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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일이 없다.
어떻게든 혜담에게 잘 보여 이미 잃은 점수를 만회하는 것이 급급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결심과는 달리 엉망진창으로 일이 꼬여 버리자 당황한 레오는 1층 정문 앞에 선 채 2층 계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루나와 통화를 하며 그녀의 추천대로 옷을 입고, 반지도 잘 챙겼다. 네잎 클로버도 구겨지지 않게 종이 사이에 끼워 잘 가지고 왔는데…….
심한 바람에 결국 헬기는 타지 못했고, 절대 출항하지 못한다는 항해사에게 그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주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흔들리는 배는 처음이었고, 난생처음 뱃멀미라는 것도 겪었다.
어쨌거나 혜담이 있는 섬에 무사히 도착했고, 제게 남은 것은 그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고 얽힌 오해를 푼 다음 청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비바람 부는 날씨에 야외 휴식처에 나와 있는 혜담을 보는 순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전한 집 안에서 맛있는 것이라도 먹고 있지, 이 야밤에 왜 밖을 돌아다니는 건지. 혹시 잠시 나왔다가 다쳐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인가부터 해서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혜담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레오는 무릎을 꿇었다. 혜담을 만나면 무릎 꿇고 머리부터 박으라는 루나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건 본능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나하나 다 풀어서 설명하고 그의 마음부터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포근하고 달콤한 페로몬을 맡는 순간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더는 놓칠 수 없다, 무슨 수를 쓰든 더는 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충동이 거칠게 일었다.
자신을 보고 놀란 커다란 눈과 입을 꾹 다물어 깊어진 보조개를 보며 레오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이미 한번 그에게 청혼을 했다. 다섯 살의 제가 그에게 건넨 건 네잎 클로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약속대로 반지를 줄 수 있었다.
준비한 반지를 꺼내고, 그의 손가락에 끼우기만 하면 됐는데…….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반지보다 매몰차게 자신을 밀어 버리고 별장으로 가는 혜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까지 야무지게 한 혜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때 그의 기분이 이랬을까? 한번 뒤돌아봐 주었다면 얼굴에 철판 깔고 무데뽀로 들이밀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반지도 사라져 버렸다.
태어나서 이렇게나 자신이 무능력하고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잦아들지 않는 비와 휘몰아치는 바람이 제 상황을 확실히 일깨워 주는 것 같았다. 혜담의 마음은 지금 이 날씨보다 더 혼란스럽고 힘들지도 몰랐다.
혜담이 용서를 해 줘야 들어가든 말든 하지. 그 전에 작은 구실이라도 만들 수 있는 반지를 떠올린 레오는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혜담이 서 있었던 방향과 그의 손 움직임을 떠올리며 레오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는 일에 도전했다.
하늘이 저를 버리지 않은 것인지, 멀리서 저를 부르는 것 같은 혜담의 목소리를 듣던 레오는 자신의 귀와 눈을 동시에 의심했다. 혜담이 저를 부른다고? 그것보다 어두운 밤. 휴대전화 라이트에 의지해서 보는 모래사장에서 검은 것이 빛을 내었다.
저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면 부르던 “팀장님”도 제가 조르거나 그의 기분이 좋을 때나 들을 수 있던 “레오”도 아닌 “야!”라는 단어였지만 그가 저를 불렀다는 것에 설렜다. 그러면서도 레오는 섣불리 모래사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숫자를 세는 동안에도 급히 달려가는 것 대신 검은 빛을 내는 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이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인지 주운 반지를 주먹 안에 꼭 쥔 레오는 그제야 혜담에게 갈 수 있었다.
호들갑스럽게 뛰어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미적거릴 수도 없었다. 그와 다시 가까워지자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본능적으로 그에게 블라인드를 씌워 버렸다. 이미 그때부터 자신은 혜담의 것이었다.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블라인드가 풀렸지만 같이한 시간이 짧아서 그랬던 것인지 블라인드가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만난 지금. 같이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블라인드가 풀린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만큼은 자신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단 한 번…… 충동을 못 이긴 그날을 제외하고 노팅을 한 적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혜담이 오메가라고 인지하고 있었지만 히트와 러트 주기가 겹친 상태에서 노팅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갖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무슨 변명이나 핑계를 갖다 댄다고 해도 아이까지 가진 자신의 페어를 혼자 둔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씻고 들어와.”라니……. 그의 목소리는 냉랭했고, 저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2층으로 가 버린 혜담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가 서 있는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는 것도 모른 채, 2층만 바라보고 있던 레오는 천천히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그러자 모래가 잔뜩 묻은 검은 우주석으로 만든 반지가 그곳에 있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고?
침울하던 레오의 입술이 실룩거리다 결국 호를 그리며 위로 올라가고, 다 죽어 가던 초록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다시 반지를 꼭 쥔 레오는 곧바로 1층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일단 씻어서 이 꼬질꼬질한 모습을 벗고 아직 꺼내지도 못한 네잎 클로버도 챙겨서…….
“…….”
노크를 했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기에 조심스럽게 혜담의 방으로 들어간 레오는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침대 옆 작은 스탠드만 켜진 방 안을 가득 채운 건 따뜻함이 가득한 혜담의 페로몬과 평온한 숨소리였다.
그새 잠들었네.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간 레오는 옆에 있는 의자나 침대가 아닌 카펫이 깔린 바닥에 몸을 낮춰 앉았다. 모로 누워 잠든 혜담의 얼굴을 보는 레오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제게 바보 온달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혜담. 보름달이라니 온전하게 동그란 달이라서 온달이라고? 아니잖아. 그런데 자신은 정말 바보가 맞았다. 페어를, 저도 모르게 각인까지 맺은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멍청한 자신은 한 사람에게 세 번이나 반했다. 두 번이나 놓친 이를 또 놓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 못난이 너도 몰랐잖아.
내가 몇 번이나 와서 네 옆에서 자고 갔는데.
혜담이 잠든 틈에 방문해 집을 정리하고 가는 관리인들처럼 저 역시 그랬다.
뒤척거리다 잠시 눈을 뜬 혜담과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혜담의 얼굴에도 옆은 미소가 생겨났다.
“……온달이 왔네.”
낮고 작은 목소리엔 바람 소리까지 잔뜩 들어가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말이었지만 레오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이리 와.”
혜담이 이불을 슬쩍 들면서 하는 말을 놓치지 않은 레오는 느릿하게 일어나 그의 곁에 눕자 자연스럽게 혜담이 품에 파고들었다.
하암.
제 팔을 베고, 척하니 한 팔과 한 다리를 제게 올린 혜담은 눈을 감은 채, 작게 하품을 하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 늘 이랬잖아. 뒤척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자신을 온달이라고 불렀고, 제 품에 꼭 붙어 편안한 잠을 즐긴 혜담이었다. 그의 곁에서 짧은 시간 눈을 붙인 레오는 그가 깨어나기 전 그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곤 꼬여 버린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들으며 작은 섬을 떠났다. 몇 번 그런 일을 저질렀더니 밀리고 밀린 일이 폭주해 버렸고, 최근 일주일 동안은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다. 결국, 다시 이곳에 와서 혜담을 품에 안고 있지만 말이다.
혜담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꼭 끌어안자 금세 그의 입에서 불평 어린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알겠어. 자는 거 방해된다 이거지? 그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푼 레오는 침대 옆 협탁에 자신이 올려 둔 작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혼나는 건 내일의 내가 하겠지, 뭐.
상자 안에 넣어 온 반지를 다시 꺼낸 레오는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리고 자신의 왼손 약지에도 반지를 끼웠다. 뭐라고 하면, 밤에 허락했다고 우기면 되지 않을까?
“못난아.”
없던 일을 우기는 건 안 되니까. 레오는 작은 소리로 혜담을 불렀다.
“웅.”
작은 소리가 돌아오자 레오는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줘. 내가 잘못한 건 평생 같이 살면서 다 갚을게.”
“…….”
말을 거는 것이 귀찮은지 혜담이 대답 대신 몸을 홱 돌려 버리기에 레오는 냉큼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예쁜 못난아. 대답해 줘.”
“……웅.”
얼렁뚱땅 원하는 대답을 들은 레오는 혜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시다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조금 움직였다. 아기가 있다고? 혜담과 자신의 아기. 느릿하게 혜담의 배를 쓰다듬던 레오의 손이 혜담의 아랫배 전체를 덮었다.