해요.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조심도 했고, 지금도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아서…….”
혜담은 레오의 시선이 자신의 아랫배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슬쩍 손을 들어 복부를 감쌌다.
“베타 아니야.”
“또…… 히든이야?”
깊은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레오의 말에 혜담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유명한 그의 부모님 스토리는 이미 알고 있고, 레오와 자신 역시 정상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나 오메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 아기도 특별한 걸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알콩이달콩이가 같이 있어서 그래.”
분명 지난밤까지는 태명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샤워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것이 알콩이달콩이였다. 태명은 거창하고 멋지게 짓는 게 아니라 직관적으로 짓는 거 아니던가? 그리고 떠오른 것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보았을 때도 뭔가 찰지게 잘 맞는 것 같았다.
“알콩달콩. 아니. 잠시만…… 저기 지금.”
어제부터 레오에게서 제일 많이 보는 표정은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이었다. 초록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는 혜담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지금껏 왼손에 잘 끼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빼냈다.
“그러니까 무르려면 지금 물러.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이야. 난 우리 알콩이 달콩이랑 셋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거든. 거기에 너 끼워 주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내 의지인 건 알고 있지?”
엄지와 검지로 반지를 살짝 잡고는 햇살에 비쳐 보던 혜담은 느릿하게 일어나는 레오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던 레오가 가까워지자 지금까지 싱글벙글 웃던 혜담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가셨다.
심각한 표정으로 레오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자 혜담은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는 들고 있던 반지를 천천히 그에게 내밀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은 아기를 싫어하는 그에겐 충분히 버거울 수 있었다. 그런 것으로 레오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태중의 아이가 알파일지 오메가일지 베타일지는 조금 더 커 봐야 안다고 했다. 하지만 알파나 오메가라 하더라고 일반적인 알파나 오메가 태아와 달리 그들의 페로몬은 태어나기 전까지 알 수 없다는 설명도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쌍둥이 알파, 오메가의 생존 방법이었다. 같은 형질이라면 부딪칠 것이 뻔했고, 다른 형질이라면 더 강한 쪽의 영향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레오의 두 손이 무릎에 닿자 혜담은 저도 모르게 움찔 뒤로 몸을 물렀다. 늘 견고하게만 보이던 알파가 제 허벅지 위로 얼굴을 묻는 것을 알면서도 혜담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잊어서 미안해요. 몰라서 미안해요. 또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도…… 혼자 있게 한 것도…….”
레오의 꽉 막힌 목소리에 혜담은 테이블 위에 반지를 내려놓고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창한 이유나 변명이 들어가지 않은 그의 솔직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형식적인 예의상 하는 미안하다는 말과 지금 그가 꺼낸 미안하다는 말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넌 다섯 살이었고, 난 여덟 살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 그리고 스무 살의 넌 정말 힘들었을 때라며, 날 잊어야만 했을 이유가 있으니까 그랬겠지. 알콩이 달콩이는 내가 정확하게 말하지 않은 것도 있고. 또, 휴가 일주일 쓴다고 해 놓고 업무 복귀 안 한 것도 나잖아.”
레오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며 만드는 부드러움에 딱딱하게 굳었던 혜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인다. 각자 제 기준으로 생각하고 마니까,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수만 마디의 말보다 작은 움직임 하나가 더 많은 뜻을 담고 다가왔다.
“너 잘못한 거 없어. 부모님을 떠나보냈을 때 네가 나 대신 더 많이 울어 줬잖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내 옆에 있어 줬잖아. 그리고 평생 혼자 지내다가 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게 알콩이 달콩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줬고.”
혜담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레오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검은색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괜찮아. 미안해하지 말고 죄책감이나 책임감 이런 거 안 가져도 돼. 그런데 나 회사 복귀는 못 할 것 같아. 이런 상황인데, 예전처럼 널 그냥 직계 상사로 모시는 건 내가 못 하겠어. 그러니까 반지 들고 돌아가.”
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었으니 이젠 그의 짐을 덜어 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